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만에 나에게도 나만의 시간이 생겼습니다. 남편 휴가라 24시간 붙어있으니 서재질을 할 여유가 없잖아요 ^^ 미친듯이 알라딘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고보니 10월이 다 가는데 페이퍼가 없네요.

사람 일은 한치앞을 못 내다보고, 남이 하는 게 스캔들이더라도 내가 하면 정말 로맨스구나 싶은 생각을 했던 게 제 결혼이야기입니다.

대학다닐 때, 17인치 모니터 제 얼굴과, 77사이즈의 건장한 체격과, 저녁에 기숙사 들어가려면 수위아저씨가 잡았던 짧은 스포츠머리의 제가... 애인이 있었겠습니까? 없었죠.

연애 한 번 제대로 못했습니다. 1학년 때 잠시 눈에 뭐가 씌웠던 육사 관계자 한 명이 씩씩한 저랑 연애를 걸어보려고 했으나, 19살 꽃띠였던 저는 과감히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나의 애정전선은 항상 빨간불이었죠. STOP!

졸업하고, 회사 다니고, 몇번 선도 보고... 아버지 정년퇴임날짜는 다가오고, 그 전에 나를 치우려고 혈안(죄송합니다)이 되신 부모님과 몇 번 다투고, 몇번은 선도 거부하고...  내가 치워야 할 물건이냐고, 퇴임식 전에는 결혼 안 한다고... 이성이 마비된다고...ㅋㅋ 대들었다 쫓겨날 지경에 이르기도 하고...

그러다 드디어 아버지가 포기하셨죠. 퇴임 전의 결혼은 불가능하게 되었거든요. 8월 말이 퇴임식인데, 드디어 8월이 되어버렸으니까... ^^

8월 첫 주말에 선을 봤습니다. (정확하진 않지만 여섯번째나 일곱번째쯤 되었을 겁니다). 이모부가 전부터 말해놨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나갔습니다. 무지 더운 날이었는데, 정말 두통이 장난 아니었습니다. 소개팅이었으면 아프다고 못 나갔을 건데, 이모부 소개라서 안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또 두시간 후에 약속도 있었구요. (그떄 만나기로 해던 친구... 바람맞았습니다)

그 사람... 대타였습니다. 원래 이모부가 자주 가던 식당아줌마의 아들을 만나기로(서울의 유명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레지던트래나 뭐래나) 했었는데, 알고봤더니 그 아들은 그 병원의 간호사와 사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엄마가 인정하지 않고 선을 보이는 것이였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이모부, 그럼 안 본다고... 화를 내니까 이 아줌마가 미안해서 자기네 올케의 5촌조카를 데리고 나온 것입니다 ^^  급조된 만남이었죠.

마침 그 사람이 당시에 일하던 곳이 제 회사 바로 옆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담날부터 날마다 점심 먹고 저녁 먹고, 하루에 두번씩 만났죠. 말주변 참 없더군요. 정말 만나서 하늘에 별만 헤아리다 들어왔답니다. 믿거나 말거나...

갔다 오면 울 언니 전화해서 물어보고, 출근하면 회사 선배들 막 물어보고... 그러잖아요. 무슨 얘기 했냐고, 뭐했냐고... 정말 할말 없었어요. 저게 북두칠성이에요, 저게 북극성이에요... 밖에 안했으니까...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미장원에 가서 드라이를 하고(그 짧은 머리를), 화장을 하고, 안경 대신 렌즈를 끼고... 회사에선 난리가 났습니다 ^^

그렇게 자주 만나고 있으니(그 남자도 선을 백번 쯤 본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쪽 아버님과 울 친정아버지가 만나시기로 하셨다는 겁니다. 헉... 우리가 만난지 2주 되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양쪽 부모님 다 나오셔서 정식으로 뵜는데... 두 아버님이 너무나 말이 잘 통하는 겁니다.(울 시아버지 평생 시골에서 농사만 지으신 분이고, 울 친정아버지는 평생 학교에 계셨던 분입니다. 도무지 공통분모가 없을 것 같은데...)

불안한 마음을 뒤로 하고, 우리 둘만 먼저 나왔는데, 저녁에 집에 가니 그러대요. 2주 후에 결혼시키기로 했다고... 두 분이서 날 잡았다고...

울 친정아버지 그러시대요. 그런 시아버지 없다, 놓치면 평생 후회할 거다... 나중에 알고보니 시아버님 그러셨다네요, 그렇게 훌륭하신 분이 없다, 너 그런 장인어른 갖기 힘들 거다... 두분이 서로 짜셨남?

갑자기 너무 불안해졌습니다 ^^ 내가 이 사람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는데?

울 엄마도 불안해졌습니다. 울 엄마 아버지도 연애결혼하셨고, 울 언니 오빠 다 연애결혼했거든요. 정말 양쪽집 숟가락 갯수까지 다 안 후에 결혼했는데... 저는 이 사람의 가족관계(그것도 딱 식구만), 출신학교, 직업... 이것밖에 모르잖아요. 게다가, 그 사람 앞의 나는 내 본모습이 아니었거든요. 얌전한 척하고 내숭떨고... 우욱~ 본의는 아니었지만 그렇게 되더라구요... 닭살...ㅜㅜ

울 엄마가 딱 세 가지 하셨습니다. 우선... 호적등본을 떼보셨어요. 그러고는 말씀하셨죠. 총각이더라.

고등학교 생활기록부 떼보셨어요. 그러고는 말씀하셨죠. 성실하단다.

마지막으로... 사주보러 가셨어요. 얼마나 그 걸음이 어색하고 쭈삣거리셨을까 싶어요. 그러고는 말씀하셨죠. 둘이 궁합 좋다더라.

그래서요? 부랴부랴 예식장 어디서 구합니까. 그냥 제가 다니던 회사 강당에서 했습니다. 결혼식 사진이요? 회사 사외보를 만들던 사진기자가 찍어줬습니다. 결혼식전의 마사지? 받을 틈이 어딨습니까? 아, 신혼여행이요? 그때 갑자기 어떻게 예약합니까? 그냥 차 몰고 차 바퀴 구르는 데로 다녀왔습니다. 충무로 해서 부산으로 해서 경주로 해서... 그렇게 갔던 것 같네요.

우쨌든 아버지 퇴임식 전에 해치우는 데는 실패하셨습니다. 퇴임식이 있던 그 주 주말에 결혼했거든요.

요 며칠, 오랜만에 아이들 없이 둘이만 손잡고 산에도 가고, 영화도 보고 하면서 휴가를 즐기다 보니, 옛날 생각이 났습니다.

만난지 한달만에 선봐서 결혼했어요, 이러믄 무지하게 욕하잖아요? 조건만 보고 결혼한 것들, 애정이 있겠어? 이러믄서요... 지금도 우리 동서 그렇게 말해요. 형님은 8년 연애하고 결혼한 우리랑은 다르잖아요...

그런데 제가 해보니... 로맨스더라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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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10-20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 동서 참 말도 얄밉게 하누만요.
아버지 정년퇴임에 쫓겨 부랴부랴 만났는데 그가 바로 호랑녀님의 인연이었군요.
그렇다니까요.
인생이 얼마나 심오한지...^^

호랑녀 2005-10-20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뭐 그렇게 나쁜 의도는 아니었어요. 우리 동서, 여기 알라딘에 들어오거든요 ㅋㅋ
그냥 그래서 권태기가 빨리 오더라 그런 얘기였던 거 같어요. ^^

세실 2005-10-20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호~ 8년 연애해서 결혼하나 한달 만나서 결혼하나 달라지는건 없지요~~ 어차피 인연이라면~
공무원이다보니 정년을 남겨둔 윗분들의 급한 자제 혼사가 떠오르면서 호랑녀님의 아버님과 오버랩됩니다. 심지어 1년에 2번의 혼사가 있는 분도 계시더라구요~~

로드무비 2005-10-20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그런 얘기였군요.
전 8년 연애 뽐내는 건 줄 알고. 호호호^^

merryticket 2005-10-20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이 로맨스라는데, 누가 뭐래요?,
한 편의 로맨스 소설감이구만요, 뭘~~

chika 2005-10-20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이런게 운명적 만남, 이란건가요? ^^

반딧불,, 2005-10-20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맨스 맞구만요^^
제 친한 친구가 그렇게 해서 결혼 날짜 잡은 다른 친구보담 일찍 갔지요.
지금요?? 제일 잘삽니다.
(근데 호적등본이랑 생활기록부 어찌 떼셨답니까?^^;;)

호랑녀 2005-10-20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세실님... 그게 당하는 자식 입장에선 대략 난감입니다. 애인 있으면 모를까...
로드무비님... ^^ 그냥 저 혼자 괜히 박히는 말일지도 몰라요. 뭔가 콤플렉스가 있긴 해요.
올리브님, 그러게요. 11년 넘게 별 문제 없이 살고 있어요. 싸울 땐 싸우기도 하고, 좋을 땐 좋기도 하고...
따우님... 고마버... 난 홍합국수도 못하는데 먹고 싶은 거 알아서 해먹는 남편이 고맙지요, 뭐...
치카님... 처음 만난 날은요 머리 아프고 그랬어요. 만나자마자 첫눈에 뿅~ 이런 거 없었어요. 로드무비님이 어디에 쓰셨던 친구분 얘기처럼 꿈에 누가 나타난 것도 아니고... 아마 오래 사겼음 헤어졌을지도 몰라요. 남편이나 나나 그때까지 자존심 하나로 먹고살던 사람들이어서 싸우면 절대로 먼저 사과 안했을 거에요. 그런데 참 신기한 게, 결혼하니까 변하더라니깐요...^^

호랑녀 2005-10-20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그 사이에 반딧불님 다녀가셨네 ^^
떼러 가서, 이 남자랑 결혼하려고 하니 좀 떼봐야겠다 이랬더니 떼주더라는데요? 주소만 알고 가셨다나 어쨌다나...^^
저도 그랬어요. 연애 길게 하던 친구들 다 제치고 제가 먼저 갔죠. 학교다닐 때 연애 끊어지지 않던 친구... 서른 넘어서 다른 남자랑 결혼했어요 ^^

진주 2005-10-20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필이신 거예요!
오홍..다들 이러고 저러고한 사연들이....
묘하도다, 인연이여.^^;;

조선인 2005-10-20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호랑녀님, 너무 재미나요. >.<

숨은아이 2005-10-20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하하, 총각이더라 성실하단다 궁합 좋다더라! 어머님 존경합니다. <(__)> 로드무비님 말씀대로 인생이 얼마나 심오한지...

이누아 2005-10-20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의 심오한 인생에 한표!

panda78 2005-10-20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진짜 진짜-
저게 북두칠성이에요, 저게 북극성이에요 <- 이것도 너무 로맨틱해요- 멋지다-
어머님도 아버님도 멋지십니다. ^^

호랑녀 2005-10-20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팬더님... 로맨틱이라기보다는 내숭이었쥬. 77사이즈의 여성이 그러는 게 어울린다고 생각하십니까? 제 친구들이 뒤로 넘어갑니다. 제가 그랬다고 하면...
새벽별님... 그래두 제 친구 중에 나랑 굉장히 친하다고 생각했던 한 친구가 그랬죠. 뭐, 호랑녀는 누구하고라도 잘 맞추고 살았을 거에요. 헉... 그리고 많이들 색안경쓰고 봤어요. 첨엔 많이 서운했는데, 나중엔 뭐 그러던가 말던가 생각했죠.
이누아님, 정말로 심오한 인생이에요. 팔자소관이거나...^^
숨은아이님, 울 엄마도 얼마나 답답하셨겠어요. 제가 엄마가 되어보니 이해가 갑니다. 그래도 뭔가 행동으로 보여주셨죠. 어느 한 군데서라도 부정적인 얘기가 나왔으면 안 된다고 하셨을 거에요.
조선인님... 이제 보니 나도 재밌지만, 정말 그때는 무슨 프로젝트 하나 헤치우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결혼식 프로젝트라고 해야 하나 뭐라고 해야 하나...
진주님... 그러게요. 미리 신께서 정해두셨던 모양이죠. 그래서 딴맘 안먹고 살아요 ^^

검둥개 2005-10-20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진짜 인연이셨군요. @.@ 너무너무 재미있습니다. 헤헤헤 안녕하세요 ^___^*

호랑녀 2005-10-20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검둥개님 ^^
인연이라고밖에... 그래서 열심히 함 살아볼라고요.

2005-10-20 21: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kleinsusun 2005-10-21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정말 흥미진진하게 읽었어요.^^
그렇게 인연이 몰아치는군요.음....희망이 몰려오네요.ㅎㅎ
항상 행복한 로맨스 쭈~욱 계속하시길...

호랑녀 2005-10-21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여주신 님... 조치 취했습니다.
헉, 수선님... 제가 어제 몰래 놀러갔다 왔는데... 어찌 아시고 오셨을까나...
혹시 제가 희망을 드렸나요? ^^

파란여우 2005-10-21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운명...님의 천생연분 이야기가 제 가슴을 따시하게 해 줍니다^^
근데 왜 옆구리는 춥냐..쿨럭~

이리스 2005-10-23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인사드려요~ ^^
글 재미있게 잘 읽고 갑니다. 종종 들를게요~

이매지 2005-10-24 0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
저희 엄마 아빠도 선보고 3번 보고 결혼하셨데요 -
좋아서가 아니고 등떠밀려서 ㅋ

호랑녀 2005-10-24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파란여우님, 눈에 콩깍지가 씌워야 합니다요.
낡은구두님... 제 서재가 워낙 부실해서 도통 글이 올라오질 않습니다.
이매지님... 전 안 한다고 말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어요. 그런데 입에서 그 말이 안 나오더라구요. ^^

sooninara 2005-10-26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이 완존히 드라마 웨딩입니다^^
제가 장나라와 류시원을 안좋아하는데..어쩌다 이드라마에 필 꽂혀서 열심히 봤거든요. 그런데 어찌 이렇게 재미난 결혼 이야기를 가지신겁니까?
결혼후에 하는 연애..더 잼날거 같은데요..

호랑녀 2005-10-27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웨딩이 그런 얘기여요?
글쎄... 이게 제 정신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얘기죠.

책읽는나무 2005-10-27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제큰남동생이 얼마전에 선인가? 소개팅인가? 뭐 그런 것을 봤는데 말입니다.
주인공인 남,녀는 그냥 저냥 만나서 커피 마시고 집에 오고, 지난주에 밥을 같이 먹었다는데 양가 부모님들이 궁합까지 다보고 당사자들 얼굴 보기전부터 날을 잡을까? 하면서 그러더니(실은 부모님들이 예전부터 아시던 모양이었나봅니다..ㅡ.ㅡ;;)
특히 아가씨네 부모님이 동지 지나면 바로 식을 올리자고 한다네요....ㅡ.ㅡ;;
동지면 아직 기한이 조금 있긴 하지만....이거 너무 급하게 서두르는 것 아닌가?
7년 연애해서 결혼한 저로선 조금 의아한 대목입니다..ㅎㅎㅎ

하지만 살다보니 정말 결혼하고 연애하는 것도 괜찮을 것같아요!
7년,8년 연애를 하면 뭐합니까! 결혼하여 알콩달콩 살아야 할 중요한 시기에는 벌써 권태기가 다가오는데 말입니다..ㅎㅎㅎ
동생네가 맺어진다면 호랑녀님네처럼 알콩달콩 행복하게 잘 살았음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