청춘 2 -진은영

 

 

맞아 죽고 싶습니다
푸른 사과 더미에
깔려 죽고 싶습니다


붉은 사과들이 한두 개씩
떨어집니다
가을날의 중심으로


누군가 너무 일찍 나무를 흔들어놓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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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구 - 이정록

그릇 기(器)라는 한자를 들여다보면
개고기 삶아 그릇에 담아놓고
한껏 뜯어먹는 행복한 식구(食口)들이 있다
작은 입이 둘이고 크게 벌린 입이 둘이다
그 중 큰 입 둘 사라지자 울 곡(哭)이다
식은 개고기만 엉겨붙어 있다
개처럼 엎드려 땅을 치는 통곡이 있다

아니다, 다시 한참을 들여다보면,

기(器)란 글자엔 개 한 마리 가운데 두고
방싯방싯 웃는 행복한 가족이 있다
옹기종기 그릇이 늘어나는 경사가 있다
곡(哭)이란 글자엔, 일터에 나간 어른 대신
남은 아이들 지키느라 컹컹 짖는 개가 있다
집은 제가 지킬게요 저도 밥그릇 받는 식구잖아요
밤하늘 별자리까지 흔들어대는 목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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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관을 짜는 남자 - 임현정


한밤까지 이어지는 못질 소리

심장에 박아대는 것 같아


피 묻은 대못들이 모여

아무리 대문을 두드려도

주인은 나오지 않아

열쇠장이는 따따블을 부르고

두근대는 호기심은 따따따블이야


현관에 세워져 있는 껍질이 벗겨지 통나무들

아니 조금씩 관을 닮아가는 것들

지나치게 아늑해 보여


그는 작업실에 있었어

아주 흔한 얼굴의 사나이

죽은 새를 넣는 작은 관부터

거구의 남자가 주문한 대형 관까지


어둠이 고인 유리 진열장 안은

심해에 가라앉은 난파선처럼 고요했지


막 완성된 관은 아주 작았어

그는 곁에서 젊은 여자에게

말없이 작은 관을 건넸어

여자는 문득 두고 온 아이가 생각났지.

꼭 그 사이즈였어


관 귀퉁위마다 적혀 있는 이름들

공포에 질린 사람들의 대이동이 시작되었어

상냥한 남자는 일일이 손을 흔들어주고

간혹 주문 품목을 손수 메고 가는 성급한 고객들도 있었어

개미 떼처럼 지루한 행렬


별이 없는 밤

반짝이는 못대가리는 밖에서만 보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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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운묵서(玄雲墨書) - 이정록

겨울 논바닥
지푸라기 태운 자리
얼었다 풀렸다
검게 이어져 있다

산마루에서 굽어보니
하느님이 쓴 반성문 같다

왜 이리 말줄임표가 많지?

겨울 새떼들이
왁자하게 읽으며 날아오르자
민망한 듯 큰 눈 내린다

반성문을 쓸 때
무릎 꿇었던, 쌍샘에서
소 콧구멍처럼 김이 솟아오른다

온 들녘에, 다시
흰 종이가 펼쳐지자
앞산 뒷산이
깜깜하게 먹으로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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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 아래 다시 생긴 점은 구태여 빼지 않을 작정이다 - 성미정


눈 밑의 점은 눈물점이란 얘기를

듣고 난 후 빼버려야겠다고 결심했다

난 드라이한 사람이고 눈물

따윈 내게 어울리지 않으니까


구월 어느 날 비뇨기과에 가서

(우리 동네는 비뇨기과가 피부과도 겸하고 있다)

살 타는 냄새와 함께 점을 뽑았다


그런데 아직 여름 햇살이 남아

있는 탓인지 주근깨처럼 엷게 눈 밑의

점이 다시 올라오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러나 나는 김수영이 그러했듯

내 눈 아래 다시 생긴 점을 구태여

빼지 않을 작정이다


김수영은 모든 곡은 눈물이고

눈물은 시인의 장사 밑천이라

빼지 않겠다고 시인다운 이유를 댔지만


나는 단지 그 비뇨기과에 다시 가기

싫고 살 타는 냄새를 두 번 맡고 싶지

않다는 전혀 시인답지 않은 이유로

빼지 않을 작정이지만


어쨌든 다시 빼지 않겠다는 점에

있어선 김수영과 다를 바 없고 엷은

주근깨처럼 눈물점이 올라오고 있는 건

그래도 내게 시인의 마음이 엷게나마

남아 있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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