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제실험은 시뮐라시옹의 극단적 사례”

“현대 네트워크 사회에서는 개개인이 온갖 정보와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소유하고 있다. 그래서 가능성은 다양해지지만 정작 자신이 누구인지는 모르는 부정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상황이 연출된다. 동시다발적으로 다양한 정체성이 등장해서 정체성들 사이의 유희가 이루어지면서 오히려 전통적인 의미의 단일한 정체성은 분실되는 것이 네트워크 사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적인 이론가인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76)가 한국에 왔다. 한국문화예술진흥원과 대산문화재단 공동 주최로 24일 개막한 제2회 서울국제문학포럼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보드리야르는 24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기자회견을 마련해 그가 주창해 온 시뮬라시옹(복제) 이론을 통해 현대 사회의 특징을 설명했다.

이번이 두 번째 한국 방문이라는 보드리야르는 “한국은 전통의 뿌리가 깊은 한편 현대화가 급속히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독특하다”면서 “최근 한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클론(세포복제) 실험은 자연 현실의 부정이라는 점에서 시뮬라시옹의 극단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시뮬라시옹은 사실 상당히 오래된 것이다. 그러나 같은 시뮬라시옹이라도 문화와 예술, 그리고 행동양식 등에서 기호를 통한 현실의 재현을 가리켰던 근대의 시뮬라시옹과 현대의 그것은 서로 다르다. 현대에 오면 시뮬라시옹은 급격히 발전하고 전이하며 커다란 도약을 이룸으로써 더 이상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아예 가상현실로 넘어가게 된다.”

그는 그러나 시뮬라시옹이나 그 작용의 결과물인 시뮬라크르를 ‘거짓’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현대 사회에서는 더 이상 진실과 거짓 사이의 구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극단적인 현실 청산이 이루어질 것”이라면서 “그것은 두려운 전망이다”라고 덧붙였다.

이미 사라져 버린 원본을 상정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현실과 역사, 미래 전망을 부정하는 듯한 보드리야르의 이론에는 냉소주의나 허무주의 또는 보수주의의 혐의가 따라다닌다. 그에 대해 보드리야르 자신은 “나는 긍정론자도 아니지만 부정론자도 아니다”라면서 “나는 다만 지성을 바탕으로, 명석하고 근본적으로 상황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희망과 이성을 버려야 지성이 가능하다. 지나친 희망과 유토피아를 꿈꾸는 게 오히려 나쁠 수 있다. 현실의 부정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명석한 대안이 없지만, 도전이 존재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한반도 분단을 자신의 이론에 비추어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보드리야르는 “객관적으로 분단선이 없어지면 자유로워지기 때문에 좋은 것은 사실”이라고 전제하고 “그러나 구분하는 선이 없어진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결과만을 낳는 것은 아니며, 새로운 형태의 차별과 대립이 나타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는 원칙론을 밝혔다.

1980년대부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는 그는 25일부터 서울 종로구 통의동 대림미술관에서 ‘존재하지 않는 세계’라는 주제로 사진전을 연다.

“처음에는 글쓰기의 책임감과 중압감에서 벗어나고자, 다만 즐거움을 위해 사진을 찍기 시작했는데, 계속 찍다 보니 어느 정도 심각하게 사진에 접근하게 됐다. 내 사진에는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마치 내가 존재하지 않는 듯이, 사물과 상황과 빛과 앵글만으로 ‘사물 자체’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자 했다.”

원본을 부정하는 포스트모던 이론가가 찍은 ‘사물 자체’는 어떤 것일까? 궁금하다.

글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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