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ime Traveler's Wife (Paperback)
오드리 니페네거 지음 / Harvest Books / 2004년 7월
평점 :
품절


조금만 스트레스를 받아도 입고 있던 옷과 신고 있던 양말에 신발, 떼운 이빨의 아말감까지 홀연히 남겨놓고 졸지에 사라져버리는 남자가 있다. 끊임없이 현재에서 미끄러지는 남자. 예측불허의 과거와 미래에 맨몸으로 내동댕이쳐지는 남자. 무사히 현재로 귀환하는 순간이 올 때까지 살아남기 위해서 잠긴 가게 열쇠를 따고 옷을 훔치고 길거리에서 남의 지갑을 털어야 하는 남자. 그래서 매일 아침 뛰고 또 뛰는 남자.

이 남자에게 현재는 비누거품으로 한없이 미끈거리는 빨래판, 삶은 시간의 못된 농담 같다. 시간이 이 사람을 무작위의 좌표로 내키는대로 쓸려보낸다. 마치 아무렇게나 끊임없이 자신을 흘려보내는 사람들에 대한 복수처럼.

껌딱지처럼 현재에 들러붙어 사는 우리에게도 하지만 시간이 잔인스럽기는 매한가지다. 돌아가고 싶은 과거는 굳게 닫혀 있고 피하고 싶은 미래는 오징어 흡판처럼 우리의 목덜미를 움켜쥔다. 이쯤 되면 시간여행자 헨리의 곤란한 삶이 남의 일만도 아니다.

시간여행자 헨리와 우리처럼 평범한 그의 아내 클레어는 이 시간의 압제 하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고전적이게도 그 답은 사랑과 믿음이다. 그리고 시간과 함께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것. 헨리와 다시 한 번 조우할 것을 기다리면서 47년 동안 클레어는 무엇을 했을까? 82살이 된 클레어의 뒷모습이 담긴 마지막 책장을 덮는 독자를 궁금하게 하는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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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6-02-13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복에 마시는 소주보다 알싸하게 마음을 홀리는 문장들입니다.
(우화처럼 읽힙니다만, 정확하게 감을 잡기는 어려운 책인걸요.)
검둥개 님. 반가워요. 학교공부에 바쁘셨던 건가요?
지금은 일도 하시고 학교도 나가시나요?
근황 페이퍼도 올려주실거죠?

비로그인 2006-02-13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간만에 님의 글을 읽으니 좋습니다. 그 표지도 책 내용과 딱 맞아 떨어지지요?

로드무비 2006-02-14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관함에 넣습니다.
책 표지도 님의 리뷰도 매력적이네요.^^

panda78 2006-02-14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보니까 이 책 번역본이 나왔더라구요.
리뷰 읽고 궁금했더랬는데, 얼른 보관함에 집어넣었습니다. ^^

산사춘 2006-02-16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렬하게 다가오는 리뷰여요. 저도 찜입니다.

검둥개 2006-02-17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사춘님, 잘 지내셨어요? ^^ 잘 찜하셨어요. 읽고 재밌는 리뷰 써주셔요.

판다님 오랜만 오랜만 오랜만여요. ^ .^
덕분에 번역본 나온 걸 알구 거기다가 리뷰를 붙였어요.
근데 그래도 되는지 잘 모르겠어요. (번역이 나왔다고 해서 기쁜 마음에 ~~ :)

로드무비님 표지가 예쁘죠?
저 두 신발의 대조가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Manci님 잘 지내셨지요? 님의 추천으로 읽은 책이잖아요. ^^
덕분에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Namu님, 네 일도 하고 학교도 나가고 그래요. 요즈음에 영 정신이 없었답니다.
근황 페이퍼라... 쓸 수 있을까요? ;)

산사춘 2006-02-17 0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리뷰....... 제가 감히, 어찌 리뷰님을 쓸 수 있겄어요.
여기서 검둥개님 리뷰같은 막강 리뷰 잔뜩 봐서 눈만 높여놓았당께요.

검둥개 2006-02-20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제가 요즘 뻬빠를 못 쓰잖어요.
산사춘님 뻬빠를 보고 눈이 높아져서요 ㅎㅎ ^^
 
영혼의 빛 1 환상문학전집 34
메리 도리아 러셀 지음, 형선호 옮김 / 황금가지 / 199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읽은 사람이면 더 이상 공상과학소설을 단순한 오락물이라고 여길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은 더 이상 소설의 한 하위장르로서 SF가 성취할 수 있는 문학적 가능성에 의심을 품지 않을 것이다. 메리 도리아 러셀의 <영혼의 빛 The Sparrow>, 그리고 그 후속편 <신의 아이들 Children of God>은 외계 행성 라캐트(Rakhat)의 두 종족, 루나와 자나타간의 갈등과 전쟁, 그리고 그 전쟁의 중심에 휘말린 인간들의 대서사시이다.

<영혼의 빛>과 <신의 아이들>의 주인공은 예수회 신부이자 언어학 교수 에밀리오 산도즈. 그의 친구인 천문학자 지미 퀸은 푸에르토리코, 아레시보 천문대에서 2019년 외계 행성으로부터의 전파를 포착한다. 그 전파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음악이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2021년, 예수회는 네 명의 예수회 신부, 에밀리오 산도즈, 마크 로비쇼, D.W. 야브로, 앨런 페이스를 천문학자 지미 퀸, 인공지능 분석가 소피아 멘데즈, 의사인 앤 에드워즈와 그의 남편 토목공학자 조지 에드워즈와 함께 18광년 거리에 위치한 라캐트 행성으로 비밀파견한다.

<영혼의 빛>은 그로부터 약 40년 후인 2059년, 열 손가락의 근육이 모두 절단된 참혹한 상태로 그리고 그보다 더 심각한 정신적 외상을 안고 라캐트 행성의 한 루나족 아동을 살해한 죄목과 함께 홀로 지구로 돌아온 에밀리오 산도즈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는 절망에 빠져 있으며 밤마다 악몽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예수회에서 탈퇴하기를 고집한다. 라케트에서는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후속편인 <신의 아이들>은 간신히 심신의 건강을 회복하고 삶의 평화를 얻기 시작한 산도즈가 다시 한 번, 이번에는 (교황의 승인 하에!) 강제납치되어 라캐트 행성으로 보내지는 것으로 시작된다. 2078년 라케트에 도착한 산도즈는 그 사이 일어난 변화 앞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라케트의 거대한 변화는 38년 전 산도즈 일행의 도착과 함께 시작되었던 것이다. <신의 아이들>이 <영혼의 빛>과 함께 번역-출판되지 않은 것은 그런 의미에서 실로 애석한 일이다. <영혼의 빛>에서 시작된 사건들은 <신의 아이들>에서야 비로소 완결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상상을 넘어서는 모험과 극한의 고난을 거치고, 그로부터 살아 돌아온다는 점에서 에밀리오 산도즈는 수많은 신화 속의 영웅들과 다르지 않다. 이 책이 단순히 한 신부의 종교적 체험 이상으로 확장되어 일반성을 획득하는 것은 바로 이 점에서이다. 생생하게 묘사되는 산도즈 주변인들의 극적인 일생 또한 그에 공헌한다.

왜 인간은 단순히 그 곳에 지능을 갖춘 생명체가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수십 광년 거리에 있는 외계 행성에 가고자 하는가? 그러한 생명체가 우주 안에 존재하는지를 발견하는 것이 왜 우리에게는 그토록 중요한 일인가? 이러한 질문은 불가피하게 인간의 존재 의미라거나, 삶의 가치와 같은 다른 오래된 질문들과 얽히게 된다. 공상과학소설과 종교적 질문의 결합이 기이하게 호소력을 지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전직 인류학 교수인 저자 메리 도리아 러셀은 인류학 외에도 생물학, 유전학, 해부학, 지리학 등의 분야에서의 자신의 지식을 잘 살려 설득력 있으면서도 흥미로운 배경과 호소력 있고 매력적인 인물들을 창조했다. 이 대 서사시의 엔딩은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적이고 아름답다. 독서 후에 여러 번 다시 생각하게 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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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1-05 0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 첫 책을 아주 스케일이며 깊이가 방대한 책을 고르셨군요. 리뷰에 의하면...
멋져버려부립니다.^^

sorkrksmsrlf2 2006-01-05 0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책 소개만 하는디......................
이런 소감문은 어제 쓸지 음............ㅠㅠ

blowup 2006-01-05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주적 감동.

깍두기 2006-01-05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검둥개님! 이게 뭡니까!
품절 SF의 리뷰를 쓰시다니! 그것도 이렇게 훌륭하게!
난 어떡하라고! 흐흐흑........

비로그인 2006-01-05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새해를 여는 멋진 리뷰입니다. 둥개님 새해에는 쵸코렛 조금만 묵고 건강하시길-

검둥개 2006-01-06 0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anci님 그건 정말 오진이라니까요. --.-- 저의 입병과 초코렛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데두 아무도 안 믿잖어유, ㅠ.ㅠ

깍두기님 죄송하여요. ^ .^ 저두 이 책이 품절이고 후속편은 번역도 안 된 걸 보구 얼마나 가슴이 아프던지요, 꺼이꺼이. 언젠가 헌책방에서 우연히 만나실 날이 있으리라구 봅니다!

나무님 ㅎㅎ 이 책이 정말 우주적 감동이어요. 처음에는 조금 읽기 힘든데 점점더 책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된답니다! ^^

sorkrksmsrlf2님 처음 뵈어요. 반갑습니다. :)

로드무비님, 아주 멋져버리는 책이 맞당께요!!! ^^ 읽고 무지하게 뿌듯했어요. ;) 2005년의 마지막 책이었답니다.

sayonara 2006-01-25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많은 걸작SF를 접해봤지만, 감히 '최고'라는 표현이 어울릴만한 SF는 읽어봤던 기억이 없는데... 검둥개님의 추천을 믿고 일단 보관함으로... 근데 품절이... -_-+

검둥개 2006-01-30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요나라님, 읽어보시면 맘에 드실 겁니다. ^ .^
전 사실 SF를 아주 많이 읽어보진 못했지만 이 작품은 무척 맘에 들었어요.
 
셜록 홈즈 전집 3 (양장) - 바스커빌 가문의 개 셜록 홈즈 시리즈 3
아서 코난 도일 지음, 백영미 옮김, 시드니 파젯 그림 / 황금가지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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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해결에는 최첨단 법의학 지식이 총동원되고 읽으면서도 눈을 가리고 싶어지는 흉악한 범죄가 시리즈로 등장하는 현대의 범죄물에 비하면,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는 그야말로 짬뽕 대 우동이랄까 무척 신선하고 담백한 느낌을 준다. 게다가 끔찍하고 무서운 범죄를 다룬 이야기의 제목이 <바스커빌가의 개>라니 미스테리물치고는 의외로 고풍스럽지 않은가.

파이프를 즐겨 피우고 프록코트를 입는 런던시 베이커가 거주민, 19세기 젠틀맨 탐정 홈즈. 시대가 백 년 전이라고 해서, 이 명탐정의 능력이 행여, DNA 분석이며 지문 감식 같은 현대과학이 제공하는 정교한 분석수단이며 훨씬 발전된(?) 강력범죄를 통해 수사역량을 축적된 현대의 범죄수사관 링컨 라임(제프리 디버)이나 법의학자 카이 스카페타(패트리샤 콘웰)에 조금이라도 뒤질 거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범인의 구두굽에서 떨어진 진흙 성분으로 범인이 뉴욕시의 어느 구석에 둥지를 틀고 있는지를 알아낼 정도로 광범위한 지식을 지닌 링컨 라임처럼, 우리의 명탐정 홈스도 고문서의 필체로 문서의 연대를 추정해내고, 협박편지에 오려붙여진 글자의 활자체로 어느 인쇄물이 이용되었는가를 알아내며, 편지의 냄새를 감지하는 예민한 후각으로 작자는 여자이며 어느 종류의 향수를 사용하는지까지 쪽집게처럼 맞추어내기 때문이다.

게다가 홈즈 자신에 말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은 그야말로 탐정이 갖추어야 할 필수 지식에 불과하단다. 탐정에게 진실로 중요한 것은 치밀한 관찰력 이상으로 "고도의 정신적 집중력"을 요하는 빼어난 추리력이라는 것이 그의 말이다. (여기선 이성을 강조하던 당시 시대 분위기도 잘 묻어난다.) 헨리경이 묵고 있던 런던의 호텔에서 그의 새 부츠와 헌 부츠가 교대로 분실되는 것을 보고 진짜 개가 관련된 것을 확신했다며 나중에 사건 경위를 재구성할 때의 홈즈는 정말이지 매력적이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복잡한 문제에서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 들 때 나는 종종 미스테리물을 읽는다. 흥미진진한 탐정물은 정신을 늘 가상의 세계에 푹 빠지게 해서 예기치 않은 휴식효과를 주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현대의 미스테리물은, 물론 살벌한 현대 분위기를 반영하다 보니 그렇게 되는 것이겠지만, 너무 잔인한 범죄가 등장해서 이런 소중한 휴식효과를 가끔 반감시킨다. (사건이 너무 끔찍해서 오히려 스트레스가 쌓인다면 곤란하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셜록 홈즈의 이야기는 박카스처럼 딱 적절하게 무시무시한 스릴 만점의 강장제라 할 수 있다. 명작이란 시간 속에서 더 빛이 나는 법이라는 말은 우리의 탐정 홈즈를 창조한 코난도일에게 딱 적합한 찬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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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18 09: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owup 2005-12-18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카스처럼 적절한 스릴 만점의 강장제라니... 뭔가 기운을 북돋우기 위해서라도, 연말엔 고전 추리물의 세계에 빠져 볼까요?

깍두기 2005-12-18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둥개님, 상당히 오랜만인 것 같아요? 반갑구려!

검둥개 2005-12-18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그래요? 전 그게 제일 좋았는데 ^^* 2046 리뷰 썼어요. ㅎㅎ 아비정전이랑 같이 봤는데 스크린으로 보니까 참 좋더라구요. 지금은 새벽이라 자러 가는데 나중에 극장 내부에 대해서 써올리겠습니다. ;)

나무님 그러시죠! ^______^

깍두기님 저두 반가워요! ^^ 제가 좀 오랜만에 빼꼼, 하네요. ㅎㅎ
 
지상의 양식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34
앙드레 지드 지음, 김붕구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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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이나 <전원교향곡>에서는 고리타분한 도덕주의자처럼만 보였던 지드도 청춘은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않는 것, 오직 회고되기만 하는 것이라고 애도할 줄 알았다. 유달리 감수성이 풍부한 작가들이란 누구나 질풍노도의 청춘기를 보내기 마련. 막 결혼을 하고 정착자의 삶을 택한 지드에게 대문 밖의 세상은 그래서 더욱더 그로서는 이제 영영 상실한 산해진미의 만찬상처럼 보였을 터다.

그 자신이 "도망과 해방의 안내서"라고 부른 이 책, <지상의 양식>에서 지드는 행복이란 우리가 살아 있는 매 순간 우리의 감각에 이 지상에 존재하는 수만가지 사물들이 선사하는 환희와 기쁨에 있다고 선언한다. 목마를 때 물 마시는 것, 배고플 때 씹어넘기는 한 조각의 빵, 더운 여름날 살짝 열린 창틈 새로 들어와 내린 눈꺼풀을 식히는 서늘한 공기의 흐름, 목장의 수풀 위로 번지는 습기. 이런 단순하고 일상적인 경험들이 이 책 속에서는 대략 백배쯤 증폭되어 우리의 가슴을 흔들어놓는다.

매순간을 천국처럼 누리며 살 수 있으려면 돈이 많아야 하는 것도 지식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 대신 사람은 헐벗고 굶주린 자, 아무 것에도 매이지 않고 집착하거나 기대를 품지 않는 자, 영원히 도정에 있는 자로 살아야 한다. "시인의 재능이란, 자두처럼 하찮은 것에라도 감동할 줄 아는 것"이라고 지드는 말한다. 자두란 여름철 시장 좌판에서 그야말로 산처럼 쌓여 팔리는 싸구려 과일. 그런 시시한 자두에서도 인생의 열락을 맛보는 자는 흔한 과일의 맛조차도 기적인 양 열렬히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다.

<지상의 양식>은 젊음을 잃은 자가 노래한 젊음의 책이다. 향기롭고 산뜻한 오렌지 즙처럼 뿜어져 나오는 지드의 문장은 막 청춘의 기슭에 도달하는 이들을 도취시킨다. 반면 일방통행로만으로 이루어진 젊음의 다리를 이미 건너온 사람들, "행복이란 무엇인가",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삶의 가치는 무엇인가", 같은 거대한 질문들과 더이상 드잡이질하지 않는 이들은 이 책을 읽으며 잠시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리라.

책 말미의 아름다운 시는 독자로 하여금 왠지, 열광적 청춘예찬으로 정주 뒤의 허무함을 잊고자 했을 지드 자신조차도 아주 잠깐이나마 지나버린 청춘을 애도하고픈 통속적 충동에 사로잡히지 않았을까 궁금해지게 한다. 


알제리

언덕들이 와서 쉬고 있는 고원 지대.
날마다 낮이 숨죽어 가는 석양.
배들이 밀려드는 바닷가.
우리들의 사랑이 잠자러 오는 밤......
밤은 넓은 항만처럼 우리들에게로 오리라.
낮의 지친 상념도
광선도, 우울한 새들도,
거기에 와서 쉬리라
모든 그늘들 고요해지는 총림 속......
목장의 잔잔한 물, 풀 우거진 샘.

...... 그리고 기나긴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
잔잔한 해변---항내의 배들.
우리들은 보리라, 가라앉은 물결 위에
방랑하던 닻을 내린 매인 배가
잠들어 있는 것을
우리들에게 온 밤이
정적과 우정의 넓은 항만을 펼쳐 놓는 것을.
바야흐로 모든 것이 잠드는 시각이다.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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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05 1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paviana 2005-12-05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다 읽으셨나요? 멋진 리뷰 정말 좋네요.역시 이책은 주인을 제대로 찾아간 것이에요.^^

검둥개 2005-12-05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속삭님 책을 다 읽은 저도 역시 그 구절만 기억에 새록새록. 전혜린의 수필집에 나와서 유명해진 구절이 아닙니까? ^ .^

다 파비아나님 덕분이죠! ^_______^* 읽고나니까 전혜린이 열광했던 것이 실로 잘 이해가 되더군요. 문장이 무척 아름다워서 읽는 동안 내내 시를 읽는 듯 했어요. 그건 그렇고 제가 파비아나님 서재에 속닥글을 남겼으니 제게 꼭 그 정보를 알려주세요!!! ^^

플레져 2005-12-05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열광할래요. 전원교향악, 좁은문에 열광했던 사춘기를 잊고 있었는데...
사실, 그 당시엔 눈먼 장님 소녀가, 사촌 누이를 사랑하는 소년에게만 관심이 있었죠.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시선의 줄기는 이해하지 못한 채 말이죠...
올겨울에 지드군(?)도 섭렵하고 싶어요. 멋진 리뷰!

로드무비 2005-12-05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물음과 더이상 드잡이질하지 않는 사람 자수!^^

hanicare 2005-12-06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과 까뮈의 '결혼, 여름' and 김화영의 '행복의 충격'을 한 묶음으로 하면 청춘 3부작이 완성될 것 같습니다.
청춘이고 행복이고 지중해고 뭐고 다 김광규씨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에서 써먹었듯 외국어처럼 늘 낯설었지만요.(도무지 애도할만한 청춘같은 거나 있었다면 덜 억울할 듯. 티보가의 사람들 일부인 회색노트가 딱 제 청춘인지 뭔지의 주제색깔이겠습니다.)
# 참,리뷰는 지드도 저리가라고 밀쳐놓고 싶을 정도입니다.
(괜히 지중해의 총천연색 풍광과 없었던 청춘을 대조하니 억울(?)하고 심통이 나서...)

검둥개 2005-12-06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하하 플레져님, 저두요. ^^ 그 소년의 외모에 지극한 관심을 가졌었다는...
올 겨울에 꼭 지드군도 섭렵하시기를!

로드무비님이 바로 그런 분이시란 말씀일까요? *^^*
저는 생각 없는 사람이 되는 게 꿈이에요. 바쁘게 살면 꿈도 덩달아 실현돼요 ㅎㅎㅎ

hanicare님 그럴 리가 없겠지만 기분은 좋아서 입이 찢어지는데요. ^______^ 칭찬해주시고 책도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두 권은 읽어보지 않았는데 꼭 찾아보도록 할께요. (전 카뮈는 행복한 죽음을 인상깊게 읽었어요.) 티보가의 사람들도 전 안 읽어봤어요. 그 책이 언급된 전혜린의 수필집만 대충 읽구요. ^^;;; ㅎㅎㅎ
 
법의관 1 - 법의관 케이 스카페타 시리즈 15
퍼트리샤 콘웰 지음, 유소영 옮김 / 노블하우스 / 2004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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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그 시점이었다. 스릴러는 액션이 기본이므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액션을 흥미진진하게 묘사하는 데 효과적인 3인칭 시점이 사실 안성맞춤이다. 하지만 콘웰은 화자의 내면을 드러내는 데 더 적합한 일인칭 시점을 선택했다. 책 속의 주인공, 카이 스카페타가 어떤 인물인가를 알게 되면, 작가가 선택한 시점이 얼마나 적합했는가를 이해하게 된다.

스카페타는 범죄 희생자들을 부검하는 검시소 대표를 맡고 있는 여의사이다. 피비린내가 나는 시체보관 냉동고가 등장하는 배경, 강간과 고문, 살해 같은 중범죄를 다루는 경찰서 환경은 전통적으로 남성의 영역이다. 이런 종류의 영역에서 생존하고 성공하기 위해 전문직업을 지닌 여성이 풀어야 하는 숙제, 치루어야 하는 희생은 그 성질과 분량이 잔인하며 어마어마해서, 그에 비하면 연쇄살인범을 추적해내야 하는 과제가 오히려 김 빠지게 느껴질 정도이다.

냉정하고 지적인 분위기는 <엑스 파일>의 여의사/FBI 수사요원 스컬리와 비슷하지만, <다이 하드>의 브루스 윌리스는 저리 가라 할 만한 심적 피로감을 떠안고 일하는 어두운 주인공 스카페타 덕분에 콘웰의 이 소설은 여타의 스릴러들과 뚜렷이 구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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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5-11-27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일 아쉬웠던 점은 어떤 형태로든 유머가 없었다는 것. 페이소스라고 해야 하나. 암튼 좀 심심했어요. 제겐.

검둥개 2005-11-27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그랬는지 읽는 동안 내내 무척 어둡고 피곤했어요. ^^ 상상 속의 장면 조명도 언제나 어둑신인 것 같고 ㅎㅎㅎ 유머가 들어가는 스릴러 있으면 추천해주세요. ;)

sayonara 2005-12-05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CSI소설과 에드거 상 수상작들같은 간결, 단편들에 너무 익숙해져서 이런 작품에 선뜻 손이 안가네요. 오래 전부터 계속 읽는다, 읽는다 생각만 하고 있는데.. ㅎㅎ
유머라면, '요리장이 너무 많다'같은 스타일을 좋아하시려나... 전 시트콤같은 대사들이 좋았는데... ㅎㅎㅎ

검둥개 2005-12-05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은 꽤 긴데 사건 전개와 해결 자체는 그렇게 극적이진 않아요. ^^ 이렇게 말하면 말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뭐랄까 느와르 분위기랄까 그런 게 느껴졌어요.
그 책 한 번 찾아볼께요. ^^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