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 과학으로 찍는다 (공개기사)
 
과학이 밝혀낸 얼짱의 법칙
박근태 기자
2005년 6월 1일 kunta@donga.com
지난해 국내 전체 디지털카메라 판매량은 138만대. 처음 관심을 끌기 시작한 2002년 판매량 45만대의 3배에 달하는 성장세다. 올해 예상 판매량만도 180만대, 2007년이면 가구당 보급률 80%에 이르는 기록을 세운다. 여기에 디지털카메라 못지 않은 성능을 자랑하는 카메라폰을 합치면 바야흐로 ‘1인1디카’시대라 해도 그리 무리는 아니다. 과학이 풀어주는 ‘디카 잘 찍는 법’을 소개한다.
‘얼짱’ 각도에도 이유 있다

45도로 기울인 렌즈, 지긋이 치켜 뜬 눈, 비스듬히 기울인 얼굴…. 요즘 유행하는 ‘얼짱’ 촬영법이다. 얼굴이 넙적한 사람도, 뚱뚱한 사람도 누구나 ‘킹카’가 된다. 그래픽 프로그램을 사용해 뿌옇게 처리하면 그야말로 금상첨화.

얼굴 15도 위에서 비스듬히 찍으면 정면보다 예쁘게 나온다. 눈이 크고 얼굴이 가름하게 나오기 때문이다. 손으로 턱을 받치거나 뺨을 살짝 감싸는 포즈도 얼짱 효과를 낼 수 있다. 그렇다면 ‘광각’과 ‘로우앵글’로 대변되는 얼짱 각도로 찍으면 왜 얼굴이 예뻐 보이는 것일까. 연세대 인지과학연구소 신수진 박사는 ‘광각’효과 때문이라고 말한다. 대다수 보급형 디지털 카메라와 휴대전화카메라는 화각이 넓은 ‘광각’ 렌즈가 들어있다. 화각이 넓다는 것은 한번에 담을 수 있는 화면폭이 넓다는 뜻. 광학적으로 화각이 넓으면 화면 안에 보이는 대상의 크기와 거리감이 증폭된다. 즉 렌즈에 가까운 것은 아주 크게, 떨어져 있는 것은 아주 작게 보이게 된다. 하지만 눈에 중심을 맞추면 눈의 크기는 아주 커지고 좀 떨어진 볼과 턱선은 가늘어 보이게 된다.

또한 보급형 카메라는 화소수가 작아 얼굴 잡티는 잘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따뜻한 느낌의 사진은 아침저녁에

빛은 고유한 색채를 띤다. 빛의 색깔을 숫자로 표현한 것이 색온도다. 온도가 높을수록 푸른색, 낮을수록 붉은색 계열의 색조가 많이 포함된다. 따뜻한 느낌의 인물 사진을 찍으려면 늦은 햇빛이 잦아드는 오후를 택해라.
색감을 좋게 하려면 먼저 고려해야 하는 것이 빛. 빛은 고유한 색채를 띤다. 이를 수치화한 것이 절대온도로 표시되는 색온도다. 온도가 높을수록 푸른색, 낮을수록 붉은색을 띤다. 마치 별의 온도에 따라 색깔이 다르게 보이는 이유와 같은 이치다.

햇빛이 약한 아침이나 저녁 사진이 붉은색을 띠는 것은 색온도가 3000~4000K로 한낮보다 낮기 때문이다. 비교적 낮은 에너지가 나오는 백열전구 아래서 찍은 사진도 따뜻한 느낌을 준다. 색감은 곧바로 정서에 영향을 미친다. 강렬함과 고요함, 답답함의 정서적 반응에 영향을 미치는 것도 채도와 대비가 불러일으키는 색감이다.

사진의 색감에 대한 반응은 그림을 볼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유사한 색이 많을 경우 전체적인 톤을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보색이 섞여있는 경우 역동성을 강조할 수 있다. 신 박사는 “특히 노란색과 빨간색 같은 장파장 색상은 사진에 악센트를 주는 심리효과를 불러 일으킨다”고 설명한다. 또한 원색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진은 경쾌한 느낌을 준다. 어린이를 찍을 때 발랄한 느낌을 살리려면 원색을 많이 포함시키는 게 좋다. 셔터를 누르기 전에 배경을 잘 살피자.

흑백사진, 뭔가 있어 보이는 이유

색을 없앴을 때 생기는 감성변화는 컬러 사진과 영상이 판치는 지금까지도 왜 흑백 사진을 찍는지 뒷받침해준다. 낮선 기분을 느끼고 싶다면 '그레이 스케일'로 놓고 찍어보자.
왜 흑백 사진은 ‘뭔가 있어’ 보일까. 지난 2004년 연세대 인지과학연구소 연구팀은 20대 남녀 88명에게 컬러사진과 흑백사진 180장을 번갈아 보여주고 감성반응을 측정했다. 실험 결과 컬러사진을 흑백으로 바꿨을 때 감성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친근한 이미지보다 차고 낯선 효과를 주는 것이다. 특히 상이 어둡고 명암이 사실적일수록 중후한 느낌을 주는 것으로 판명됐다.

신 박사는 “색을 없앴을 때 생기는 이 같은 감성변화는 컬러 사진과 영상이 판치는 지금까지도 왜 흑백 사진을 찍는지 뒷받침해준다”고 말한다. 2000년 미국 디텐버 박사 연구팀 역시 일반인에게 컬러동영상과 흑백동영상을 연달아 보여주고 컬러가 흑백에 비해 유쾌하고 각성 효과를 발휘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피사체에 가까이

눈으로 볼 수 있는 영역, 즉 화각은 매우 넓다. 특히 움직이는 물체를 보면 180도까지 넓어진다. 거의 전방위라고 할 수준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상은 눈동자가 끊임없이 움직이며 수집한 상을 합성한 것이다. 주의를 집중하면 대상물 주위로 시선이 집중되면서 사각도 줄어든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뭔가 특별한 것을 찍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촬영한 영상이 황량하게 느껴지는 현상은 바로 눈과 카메라의 차이를 말해준다. 우리가 집중한 대상이 눈에는 크게 들어오지만 카메라 렌즈는 그렇지 않다. 어떤 부분을 집중해 찍으려면 대상에 접근해 카메라의 화각을 그만큼 줄여줘야 한다.

빛으로 입체감 살려

카메라를 아래서 위로, 몸을 45도 틀어 찍으면 역동성을 훨씬 더 강조할 수 있다.
사진은 공간을 평면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단조로워 보이기 쉽다. 이럴 땐 집안이나 주변 빛을 조명으로 사용하면 입체감을 줄 수 있다. 사진에서 느껴지는 원근감(거리감)은 입체감을 극대화한다. 어떻게 하면 거리감을 줄 수 있을까.

연세대 인지과학연구실 연구팀은 조명과 깊이감의 상관 관계를 조사했다. 연구팀은 우선 두 개의 마네킹을 세워놓고 각각의 마네킹 앞 45도 위치에 조명을 세웠다. 그리고 조명을 번갈아 켜고 촬영한 사진을 피실험자들에게 보여주고 자극 반응을 지켜봤다. 그 결과 사진에서 느껴지는 깊이감은 배경의 밝기가 앞과 뒤 마네킹 모두 같은 경우에 가장 적은 반면, 앞쪽 마네킹이 가장 밝고 뒷쪽 마네킹과 배경이 어두울수록 크게 느껴지는 것으로 조사됐다. 앞부분이 밝고 뒤가 어두워야 입체감이 크다는 것.

연구팀은 또한 정면광과 측면광, 45도로 기울어진 조명 가운데 45도 경사광이 깊이감을 가장 높이는 것으로 밝혀냈다. 실제 사진전문가들 사이에도 45도 경사광은 얼굴 입체감을 가장 살리는 조명으로 알려져 있다. 초점거리를 짧게 하거나 피사체에 가까이 가서 찍어도 깊이감은 더 커진다. 구도를 이용해 입체감을 살리는 것도 묘미. 단체 사진일 경우도 측면으로 찍는 게 좋다. 45도 각도로 살짝 틀어 찍으면 입체감이 산다. 정면으로 촬영할 경우 근경과 원경 구분이 없어 평면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반면 측면 사진에서는 원경이 생기지만 변화감을 줄 수 있다.

대각선 구도는 안정감은 없지만 원근감과 동감, 미감이 동시에 느껴진다. 사람의 눈은 어두운 곳보다 밝은 곳, 흐린색보다 선명한 색, 원보다는 경계가 뚜렷한 각, 초점이 맞는 쪽으로 시선이 간다. 주제를 노골적으로 강조하고 싶다면 뷰파인더의 50% 이상 차지하게 찍어라.

사진 속 심리를 풀다

채도 색상이 안정
세상에 똑같은 사람 하나 없듯 사진을 보는 사람 마음도 ‘100인 100색’. 사진의 느낌을 좌우하는 형태, 깊이, 움직임이 감정에 미치는 영향은 과연 어떤 것일까. 연세대와 충북대 연구팀이 197명에게 시각적인 구성요소가 뚜렷이 차이 나는 사진 180장을 보여주고 감성 반응을 측정했다.

감성 반응 조사 결과 1장당 평균 60개의 형용사 어휘가 추출됐으며 이를 다시 분류해 모두 16가지 감성으로 요약했다. 촬영기법에 따라 나타나는 감성을 분석한 결과 피사체 윤곽선의 선명함과 셔터속도, 피사체 위치는 서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드러났다. 색의 채도와 대비 사이에도 연관성이 큰 것으로 분석됐다.

특히 ‘고요함’ ‘강렬함’ ‘시원함’ ‘역동적임’ ‘외로움’ ‘흥겨움’의 6가지 감성은 사진 기법에 따라 크게 좌우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강렬함을 주는 사진의 경우 피사체가 중앙에 있었고, 고요한 느낌의 사진에서는 피사체 크기가 매우 작았다.

역동적인 느낌을 주려면 셔터속도를 빠르게 하고 여러 개 대상을 올려보며 찍으면 된다. 특히 흥겨움을 유발한 사진은 카메라를 아래 방향으로 해서 찍은 경우가 많았다.

화각 | 렌즈를 통해 보이는 각과 시야, 넓이를 말한다. 초점거리에 따라 달라지며 거리가 짧을수록 화각은 넓어진다. 카메라와 비교했을 때 눈의 초점거리는 50mm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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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마녀사냥을 중단하라

우리는 진정 자유주의 국가에 살고 있는가… 국적포기자들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생각해보자…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최근의 ‘국적 포기 사태’를 지켜보며 필자는 마음속에서 만감이 교차했다. 한편으로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들을 재빨리 미국인으로 만들려는 사회귀족들의 행각을 보면서 한심해하는 사람들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빈민개병제’의 울타리를 벗어날 생각조차 못해 그 무지막지한 부담을 다 전담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학력과 재력을 이용해 그 울타리 밖의 인생을 즐기는 자에게 ‘계급적 증오심을 느낄 법도 하다. 게다가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높은 나라에의 입적(入籍)’ 열풍은 아무래도 ‘내지인 행세’를 하려고 안달이었던 식민지 엘리트의 추태를 생각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미국이 각처에서 벌이는 대량 살인들과, 잘못하면 한반도에서까지 벌일지도 모를 침략까지 생각한다면 ‘귀한 자녀 미국인 만들어주기’를 밀어붙이는 사람들을 향한 시선이 고울 수가 없다.


△ 국적법 개정안 발의에 중요한 역할을 한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 그는 국적 포기 신청자가 급증하자 국적 포기자 부모의 신상정보를 공개하겠다고 나섰다. (사진/ 한겨레 이종찬 기자)

‘악질 반동’ 인민재판의 그림자

미국 여권을 현대판 귀족 족보나 홍패(紅牌)로 삼는 자들의 행각이 문제로 보여도, 또 한편으로는 필자는 이 사태에 대한 몇명의 국회의원들과 언론, 일부 시민들의 반응에서 지나침을 느끼기도 했다. 동포로서의 권리를 박탈해 ‘완전한 외국인’으로 만들고 부모 명단까지 발표한다? 도덕적 문제가 있다 해도 현행법상 죄가 없는 부모들의 명단을 공개해 ‘사회적 매장’을 시켜버리고, 부모 손에 이끌려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시키는 대로 ‘외국인’이 된 그 자녀들을 국내 대학도 못 갈 왕따로 만든다 하니 우리가 정말 법치국가에서 살고 있는 것인가. 법치국가라면 개인 문제인 도덕성과 사회적 문제인 준법과 범법이 엄격히 구분돼야 하는데, 다수가 ‘악질 반동’이나 ‘악질 빨갱이’로 생각하는 자라면 그냥 인민재판해도 되는 식의 반세기 전 어두운 세계관을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동북아 허브’를 자칭하려는 나라가 보이는 법과 인권의 이해가 퇴행적인 면이 심하다는 느낌도 들었지만, 어떤 불이익을 감수하더라도 아이를 군대에 안 보내고 차라리 외국인으로 만들려는 사람들에 대한 단순한 인간적 이해도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흔히 쓰는 ‘역지사지’라는 말을 한번 적용해보자. 아들의 손을 잡고 출입국관리사무소를 향하는 부모의 어려운 마음을 한번 헤아려보는 것은 어떨까?


△ 국적법 발효를 앞두고 국적이탈신고서를 제출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여론 재판이 시작됐다. (사진/ 박승화 기자)

구미 지역에서 아이를 낳아 키우다가 다시 귀국한 부모의 마음속은 솔직히 군대 생각에 한없이 복잡해질 것이다. 구석구석 엄연히 남아 있는 구타나 몇 개월 전에 부하에게 인분을 먹였다가 논란을 일으킨 한 장교의 행각이 대표하는 범죄적 인권침해도 문제지만 그것뿐만은 아니다. 예컨대 구미 학교에서 선생의 언행이 틀렸다 싶으면 거침없이 나서 수정해주는 등 나이·신분과 무관하게 모든 이와 평등하게 지냈던 아이가, 윗사람이 “야, 이놈아!”라고 외치면 그를 언어폭력으로 당국에 고발하는 대신 떨면서 분부를 기다려야 하는 사회에 과연 정신적 타격을 받지 않고 적응할 수 있을 것인가? 선생이 아이에게 “점심 먹어라” 대신 “우리 점심 먹을까요”와 같은 유의 표현을 쓰는 사회에서 자란 아이가 평생 처음으로 기합이란 것을 당하게 된다면 자살 충동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

일제 군대식 위계질서와 ‘합법화된 횡포’의 문제가 사라졌다고 치자. 그렇다 해도 18살이 되면 부모에게서 독립해 애인과 함께 동거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15~16살의 어린 나이부터 이성과 지내거나 함께 살 수 있는 사적인 공간이 확보되는 사회에서 자란 아이에게 과연 남성들끼리의 강요된 합숙 생활이 쉬울까? 고등학교 시절부터 애인과 함께 살아온 나의 한 노르웨이 제자가 한 한국 대학교의 기숙사에서 한 학기 동안 다른 학생들과 한방에서 지낸 것에 대해 “표현하기 힘들 만큼 참기 어려웠다”고 실토한 적이 있다. 노르웨이 기숙사는 개인이나 커플에게 독방이나 몇개의 방을 주는 아파트형 기숙사라는 것이 한국과의 차이점이다. ‘귀한 손님’ 자격으로 모범생인 몇명의 학우들과 같이 지내는 것도 개인주의 문화가 몸에 밴 사람에게 힘든 일인데 구미권에서 성장기를 보낸 사람에게 내무반 생활이 과연 어떻게 느껴질 것인가?

다양성 인정이 공동체를 풍요롭게 한다


△ 유승준은 미국 국적을 택한 대가로 한국 입국을 거부당했다. (사진/ 연합)

아이의 손을 잡고 출입국관리사무소를 향하는 부모의 한숨은 많은 독자들에게 ‘배부른 자의 타령’으로만 보일 것이고 “남의 아들이 겪는 고생, 당신의 아들이라고 왜 피해야 하나” “분단국가에서 개인 사정까지 고려할 여유는 없다”라는 지적이 날아올 것이다. 이 점에서 한 가지 이해를 바라는 것은 위의 이야기가 형평성의 원칙을 깨는 병역 면탈을 위한 변명도, 현실적 안보 상황을 무시하는 이야기도 아니라는 점이다. 공동체가 질 부담을 모든 구성원들이 골고루 평등하게 지자는 데 대해 필자도 대찬성이다!

다만 우리가 서로 다양한 개인들의 상황과 인권을 출발점으로 보는 성숙한 공동체라면, 그 분담 방식도 개인들의 다양성과 인격 존중의 필요성 등을 충분히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예컨대 신념상 총을 들지 못하는 양심적 거부자들에게 대체복무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성격상 단체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운 ‘외톨박이’들에게 더 잦은 면회와 의사와의 정기적 상담의 기회를 주는 한편 그들에 대한 가혹행위 방지의 특별한 노력이 해당 장교의 의무로 정해진다고 치자. 또한 인권·인간적 존엄성의 존중을 사관학교부터 가르치는 한편 학교부터 두발제한 등 일제 파시즘의 잔재들이 깨끗이 씻어져 인권 의식이 확립된 학생들이 나중에 건전한 군대에 가게 된다고 생각해보자. 그리하여 보수주의자들이 그리도 좋아하는 ‘글로벌 스탠더드’들이 인권 분야에서도 뿌리를 내린다면 그게 형평성 원칙이나 국가 안보에 무슨 해악을 끼칠 것인가? 그리고 차후에 우리가 인해전술을 쓰지 않는 이상 이처럼 비대해진 육군을 징병제를 통해 과연 지탱할 의미가 있는가에 대해 따져봐야 할 터인데, 그건 지면 사정상 여기에서 다룰 수 없는 이야기다. 한마디로 ‘국적을 포기하는 비겁한 비국민’들을 인민재판식으로 다루기 전에 그들이 과연 뭘 그렇게도 두려워하는지 자세히 알아보고 그래서 우리 자신들의 고질적 문제점들을 반성해 해결하는 계기로 삼는 것이 조금 더 생산적인 방식이 아닐까?

지나치게 감정적인 도덕 가치 기준

‘비국민’ 이야기 나왔으니 한 가지만 덧붙이자. 일제·군사 독재의 국가주의적 패러다임대로 아직도 국가를 ‘큰 가족’으로 그리고 국적을 버리면 불효막심이 되는 가족에서의 태생적 성원 신분처럼 상상하는 것이 너무 보편적이지만, 자유주의적 근대 국가에서 국적이란 확실히 선택사항이다. 그 선택에 감정적으로 도덕적 가치를 부여할 필요가 꼭 있는가? 예컨대 필자의 경우 <매천야록>을 읽으면 그 저자의 감정을 필자의 감정으로 착각할 만큼 한국 문화의 어떤 부분들에 대한 특별한 친근감을 느껴 한국 국적을 선택한 반면, 가부장적 문화에 피로가 쌓인 어떤 한국 여성이 자신이 어머니나 아내가 아닌 한 독립적 개체로 대우를 받을 다른 나라의 국적을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 경우는 한국 국적의 취득이고 다른 경우는 한국 국적의 포기지만, 결국 양쪽에서 본인의 상황과 편의에 따라 선택했을 뿐이다. 우리가 진정 자유주의 국가 시민이라면 여기에서 칭찬하거나 혹은 욕할 만한 무엇이라도 과연 있는가? 이번 일이 계기가 되어서 조금 더 이성적이고 냉정하며 객관적인 눈을 갖게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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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릴케 현상 > [퍼온글] [퍼옴] [지성과의 대담] 르 클레지오-김정란 교수

[지성과의 대담] <1> 르 클레지오-김정란 교수

제2회 서울국제문학포럼 24일 개막
"문학은 물질만능 현대사회에 희망의 빛이죠"
피식민지의 소외된 역사를 문학으로 살려내는 데 관심
폭력의 시대엔 문학으로 균형 잡아야
아프리카에서 어린시절 보내며
그들의 삶에 매료…진짜 학교는 자연입니다



김 :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조금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선생을 둘러싸고 많은 신화가 만들어져 있어서요. 워낙 과묵하고 언론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르 : (웃음) 그건 그냥 신화지요. 제 잘못은 아닙니다.


김: 한국에는 두 번째 오시는 거지요? 여러 곳을 가보셨나요?

르: 예, 2001년에 왔었는데 경주에도 가봤습니다.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마침 실비가 내려서... 그 고도의 대지에서 아주 오래된 어떤 정령들이 솟아오르는 듯한 느낌마저 받았습니다. 한국의 유적은 규모는 크지 않지만 무척 독특합니다.


1시간여 동안 진행된 대담 내내 그는 부드럽고 친절했고, 열정적이었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한국에 대한 이해의 깊이였다. “한국의 유적은 중국이나 일본의 그것들과는 다르다”고 했을 때 그는 대뜸 “맞습니다. 엄청난 섬세함이죠.”라고 맞장구 쳤다. /조영호기자


김: 아, 시적인 관찰이군요. 중국이나 일본의 유적들에 비해 훨씬 더 섬세하지요. 정신적이지요.

르 : 맞아요. 훨씬 더 섬세합니다.

김 : 선생께서는 작품 활동 초기부터 산업사회에 대한 매우 래디컬한 거부감을 보이셨지요. 데뷔작 ‘조서’에서부터 이미 그것은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그 거부는 부분적인 거부가 아니라 전적인 거부, 매우 형이상학적인 거부로 여겨집니다. 선생의 작품을 읽다 보면, 세계는 지옥이고, 선생은 물질 그 자체를 견디지 못하는 것 같아요.

르: 그렇습니다. 산업사회는 개인에게 적대적이거든요. 개인을 소비의 한 요소로 만들어 버립니다. 물론, 실용성이라는 좋은 측면도 있습니만 문제는 균형입니다. 이건 오히려 동양적 관점이지요. 개인과 사회, 정신과 육체 사이의 균형., 물질과 정신 사이의 균형.

내가 20살 시절에 그런 철학적 관점을 확립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성장한 환경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건 제가 받았던 교육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당시로서 매우 드문 경험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아프리카에서 의사로 계셨어요. 전쟁 때문에 아버지와 떨어져 살아야 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아버지를 만나러 갔습니다. 그래서 자의식이 눈뜨던 어린 시절을 아프리카에서 보냈지요. 저는 그 땅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의 육체적 아름다움에 매료되었습니다. 게다가 저는 몇 년 동안이나 학교엔 가지 않았어요. 어머니가 가르치셨지요. 프랑스에 돌아와서야 학교에 들어갔는데, 적응하는 데 힘들었습니다. 신발을 신는 것조차 힘들었거든요. 그런 경험이 저를 자연의 벌거벗은 아름다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진짜 학교는 자연이었습니다.

김 : ‘사막’의 편집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는 특히 당신이 랄라의 종족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줄을 들여 쓴 것에 주목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이것이 진짜 이야기, 즉 안의 이야기이다. 랄라의 삶은 밖에, 산업사회의 변두리에 있다. 밖으로 내다 쓴 대목은 랄라의 밖의 상태, 즉 소외 상태를 나타낸다. 제 해석이 맞습니까?

르: 바로 그것이 제가 의도했던 것이지요. 들여 쓴 대목은 내적 역사, 그리고 내어 쓴 대목은 소외의 역사를 나타냅니다. 그 소외의 역사를 기술하는 데 있어서 영국 작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사회 안에서 타자들과 살아가는 훈련이 되어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습니다.

김 : 저는 그 문학적 표현의 적실성에 감탄하면서도 고통을 느낍니다. 제가 피식민지였던 국가의 여성임을 이해해 주십시오. 당신 작품에 나오는 그 종족의 사라진 과거는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그 과거는 신화적 과거가 아니라 역사적 과거죠. 그것은 그리 오래된 시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르: 이해합니다. 열 네 살 때 모로코에 갔을 때, 저는 그곳 상황을 보고 너무나 놀랐습니다. 검표원은 아랍인, 운전기사는 프랑봉? 너무 많은 권력의 남용이 있었어요. 친척 아저씨가 굉장한 부자였는데, 개들을 잔뜩 기르고 있었어요. 아랍인들을 내쫓는 것이 임무인 개들이라는 거예요. 아랍인들을 구별하는 훈련을 시켜야 한다고 말하더군요. 저는 그런 상황과 싸워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사막’은 그런 접근 방식을 택한 것입니다.

김 : 식민지의 문제는 이미 피식민지의 문제이기는 합니다. 그리고 고통은 계속되고 있지요. 예를 들면, 우리는 아직도 일본강점의 찌꺼기와 싸우고 있습니다. 과거를 정리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일본은 완강하게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과거사 정리에 대한 노력을 거부하는 국내의 반발도 있습니다. 선생이라면 어떻게 할것 같은가요?

르 : 당연히 싸워야 합니다. 지배자들은 결코 진심으로는 사죄하지 않습니다. 독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국내의 작가들이 문제제기를 꾸준히 해야 하고, 일본도 도와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의 해결에 이르기까지 고통은 오래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낙관적입니다. 한국인들에게서는 어떤 단단한 가슴의 바위 같은 것이 느껴집니다.

김: 문학은 죽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미 죽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문학이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르: 아니오, 나는 문학의 죽음을 확인하지 못했어요. 나는 오히려 문학은 지금 무척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적 불안정, 막강한 물질주의, 향락적인 삶의 태도, 그런 것이 만연해 있는 상황에서 문학은 단지 위안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희망이기도 합니다.

김 : 선생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젊은이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이죠.

르: 그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사실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언제나 문학에 관심을 가지는 숫자는 소수입니다. 왜냐하면 문학은 어려운 거니까요. 저는 문학을 읽는 독자들의 비율은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김 : 선생의 작품은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동의하시나요?

르: 예. 전체적인 관점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부모 세대의 신앙은 아닙니다. 종교적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현대사회에서 비웃음을 각오하는 일이기도 하지요. 제 마지막 종교집회 경험은 그래요. 니스에서 항구에서 신부님이 축성을 하는데, 의식에 참여한 신자들을 빙 둘러싸고 공산당원들이 놀려대요. 늘 그런 식이지요(웃음). 황석영의 ‘손님’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어요. 그 안에 “이스라엘의 신이면 한국인의 신이기도 하다”라는 대목이 나오던데, 그게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김: 하하, 그림이 떠오르는군요. 저는 21세기는 매우 깊은 인간의 성숙과 영성적 수련이 필요한 시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미 그러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쪽에서는 점점 더 물질적이고 표피적인 곳으로 변해 가고 있고, 어떤 사람들은 마음 깊이 불행해 하고 있습니다.

르: 아, 당신은 비관주의자인 것처럼 보이는군요.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전적으로 표피적인 인간도 존재하지 않구요. 누구나 다 영성적 경향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세계는 잘 되어 가지 않고 있어요. 하지만 더 나빠지지는 않을 겁니다.

김: 만일 세계가 지금처럼 계속 이어진다면, 파멸은 불을 보듯 뻔한 것 같아요. 그러나 우리는 이미 달리고 있는 호랑이 등 위에 올라탄 형국인 것 같아요.

르: 또는 용이거나(웃음).

김 : (웃음). 본질적 해결은 불가능한 것 같아요. 가능한 유일한 방식은 파멸의 속도를 늦추는 것 뿐이겠지요. 하지만 그 늦추기조차도 잘 사는 나라 사람들, 특히 미국인들의 협력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무엇인가 해야 합니다.

르: 그래요. 얼마 전에 우울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방글라데시가 사라질지도 모른답니다. 태평양의 섬들도 그렇고요. 방글라데시 환경장관의 말이 의미심장했습니다. ‘시작은 당신들이 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쓰레기를 던지고 있다.’ 그래요. 무엇인가 해야 합니다. 무엇인가 합시다. 희망을 가지고요. 문학은 그 방편 중의 하나입니다.

장 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는…

1940년 프랑스 니스에서 태어났다. 63년 첫 소설 '조서'로 데뷔와 함께 르노도상을 수상했다. 태국과 멕시코 체류 경험으로 불교와 선(禪), 남미 인디오의 삶과 가치관 등에 친숙하다. '성스러운 세 도시'황금 물고기' 등 수십 편의 장편 단편 에세이를 통해 프랑스 문단의 살아있는 신화로 평가 받고 있다. 2001년 방한해 전남 화순의 운주사를 둘러본 뒤 '운주사, 가을비'라는 시를 쓴 바 있다.

김정란 교수는…

1953년 서울에서 나서 프랑스 그로노블3대학에서 이브 본느프와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6년 김춘수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이래 '다시 시작하는 나비' 등 5권의 시집과 '비어있는 중심' 등 평론집을 냈고, '람세스' '아더왕 이야기' '20세기 문학비평' 등을 번역했다. 99년 소월시 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상지대 인문사회과학대학 교수로 있다.


<출처: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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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제실험은 시뮐라시옹의 극단적 사례”

“현대 네트워크 사회에서는 개개인이 온갖 정보와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소유하고 있다. 그래서 가능성은 다양해지지만 정작 자신이 누구인지는 모르는 부정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상황이 연출된다. 동시다발적으로 다양한 정체성이 등장해서 정체성들 사이의 유희가 이루어지면서 오히려 전통적인 의미의 단일한 정체성은 분실되는 것이 네트워크 사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적인 이론가인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76)가 한국에 왔다. 한국문화예술진흥원과 대산문화재단 공동 주최로 24일 개막한 제2회 서울국제문학포럼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보드리야르는 24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기자회견을 마련해 그가 주창해 온 시뮬라시옹(복제) 이론을 통해 현대 사회의 특징을 설명했다.

이번이 두 번째 한국 방문이라는 보드리야르는 “한국은 전통의 뿌리가 깊은 한편 현대화가 급속히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독특하다”면서 “최근 한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클론(세포복제) 실험은 자연 현실의 부정이라는 점에서 시뮬라시옹의 극단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시뮬라시옹은 사실 상당히 오래된 것이다. 그러나 같은 시뮬라시옹이라도 문화와 예술, 그리고 행동양식 등에서 기호를 통한 현실의 재현을 가리켰던 근대의 시뮬라시옹과 현대의 그것은 서로 다르다. 현대에 오면 시뮬라시옹은 급격히 발전하고 전이하며 커다란 도약을 이룸으로써 더 이상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아예 가상현실로 넘어가게 된다.”

그는 그러나 시뮬라시옹이나 그 작용의 결과물인 시뮬라크르를 ‘거짓’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현대 사회에서는 더 이상 진실과 거짓 사이의 구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극단적인 현실 청산이 이루어질 것”이라면서 “그것은 두려운 전망이다”라고 덧붙였다.

이미 사라져 버린 원본을 상정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현실과 역사, 미래 전망을 부정하는 듯한 보드리야르의 이론에는 냉소주의나 허무주의 또는 보수주의의 혐의가 따라다닌다. 그에 대해 보드리야르 자신은 “나는 긍정론자도 아니지만 부정론자도 아니다”라면서 “나는 다만 지성을 바탕으로, 명석하고 근본적으로 상황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희망과 이성을 버려야 지성이 가능하다. 지나친 희망과 유토피아를 꿈꾸는 게 오히려 나쁠 수 있다. 현실의 부정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명석한 대안이 없지만, 도전이 존재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한반도 분단을 자신의 이론에 비추어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보드리야르는 “객관적으로 분단선이 없어지면 자유로워지기 때문에 좋은 것은 사실”이라고 전제하고 “그러나 구분하는 선이 없어진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결과만을 낳는 것은 아니며, 새로운 형태의 차별과 대립이 나타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는 원칙론을 밝혔다.

1980년대부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는 그는 25일부터 서울 종로구 통의동 대림미술관에서 ‘존재하지 않는 세계’라는 주제로 사진전을 연다.

“처음에는 글쓰기의 책임감과 중압감에서 벗어나고자, 다만 즐거움을 위해 사진을 찍기 시작했는데, 계속 찍다 보니 어느 정도 심각하게 사진에 접근하게 됐다. 내 사진에는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마치 내가 존재하지 않는 듯이, 사물과 상황과 빛과 앵글만으로 ‘사물 자체’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자 했다.”

원본을 부정하는 포스트모던 이론가가 찍은 ‘사물 자체’는 어떤 것일까? 궁금하다.

글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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