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적’ 마녀사냥을 중단하라

우리는 진정 자유주의 국가에 살고 있는가… 국적포기자들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생각해보자…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최근의 ‘국적 포기 사태’를 지켜보며 필자는 마음속에서 만감이 교차했다. 한편으로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들을 재빨리 미국인으로 만들려는 사회귀족들의 행각을 보면서 한심해하는 사람들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빈민개병제’의 울타리를 벗어날 생각조차 못해 그 무지막지한 부담을 다 전담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학력과 재력을 이용해 그 울타리 밖의 인생을 즐기는 자에게 ‘계급적 증오심을 느낄 법도 하다. 게다가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높은 나라에의 입적(入籍)’ 열풍은 아무래도 ‘내지인 행세’를 하려고 안달이었던 식민지 엘리트의 추태를 생각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미국이 각처에서 벌이는 대량 살인들과, 잘못하면 한반도에서까지 벌일지도 모를 침략까지 생각한다면 ‘귀한 자녀 미국인 만들어주기’를 밀어붙이는 사람들을 향한 시선이 고울 수가 없다.


△ 국적법 개정안 발의에 중요한 역할을 한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 그는 국적 포기 신청자가 급증하자 국적 포기자 부모의 신상정보를 공개하겠다고 나섰다. (사진/ 한겨레 이종찬 기자)

‘악질 반동’ 인민재판의 그림자

미국 여권을 현대판 귀족 족보나 홍패(紅牌)로 삼는 자들의 행각이 문제로 보여도, 또 한편으로는 필자는 이 사태에 대한 몇명의 국회의원들과 언론, 일부 시민들의 반응에서 지나침을 느끼기도 했다. 동포로서의 권리를 박탈해 ‘완전한 외국인’으로 만들고 부모 명단까지 발표한다? 도덕적 문제가 있다 해도 현행법상 죄가 없는 부모들의 명단을 공개해 ‘사회적 매장’을 시켜버리고, 부모 손에 이끌려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시키는 대로 ‘외국인’이 된 그 자녀들을 국내 대학도 못 갈 왕따로 만든다 하니 우리가 정말 법치국가에서 살고 있는 것인가. 법치국가라면 개인 문제인 도덕성과 사회적 문제인 준법과 범법이 엄격히 구분돼야 하는데, 다수가 ‘악질 반동’이나 ‘악질 빨갱이’로 생각하는 자라면 그냥 인민재판해도 되는 식의 반세기 전 어두운 세계관을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동북아 허브’를 자칭하려는 나라가 보이는 법과 인권의 이해가 퇴행적인 면이 심하다는 느낌도 들었지만, 어떤 불이익을 감수하더라도 아이를 군대에 안 보내고 차라리 외국인으로 만들려는 사람들에 대한 단순한 인간적 이해도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흔히 쓰는 ‘역지사지’라는 말을 한번 적용해보자. 아들의 손을 잡고 출입국관리사무소를 향하는 부모의 어려운 마음을 한번 헤아려보는 것은 어떨까?


△ 국적법 발효를 앞두고 국적이탈신고서를 제출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여론 재판이 시작됐다. (사진/ 박승화 기자)

구미 지역에서 아이를 낳아 키우다가 다시 귀국한 부모의 마음속은 솔직히 군대 생각에 한없이 복잡해질 것이다. 구석구석 엄연히 남아 있는 구타나 몇 개월 전에 부하에게 인분을 먹였다가 논란을 일으킨 한 장교의 행각이 대표하는 범죄적 인권침해도 문제지만 그것뿐만은 아니다. 예컨대 구미 학교에서 선생의 언행이 틀렸다 싶으면 거침없이 나서 수정해주는 등 나이·신분과 무관하게 모든 이와 평등하게 지냈던 아이가, 윗사람이 “야, 이놈아!”라고 외치면 그를 언어폭력으로 당국에 고발하는 대신 떨면서 분부를 기다려야 하는 사회에 과연 정신적 타격을 받지 않고 적응할 수 있을 것인가? 선생이 아이에게 “점심 먹어라” 대신 “우리 점심 먹을까요”와 같은 유의 표현을 쓰는 사회에서 자란 아이가 평생 처음으로 기합이란 것을 당하게 된다면 자살 충동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

일제 군대식 위계질서와 ‘합법화된 횡포’의 문제가 사라졌다고 치자. 그렇다 해도 18살이 되면 부모에게서 독립해 애인과 함께 동거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15~16살의 어린 나이부터 이성과 지내거나 함께 살 수 있는 사적인 공간이 확보되는 사회에서 자란 아이에게 과연 남성들끼리의 강요된 합숙 생활이 쉬울까? 고등학교 시절부터 애인과 함께 살아온 나의 한 노르웨이 제자가 한 한국 대학교의 기숙사에서 한 학기 동안 다른 학생들과 한방에서 지낸 것에 대해 “표현하기 힘들 만큼 참기 어려웠다”고 실토한 적이 있다. 노르웨이 기숙사는 개인이나 커플에게 독방이나 몇개의 방을 주는 아파트형 기숙사라는 것이 한국과의 차이점이다. ‘귀한 손님’ 자격으로 모범생인 몇명의 학우들과 같이 지내는 것도 개인주의 문화가 몸에 밴 사람에게 힘든 일인데 구미권에서 성장기를 보낸 사람에게 내무반 생활이 과연 어떻게 느껴질 것인가?

다양성 인정이 공동체를 풍요롭게 한다


△ 유승준은 미국 국적을 택한 대가로 한국 입국을 거부당했다. (사진/ 연합)

아이의 손을 잡고 출입국관리사무소를 향하는 부모의 한숨은 많은 독자들에게 ‘배부른 자의 타령’으로만 보일 것이고 “남의 아들이 겪는 고생, 당신의 아들이라고 왜 피해야 하나” “분단국가에서 개인 사정까지 고려할 여유는 없다”라는 지적이 날아올 것이다. 이 점에서 한 가지 이해를 바라는 것은 위의 이야기가 형평성의 원칙을 깨는 병역 면탈을 위한 변명도, 현실적 안보 상황을 무시하는 이야기도 아니라는 점이다. 공동체가 질 부담을 모든 구성원들이 골고루 평등하게 지자는 데 대해 필자도 대찬성이다!

다만 우리가 서로 다양한 개인들의 상황과 인권을 출발점으로 보는 성숙한 공동체라면, 그 분담 방식도 개인들의 다양성과 인격 존중의 필요성 등을 충분히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예컨대 신념상 총을 들지 못하는 양심적 거부자들에게 대체복무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성격상 단체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운 ‘외톨박이’들에게 더 잦은 면회와 의사와의 정기적 상담의 기회를 주는 한편 그들에 대한 가혹행위 방지의 특별한 노력이 해당 장교의 의무로 정해진다고 치자. 또한 인권·인간적 존엄성의 존중을 사관학교부터 가르치는 한편 학교부터 두발제한 등 일제 파시즘의 잔재들이 깨끗이 씻어져 인권 의식이 확립된 학생들이 나중에 건전한 군대에 가게 된다고 생각해보자. 그리하여 보수주의자들이 그리도 좋아하는 ‘글로벌 스탠더드’들이 인권 분야에서도 뿌리를 내린다면 그게 형평성 원칙이나 국가 안보에 무슨 해악을 끼칠 것인가? 그리고 차후에 우리가 인해전술을 쓰지 않는 이상 이처럼 비대해진 육군을 징병제를 통해 과연 지탱할 의미가 있는가에 대해 따져봐야 할 터인데, 그건 지면 사정상 여기에서 다룰 수 없는 이야기다. 한마디로 ‘국적을 포기하는 비겁한 비국민’들을 인민재판식으로 다루기 전에 그들이 과연 뭘 그렇게도 두려워하는지 자세히 알아보고 그래서 우리 자신들의 고질적 문제점들을 반성해 해결하는 계기로 삼는 것이 조금 더 생산적인 방식이 아닐까?

지나치게 감정적인 도덕 가치 기준

‘비국민’ 이야기 나왔으니 한 가지만 덧붙이자. 일제·군사 독재의 국가주의적 패러다임대로 아직도 국가를 ‘큰 가족’으로 그리고 국적을 버리면 불효막심이 되는 가족에서의 태생적 성원 신분처럼 상상하는 것이 너무 보편적이지만, 자유주의적 근대 국가에서 국적이란 확실히 선택사항이다. 그 선택에 감정적으로 도덕적 가치를 부여할 필요가 꼭 있는가? 예컨대 필자의 경우 <매천야록>을 읽으면 그 저자의 감정을 필자의 감정으로 착각할 만큼 한국 문화의 어떤 부분들에 대한 특별한 친근감을 느껴 한국 국적을 선택한 반면, 가부장적 문화에 피로가 쌓인 어떤 한국 여성이 자신이 어머니나 아내가 아닌 한 독립적 개체로 대우를 받을 다른 나라의 국적을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 경우는 한국 국적의 취득이고 다른 경우는 한국 국적의 포기지만, 결국 양쪽에서 본인의 상황과 편의에 따라 선택했을 뿐이다. 우리가 진정 자유주의 국가 시민이라면 여기에서 칭찬하거나 혹은 욕할 만한 무엇이라도 과연 있는가? 이번 일이 계기가 되어서 조금 더 이성적이고 냉정하며 객관적인 눈을 갖게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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