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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과의 대담] <1> 르 클레지오-김정란 교수

제2회 서울국제문학포럼 24일 개막
"문학은 물질만능 현대사회에 희망의 빛이죠"
피식민지의 소외된 역사를 문학으로 살려내는 데 관심
폭력의 시대엔 문학으로 균형 잡아야
아프리카에서 어린시절 보내며
그들의 삶에 매료…진짜 학교는 자연입니다



김 :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조금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선생을 둘러싸고 많은 신화가 만들어져 있어서요. 워낙 과묵하고 언론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르 : (웃음) 그건 그냥 신화지요. 제 잘못은 아닙니다.


김: 한국에는 두 번째 오시는 거지요? 여러 곳을 가보셨나요?

르: 예, 2001년에 왔었는데 경주에도 가봤습니다.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마침 실비가 내려서... 그 고도의 대지에서 아주 오래된 어떤 정령들이 솟아오르는 듯한 느낌마저 받았습니다. 한국의 유적은 규모는 크지 않지만 무척 독특합니다.


1시간여 동안 진행된 대담 내내 그는 부드럽고 친절했고, 열정적이었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한국에 대한 이해의 깊이였다. “한국의 유적은 중국이나 일본의 그것들과는 다르다”고 했을 때 그는 대뜸 “맞습니다. 엄청난 섬세함이죠.”라고 맞장구 쳤다. /조영호기자


김: 아, 시적인 관찰이군요. 중국이나 일본의 유적들에 비해 훨씬 더 섬세하지요. 정신적이지요.

르 : 맞아요. 훨씬 더 섬세합니다.

김 : 선생께서는 작품 활동 초기부터 산업사회에 대한 매우 래디컬한 거부감을 보이셨지요. 데뷔작 ‘조서’에서부터 이미 그것은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그 거부는 부분적인 거부가 아니라 전적인 거부, 매우 형이상학적인 거부로 여겨집니다. 선생의 작품을 읽다 보면, 세계는 지옥이고, 선생은 물질 그 자체를 견디지 못하는 것 같아요.

르: 그렇습니다. 산업사회는 개인에게 적대적이거든요. 개인을 소비의 한 요소로 만들어 버립니다. 물론, 실용성이라는 좋은 측면도 있습니만 문제는 균형입니다. 이건 오히려 동양적 관점이지요. 개인과 사회, 정신과 육체 사이의 균형., 물질과 정신 사이의 균형.

내가 20살 시절에 그런 철학적 관점을 확립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성장한 환경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건 제가 받았던 교육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당시로서 매우 드문 경험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아프리카에서 의사로 계셨어요. 전쟁 때문에 아버지와 떨어져 살아야 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아버지를 만나러 갔습니다. 그래서 자의식이 눈뜨던 어린 시절을 아프리카에서 보냈지요. 저는 그 땅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의 육체적 아름다움에 매료되었습니다. 게다가 저는 몇 년 동안이나 학교엔 가지 않았어요. 어머니가 가르치셨지요. 프랑스에 돌아와서야 학교에 들어갔는데, 적응하는 데 힘들었습니다. 신발을 신는 것조차 힘들었거든요. 그런 경험이 저를 자연의 벌거벗은 아름다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진짜 학교는 자연이었습니다.

김 : ‘사막’의 편집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는 특히 당신이 랄라의 종족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줄을 들여 쓴 것에 주목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이것이 진짜 이야기, 즉 안의 이야기이다. 랄라의 삶은 밖에, 산업사회의 변두리에 있다. 밖으로 내다 쓴 대목은 랄라의 밖의 상태, 즉 소외 상태를 나타낸다. 제 해석이 맞습니까?

르: 바로 그것이 제가 의도했던 것이지요. 들여 쓴 대목은 내적 역사, 그리고 내어 쓴 대목은 소외의 역사를 나타냅니다. 그 소외의 역사를 기술하는 데 있어서 영국 작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사회 안에서 타자들과 살아가는 훈련이 되어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습니다.

김 : 저는 그 문학적 표현의 적실성에 감탄하면서도 고통을 느낍니다. 제가 피식민지였던 국가의 여성임을 이해해 주십시오. 당신 작품에 나오는 그 종족의 사라진 과거는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그 과거는 신화적 과거가 아니라 역사적 과거죠. 그것은 그리 오래된 시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르: 이해합니다. 열 네 살 때 모로코에 갔을 때, 저는 그곳 상황을 보고 너무나 놀랐습니다. 검표원은 아랍인, 운전기사는 프랑봉? 너무 많은 권력의 남용이 있었어요. 친척 아저씨가 굉장한 부자였는데, 개들을 잔뜩 기르고 있었어요. 아랍인들을 내쫓는 것이 임무인 개들이라는 거예요. 아랍인들을 구별하는 훈련을 시켜야 한다고 말하더군요. 저는 그런 상황과 싸워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사막’은 그런 접근 방식을 택한 것입니다.

김 : 식민지의 문제는 이미 피식민지의 문제이기는 합니다. 그리고 고통은 계속되고 있지요. 예를 들면, 우리는 아직도 일본강점의 찌꺼기와 싸우고 있습니다. 과거를 정리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일본은 완강하게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과거사 정리에 대한 노력을 거부하는 국내의 반발도 있습니다. 선생이라면 어떻게 할것 같은가요?

르 : 당연히 싸워야 합니다. 지배자들은 결코 진심으로는 사죄하지 않습니다. 독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국내의 작가들이 문제제기를 꾸준히 해야 하고, 일본도 도와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의 해결에 이르기까지 고통은 오래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낙관적입니다. 한국인들에게서는 어떤 단단한 가슴의 바위 같은 것이 느껴집니다.

김: 문학은 죽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미 죽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문학이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르: 아니오, 나는 문학의 죽음을 확인하지 못했어요. 나는 오히려 문학은 지금 무척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적 불안정, 막강한 물질주의, 향락적인 삶의 태도, 그런 것이 만연해 있는 상황에서 문학은 단지 위안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희망이기도 합니다.

김 : 선생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젊은이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이죠.

르: 그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사실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언제나 문학에 관심을 가지는 숫자는 소수입니다. 왜냐하면 문학은 어려운 거니까요. 저는 문학을 읽는 독자들의 비율은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김 : 선생의 작품은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동의하시나요?

르: 예. 전체적인 관점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부모 세대의 신앙은 아닙니다. 종교적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현대사회에서 비웃음을 각오하는 일이기도 하지요. 제 마지막 종교집회 경험은 그래요. 니스에서 항구에서 신부님이 축성을 하는데, 의식에 참여한 신자들을 빙 둘러싸고 공산당원들이 놀려대요. 늘 그런 식이지요(웃음). 황석영의 ‘손님’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어요. 그 안에 “이스라엘의 신이면 한국인의 신이기도 하다”라는 대목이 나오던데, 그게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김: 하하, 그림이 떠오르는군요. 저는 21세기는 매우 깊은 인간의 성숙과 영성적 수련이 필요한 시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미 그러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쪽에서는 점점 더 물질적이고 표피적인 곳으로 변해 가고 있고, 어떤 사람들은 마음 깊이 불행해 하고 있습니다.

르: 아, 당신은 비관주의자인 것처럼 보이는군요.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전적으로 표피적인 인간도 존재하지 않구요. 누구나 다 영성적 경향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세계는 잘 되어 가지 않고 있어요. 하지만 더 나빠지지는 않을 겁니다.

김: 만일 세계가 지금처럼 계속 이어진다면, 파멸은 불을 보듯 뻔한 것 같아요. 그러나 우리는 이미 달리고 있는 호랑이 등 위에 올라탄 형국인 것 같아요.

르: 또는 용이거나(웃음).

김 : (웃음). 본질적 해결은 불가능한 것 같아요. 가능한 유일한 방식은 파멸의 속도를 늦추는 것 뿐이겠지요. 하지만 그 늦추기조차도 잘 사는 나라 사람들, 특히 미국인들의 협력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무엇인가 해야 합니다.

르: 그래요. 얼마 전에 우울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방글라데시가 사라질지도 모른답니다. 태평양의 섬들도 그렇고요. 방글라데시 환경장관의 말이 의미심장했습니다. ‘시작은 당신들이 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쓰레기를 던지고 있다.’ 그래요. 무엇인가 해야 합니다. 무엇인가 합시다. 희망을 가지고요. 문학은 그 방편 중의 하나입니다.

장 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는…

1940년 프랑스 니스에서 태어났다. 63년 첫 소설 '조서'로 데뷔와 함께 르노도상을 수상했다. 태국과 멕시코 체류 경험으로 불교와 선(禪), 남미 인디오의 삶과 가치관 등에 친숙하다. '성스러운 세 도시'황금 물고기' 등 수십 편의 장편 단편 에세이를 통해 프랑스 문단의 살아있는 신화로 평가 받고 있다. 2001년 방한해 전남 화순의 운주사를 둘러본 뒤 '운주사, 가을비'라는 시를 쓴 바 있다.

김정란 교수는…

1953년 서울에서 나서 프랑스 그로노블3대학에서 이브 본느프와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6년 김춘수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이래 '다시 시작하는 나비' 등 5권의 시집과 '비어있는 중심' 등 평론집을 냈고, '람세스' '아더왕 이야기' '20세기 문학비평' 등을 번역했다. 99년 소월시 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상지대 인문사회과학대학 교수로 있다.


<출처: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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