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식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플라톤의 대화편 <향연>을 읽다보면 자웅동체 혹은 남녀양성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신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주 옛날에 인간들은 전부 지금의 인간 둘이 등과 등이 맞닿은 형태로 존재했으며, 그 둘은 남남이기도 남녀이기도 여여이기도 했다. 어느 날 제우스가 이 인간들의 지혜와 힘을 질시하고 두려워하여 벼락을 내려 인간들을 전부 반토막내버렸는데, 그 결과 이제 사람들은 각각 그 때 잃은 자신의 반쪽들을 찾아 헤매인다.

플라톤이 전하는 이 신화는 인간의 진정한 본성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다같이 포함한다는 의미로 읽힐 수 있는 반면 히라노 게이치로의 <일식>에 등장하는 남녀양성체는 정신과 육체의 합일, 신성과 인간성의 일체를 상징한다.

이 소설의 배경은 일본작가의 선택으로는 상당히 특이하다고 할 만한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초반 사이 이단심문이 횡행하던 서양 중세이다. 주인공은 토마스 철학 연구자이며 또한 도미니크 회 수도사인 니콜라이. 그는 귀중한 헌 책들을 찾아 피렌체로 여행을 떠나는 도정에 연금술 연구자 삐에르 뒤뻬르를 만나기 위해 한 작은 마을에 들른다. 이 곳에서 그는 그 존재의 기원을 알 수 없는 남녀양성체가 마녀로 몰려 화형당하는 장면과 그 시각에 동시에 발생한 기이한 사건을 함께 목격하게 된다.

젊은 교토대학 법학부 학생이 쓴 것으로 명망 높은 아쿠다가와 상을 수상했다고 해서 유명세를 탄 이 소설의 주제를 읽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그것은 제도적 종교로서의 교회가 포용하지 못하는 일반 민중의 삶의 영역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는 이단의 성격에 대한 고찰이다. 영과 육의 합일, 신성과 인간성의 일체화는 바로 이 이단 혹은 제도로서의 교회 외부에 존재하는 신비주의의 주장에 해당한다. 금을 만드는 기술에 국한되는 것으로 치부되기도 했지만 실은 당시로서는 오늘날의 과학탐구와 유사한 기능을 하기도 했던 연금술의 이상이 자세히 기술되는 것은 이러한 주제를 효과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한 소설적 장치이다.

이 책에 함께 실린 작가 인터뷰와 아쿠다가와 상 선정경위는 심사위원들에게 특히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이 이 소설의 장중한 의고체 문장이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번역을 통해서도 그런 분위기는 그런대로 전달이 되었으나, 아무래도 원래 언어의 사용자들이 받은 충격에는 비하기 어려울 것이다.

소설의 주제는 남녀동형체라는 상징과 연금술이라는 소재를 통해 잘 표현되었다. 그러나 서양중세가 배경이라는 점만 빼면 주제 자체가 크게 신선하다고는 평하기 어렵다. 젊은 작가의 패기 어린 데뷔작이라고 생각하고 읽으면 좋을 듯 싶은 작품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드무비 2005-10-03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내용이 그래서 그런가 리뷰가 평소보다 조금 딱딱한 감이......
그래도 님의 팬으로서 추천 꾹 누릅니다.^^

검둥개 2005-10-05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부끄럽사옵니다. 다음에는 부드러운 리뷰를 쓰도록 할께요. 헤헷. ^ .^
 
슬픔이여 안녕 범우 사르비아 총서 635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이정림 옮김 / 범우사 / 1999년 11월
평점 :
품절


오직 젊음의 펜대로만 쓰여질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뜨거운 여름날 오후에 마시는 마가리타 한 잔 같다고 하면, 이 눈부신 짧은 소설에 대한 적절한 찬사가 될까?

처녀작으로 18세에 일약 프랑스 문단의 총아가 된 사강은 술과 도박, 마약과 레이싱으로 위태로운 삶을 살았으며, 처녀작을 능가하는 작품을 남기지 못한 불운한 작가이기도 했다.

<슬픔이여 안녕>의 주인공은 17세의 소녀 세실. 보드란 찰흙처럼 타인의 영향에 민감하고, 오렌지의 강렬한 향이든거나, 커피의 뜨거운 쓴 맛,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는 입맞춤의 황홀함 같은, 감각이 제공하는 삶의 단순한 쾌락에 눈뜨기 시작한 계집아이이다.

이 매력적인 세실의 성격이 이 소설이 지닌 흡인력의 팔 할을 설명한다. 냉소적이고 사악할 정도로 계산적이지만 동시에 여리고 감성적이며 유유부단하고 (젊은 탓에 딱 그만큼) 무지한 여자애. 삶이 낯설고, 지루함과 막연한 불안으로부터의 끊임없는 도주로서 외에는 인생을 달리 이해하지 못하는 이 아이가 저지르는 치명적인 실수. <슬픔이여 안녕>은 바로 그 실수에 대한 이야기이며, 순진하고 교묘한 젊음 속에 내재한 악마성에 대한 애틋한 송가(送歌)이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드무비 2005-09-29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짧지만 강렬하고 흡인력있는 리뷰라고 생각함!^^
(그런데 마가리타, 이름은 들어봤는데 뭐래유?)

검둥개 2005-09-29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로드무비님, 이 짧지만 촌철살인의 코멘트!  사실은 짧은 데에 다 사연이 있어요. 십오년만에 다시 읽고 감동을 받아 (난 아직 젊은게야! +.+) 리뷰를 쓰려고 했는데 그게 안 써지는 거에요. 그래서 상품 사진을 박은 걸 그냥 지웠는데 그게 잘못해서 뻬빠로 저장이 되었더랍니다. 그걸 모르고 자고 나서 서재에 들어와보니까 거기에 댓글이 둘이나 달린 거에요. 윽. 댓글이 달렸으니 뻬빠를 지울 수도 없고. ㅠ_ㅠ 그래서 결국 안 써지는 리뷰를 울며 겨자먹기로 ^ . ^

  마가리타는요, 요렇게 생긴 잔에 나오는 술. 소금이 주변에 박혀 있어요. 예전에 선배가 사 줘서 한 잔 먹었더랍니다. (공짜라면 하여간 양잿물도 먹어요.)  ^^;;;  음, 한 번 더 마셔보고 싶네요.


로드무비 2005-09-29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아하니 색은 별로 마음에 안 드는데 소금이 박혀 있다니,
한번 마셔보고 싶군요.^^

검둥개 2005-09-29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색깔은 바꿀 수 있지 않을까요. 파란색으로 만들 수 있다고 들은 거 같아요. 아니 내가 먹은 게 파란색이었나. 기억이 가물가물. ^^;;;

blowup 2005-09-29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가리타.. 이상하게 확~ 취하는 음료(?)죠. 마가리타 마시고 맛이 갔던 기억이 있어요. 속이 울렁울렁거려요. 흔히 소금을 손등에 묻혀 멋지게 입술로 훑죠. 작업용 술 같기도 해요.

blowup 2005-09-29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굵은 오버 스티치 같은 리뷰. 무슨 말일까요? ㅋㅋ

검둥개 2005-09-29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무님 ㅋㅋ 작업용 술이요. 표현이 재밌습니다. :)
근데, 굵은 오버 스티치 같은 리뷰는 무슨 말이래요? @.@

blowup 2005-09-29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뜻이에요. 오버 스티치는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 멀리서도 눈에 확 띄어요.^^

검둥개 2005-09-29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그런 뜻이근요. ㅎㅎ 저도 그 표현을 나중에 써먹어봐야겠어요. ^ .^
 
진주 귀고리 소녀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양선아 옮김 / 강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누가 독자 입장에서 좋은 소설이 뭐냐고 물으면 나는 아름답고 재미있으면서도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해주는 이야기라고 하겠다. 이 세가지 모든 측면에서 <진주 귀고리 소녀>는 별 다섯이 아깝지 않은 소설이다. 작가는 어리지만 날카로운 눈과 신중한 판단력을 지닌 화자를 내세우고 그에 걸맞는 투명한 단문체를 구사함으로써 소설의 소재가 된 그림만큼이나 아름다우며 신비롭고 불가해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소설의 화자인 그리트는 폭발사고로 시력을 잃은 타일제조공의 딸이다. 나중에는 푸주간집 아들과 결혼해 평범한 삶을 살지만, 16세에서 18세 사이의 두 해 동안 그리트는 당대에 이미 상당한 명성을 누리고 있던 화가 베르메르의 집에서 하녀 생활을 하며 복잡하고 아득하고 쓸쓸한 경험을 한다.

빛깔과 구도에 유달리 섬세한 눈을 지닌 그리트에게 이끌려 베르메르는 원래 그녀의 몫이 아닌 물감재료를 구입하고 물감을 준비하는 등의 일을 시키고, 나중에는 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그림까지 그리게 된다. 그리트 역시 화실 청소를 하면서 본 주인의 눈부신 그림에 매혹되고, 자기도 모르게 그림에 대해 하녀로서는 주제넘다 할 수도 있는 의견을 내며 점점 더 자신이 속하지 않는 영역으로 끌려든다. 당연히 이 둘은 나이의 차이와 신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이끌리지만, 흥미롭게도 작가는 그러한 이끌림을 소설 속에서 한 번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소설 속에서 노골적으로 묘사되는 것은 오히려, 모호하고 유유부단하면서도 (최소한 그리트의 눈에는) 매력적인 베르메르가 얼마나 '이기적인' 인물인가 하는 것이다. 그는 그리트가 곤경에 처할 것을 알면서도 그림의 제작을 승낙하고, 그녀를 모델로 만들고, (그리트가 절대로 벗고 싶어하지 않는) 두건을 풀게 하고, (그리트가 몸에 두르고 싶어하지 않는 색깔인) 이국적인 푸른빛과 노란빛의 천을 대신 두르게 하며, (그리트의 탄원에도 불구하고) 아내의 귀걸이를 착용하게 하며, 그녀로 하여금 제 손으로 그 귀걸이를 위한 구멍을 뚫다가 기절하게 만들고, 그리고 (부도덕한 여성만이 보이는 모습이라는) 입을 약간 벌리는 얼굴을 할 것을 요구한다. 그로 인해 그녀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일 때에야 그는 드디어 만족한다.

그리트는 이 모든 요구들 아래 놓인 함정을 다 꿰뚫어보면서도, 반은 매혹의 힘에 이끌려 그리고 반은 자신의 의지력에 따라 그 함정들 속으로 자진해 걸어들어간다. 이 총명하고 입이 무거우며 의지력이 강한 소녀가 자신의 발목을 자를지도 모르는 지뢰밭을 천천히 거니는 장면 장면은 소설을 읽는 사람의 마음에 둔중하면서도 공명이 강한 감동을 남긴다.

나는 그것이 베르메르에 홀린 철없는 소녀의 미칠 듯한 사랑이었다기보다는, 어둡던 그녀의 삶을 유일하게 밝혀준 그의 그림에 대한 헌신이었으리라 생각한다. 게다가 굴욕을 느끼면서도 그리트가 베르메르의 요구를 들어주었던 것은, 반은 그를 사랑해서였는지도 모르지만, 더 엄밀하게는 그녀가 그에게 진 빚 때문이었다. 베르메르는 그녀의 부모가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그녀에게 하녀 자리를 주었고, 그녀에게 소중했던 할머니의 빗을 되찾아준 사람이었다.

삶은 좀처럼 낭만적인 것이 되지 못해서, 결혼으로 그리트가 빚지게 되는 사람은 이번에는 남편이다. 그녀가 피터와 결혼한 건 부모의 식탁에 가끔이라도 고기점을 얹어줄 수 있기 위해서였고, 남편 피터는 베르메르의 집에 외상으로 넘겨준 고기값을 받지 못한 것이 하녀와 결혼한 가격이라 농담한다. 아버지의 색이 고운 타일과 할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예쁜 빗을 아끼던, 손톱 아래 배이는 고기의 핏물을 꺼려하던 그 소녀는 결국 매일 피흐르는 붉은 고기를 잘라 파는 푸주간집 아낙이 되었다.

죽으면서 베르메르가 그녀에게 남겼다는 진주귀걸이는 그래서 그녀에게 이루어지지 않은 애달픈 첫사랑의 기억 따위를 상기시키지 않는다. 베르메르가 남긴 진주귀걸이는 그 빚의 뒤늦은 청산이었다. 그녀는 20길더 중에 15길더를 피터에게 줄 것이다, 여분의 5길더는 자신이 보관할 것이다, 그리고 그 돈은 아무 곳에도 쓰지 않을 것이다, 라고 다짐한다.

베르메르는 죽으면서 채무를 갚았다. 그리트는 비로소 빚지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없는 이 안 2005-08-19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읽고 나니까 이 소설을 다시 읽은 것 같아요. 기억이 새록새록. 이를테면 소프라노로 시작했다가 알토와 테너, 베이스가 합류했다가 각 성부가 하나씩 빠지면서 소프라노만 오롯이 남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그렇죠, 그리트는 마침내 빚지지 않은 사람이 되었죠. 사랑을 얘기했으나 채무의 갚음으로 결론을 내시다니, 묘한 느낌이네요. 전 소설 먼저 읽고 영화를 봤는데, 아차 싶었어요. 영화 먼저 보고 소설을 읽어야 아쉬운 감정이 없었을 텐데 말이죠. 하긴 영화가 소설의 디테일한 모서리를 쳐내는 게 당연한가요? ^^

검둥개 2005-08-19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힛 이안님 전 영화 먼저 보고 소설 봤어요. 영화를 먼저 본 게 하나도 안 서운했고, 소설을 읽으면서는 소설을 읽기로 한 제 결정이 너무나 뿌듯했답니다. ^^ 비주얼이 중요한 외국소설들은 확실히 영화를 먼저 보는 게 나름 도움이 되는 거 같아요. 이 소설을 소프라노와 알토와 테너와 베이스로 이야기하신 건 너무 멋있습니다. ^^
 
남아 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황봉득 옮김 / 세종(세종서적) / 1994년 5월
평점 :
품절


처음 이 소설의 저자를 봤을 때 고개를 갸웃했다. 영국집사의 이야기인데 일본작가라니. 5살 때 이민가서 영국에서 자랐다는 약력을 읽고야 그렇구나, 했지만 그래도 좀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어려서 이민을 갔다 해도 영국에서 동양인으로 그 시절에 성장기를 보냈다면 영국집사의 이야기를 자기 소설의 소재로 삼을 것 같지는 않았다. 적어도 그게 내 생각이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는 이 사람은 정말로 외양만 동양인인 영국인인가봐,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옛스럽고 고풍스런 영국 집사의 말투가 얼마나 웃긴지 (대화의 내용과 무관하게) 배꼽을 잡아야 했다. 카즈오 이시구로는 주제에 따라 다른 문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아주 잘 훈련된 작가였다.

독서 전, 이 소설에 관한 두 가지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첫번째는 이 소설의 화자가 신뢰할 수 없는 화자(unreliable narrator)라는 것. 이 책은 전적으로 노집사 스티븐스의 회상으로 이루어지는데, 이 스티븐스의 회상은 나중에 부정확하며 편견에 치우친 것으로 밝혀진다. 두번째는 이 소설의 시각적 배경. 오래 전 명화극장에서 이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를 미리 본 탓에 소설을 읽는 동안 내내 내 머리 속에서 주인공 미스터 스티븐스는 당연히 앤쏘니 홉킨스의 얼굴을, 또다른 주인공 미스 캔튼은 엠마 톰슨의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 책을 읽는 것은 지루하지 않았다. 처음에 이 책은 유쾌하고 코믹했으며, 읽어가면 갈수록 "정말 이 책의 화자가 신뢰할 수 없는 화자 맞어?"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전개가 유연했다. 그래서 마지막의 스리슬쩍 반전은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왔고, 막바지 부분에서는 그 때까지 스티븐스를 통해 서술되어온 달링턴 홀의 짦은 역사 뿐 아니라 이 소설 자체의 의미까지도 혼란스러워지는 경험을 했다. 아마 이런 것이 책읽기의 즐거운 혼란일까?

감정표현에 매우 인색한 것은 영국인들의 한 특징이라는데,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실로 영국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주제를 다룬 소설이 막바지 부분으로 치달으면서는 그야말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감상적으로 변한다. 절제의 미학과 극단적 감상주의가 이렇게 완벽하게 결합된 경우를 나는 본 적이 없다. (이것은 아마도 저자가 일본계인 것과 관계가 있을까?) 

해가 막 저무는 부두가 벤치에 앉아 주인공 스티븐스는 우연히 같은 벤치에 앉게 된 낯모르는 사람에게 "나는 내가 수십년간 집사로 봉사한 달링턴경에게 내가 줄 수 있는 모든 서비스를 제공했다. 그래서 이제 나에게는 더이상 고용주에게 선사할 것이 남아 있지 않다"라고 흐느낀다. 그의 충성과 애정을 한 몸에 받은 그 달링턴경은 명예를 존중한 구식 영국신사였지만, 혼돈의 역사 속에서 길을 잃고 그만 잘못된 정치적 노선을 따르는 큰 우를 범한다. "달링턴경은 그래도 말년에 자신이 우를 범했음을 인정할 줄 알았다"고 스티븐스는 그의 고용주를 회상한다.

"그러나 그런 실수를 나는 나 자신이 범했다고조차도 말할 수 없지 않은가"라고 그가 한탄하는 바로 그 때, 부두에서는 해가 지고 가로등이 찬란하게 켜진다. 사람들은 일제히 박수를 친다. 그 때까지 기계공의 정확성을 가지고 경영해온 자신의 삶이 실은 무의미하게 낭비되었을 뿐임을 깨닫고 그가 처음으로 오열할 때, 작가는 하루 중에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해가 지는 그 저녁이라고 이야기한다.

여기에 인생을 송두리째 낭비한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다. 스티븐스와 마찬가지로 미스 켄튼 역시 사랑 없이 결혼했으며 세 번이나 남편의 곁을 떠날 시도를 했다가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이런 이들을 소설의 주인공으로 무대에 올려놓고 카즈오 이시구로는 그래도 그들에게 남아 있는 시간(the remains of the day)이 있고, 그 시간(evening)이 아름다운 것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황혼의 인생을 황혼의 아름다움에 비견하는 이 감상주의가 시어빠진 신파로 전락하는 대신 소설의 인상적인 반전부로 기능할 수 있었던 것은 필시,  한 인간이 과연 얼마나 철저히 (심지어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낭비하고 훼손할 수 있는지와 정직하게 대면한 작가의 용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5-07-16 17: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5-07-16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아 있는 나날, 무지 좋아하는 영화입니다.
엠마 톰슨이 이 영화에서 참 좋았어요.
늙은 집사의 고집이 안타깝고도 슬펐고요.^^

검둥개 2005-07-16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오타 고쳤습니다. 감사해요 ^^;;;

저도 엠마 톰슨이 너무 좋았어요. 근데 Love Actually에 보니까 많이 늙었더라고요. :)

비로그인 2005-08-14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해요. 인생의 황혼기에.. 제가 저의 인생을 되돌아봤을 때,
어떤 느낌이 들까? 잘 살았고, 충분히 노력했다. 이제는 죽어도 원이없다.
혹은 뭐하고 살았니? 어쩜 그렇게 시간을 낭비했니. 되돌아가고 싶다.
전자와 후자중 어떤 생각을 할까? 그리고 꼭 전자를 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하지요. 그러기위해서는 하루하루 한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야 하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지. ^-^
가장 행복한 인간은 인생의 마지막순간, 행복한 미소를 짓고 눈을 감는자겠죠?

검둥개 2005-08-14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시장미님은 현자같은 말씀만 하세요. ^^ 누구든 자기 인생을 돌아볼 때 죽어도 원이 없다,는 생각을 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저는 이만큼 했어야 했다, 보다는, 할만큼 했다, 정도로 매일을 마무리하고 싶어요. 기대치를 줄이면 행복도가 높아지거든요. ^^;;;
 
빵가게 재습격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창해 / 200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어쩌다보니 나는 이 책을 <The Elephant Vanishes>라는 제목으로 나온 단편집으로 읽었다. 이 단편집에는 총 17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었는데, 그 중 여섯편은 이 <빵가게 재습격>에 들어 있다. 나머지 열한편도 아마 많은 출판사에서 여러가지로 묶어낸 단편선들 중 어디엔가에 있으리라 생각된다.

<빵가게 재습격>에 실린 여섯편을 포함 <코끼리 소멸>에 실린 총 17편의 단편들에서는 뭔가 패기있는 젊은 작가의 실험정신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런 느낌은 최근 하루키의 장편들에서는 좀처럼 드문 것이어서 이 책을 읽는 것은 즐거운 경험이었다. 그 외에도 희한하고 있을 법 하지 않은 일을 가벼운 필체로 날렵하게 다루는 단편들은 독자들로 하여금 이후 하루키의 장편 소설들의 소재가 갖는 일정한 일관성이 어디에서 연유하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하루키의 장편을 여럿 읽고 약간 물리려 한다는 생각이 드는 독자들은 이 (그리고 다른 여러) 단편선을 읽는 데서 색다른 즐거움을 느끼리라 생각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