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가게 찰리의 행복하고도 슬픈 날들
다니엘 키스 지음, 김인영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4년 3월
평점 :
절판


이 책의 초반을 읽게 되면 혀가 점점 짧아지는 느낌을 받게 된다. 맞춤법, 띄어쓰기가 엉망인 글을 따라 읽는 것이 낯설게 느껴지지만, 익숙해지면 내가 그가 된 기분이 든다. 어느새 그의 흉내를 내고 있게 되는데, 지능이 많이 낮은 30대 아저씨 찰리의 일기는 이렇게 독자의 눈높이도 함께 낮추고 시작한다.

찰리는 뇌 수술을 받게 되고, 급격하게 지능이 향상된다. 좋게 말하면 의학 연구이고, 나쁘게 말하면 생체 실험이었다. 일기의 하루 하루는 찰리의 심리, 정신, 지능 변화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그러다가 그가 기억하지 못하고 있던 과거의 기억들도 하나씩 재생되기 시작한다. 부모, 주위 사람들에게서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던 찰리의 어린 시절, 성장기, 최근의 기억들을 인식하게 됨에 따라 정서장애를 일으킨다.
이젠 평범함을 뛰어넘은 천재성을 가진 그는 더 많은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의 부도덕성, 낮은 지능을 이해할 수 없는 찰리는 또 다시 그들의 틈에서 고독한 개인이 되어버린다. 인간다움이란, 평범한 그들에게만 허용된 특권이었다.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온 몸으로 감내해야만 하는 현실의 무게는 일기의 초반과 달리 점점 길어지고 복잡해지는 중반부의 일기에 그대로 드러난다. 

실험은 실패하고, 찰리의 지능은 급속히 퇴행 된다. 선악과를 먹고, 이성의 눈을 떴을 떄의 충격만큼이나 어둠 속으로 쓸려가는 찰리의 격정적인 심리 변화는 이 책의 하이라이트이다. 변화와 속도, 기억과 심리의 흐름은 책 한 권의 선율이 되어 거대한 굴곡을 지닌 슬픈 아리아의 떨림으로 발산한다. 극과 극의 체험, 빛과 어둠, 기억과 망각의 터널에 관한 경험은 연민 이상의 애잔함을 독자에게 남긴다.

이 책의 원제인 ‘엘저넌에게 꽃을’의 의미는 아마도 엘저넌에 대한 애정이면서, 엘저넌에 투영되어 있던 자아의 존중에 대한 찰리의 깊은 바람일 것이다.(엘저넌은 찰리처럼 뇌수술을 받은 실험용 쥐, 지능 퇴행 중 죽음).

기억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망각은 두려움을 동반한다. 존재 하지 않게 되는 순간, 모든 것이 지워지고 남는 것은 찰나의 감각뿐 일 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할 것은 고독이다. 기억되고 싶어하는 욕망, 그것은 자신의 존재가 묻혀지는 슬픔을 감내하려는 자의 몸부림이다.
망자 기억하기. 한시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꽃은 삶의 시작과 소멸을 상징하기에 망자 앞에 놓여진다. 꽃은 놓여지고, 시들면 다시 놓여진다. 마치 윤회와 같은 ‘망자 기억하기’같은 꾸준한 관심을 찰리는 바랬던 것이다..

뇌수술 그것은 인간성에 대한 치유였다. 백치의 눈으로 바라 본 세상을 벗어나 고통 받던 영혼이 회복하기 위한 치료였다. 그리고 백치를 비인간적으로 바라보던 인간들의 비인간성을 들춰내는 실험이었던 것이다.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이전과는 같지 않다. 이미 인간성 회복을 위한 목소리는 세상을 향해 외치고 사라졌으니….

찰리에게 꽃을….
우리 주위에서 잊혀진 자들에게 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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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투쟁’ 민주화시대의 명암

왜 간호조무사는 신생아를 학대했을까, 왜 사이버 삐끼들은 횡행하는가
인정욕구가 매우 강한 한국의 네티즌들, 티티테인먼트로 흐를까 염려된다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인간이 타인에게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는 너무나도 깊고 근원적이어서 인류의 역사 발전에 원동력으로 작용해왔다. 옛날에는 전쟁터에서 이러한 욕구가 발휘되었지만, 오늘날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는 군사 영역에서 경제 영역으로 옮겨졌다. 우리가 일을 하고 돈을 버는 동기는 먹고살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한 것이다. 우리의 경제생활이 물질적 풍요를 얻는 것뿐만 아니라 인정을 얻기 위해서 추구되는 것이라면,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상호 의존성은 명백해진다. 자유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의 ‘인정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체제인바, 오늘날 사실상 모든 선진국이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를 받아들였거나 받아들이고 있다. 따라서 최종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인류 사회의 폭넓은 진화라는 마르크스주의적·헤겔주의적 의미의 역사는 이제 끝났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리플’의 본질

국내 언론이 대서특필해준 덕에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음직한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론을 요약해본 것이다. 후쿠야마는 좀 독특한 유형의 본질주의 함정에 한 발을 담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들 밥은 먹고 살잖아?” 사람 사는 걸 ‘밥’이라는 본질로 환원해버리면, 그 밥의 값이 천차만별이라는 건 사소해진다. 극심한 빈부 양극화 체제에서 빈곤층에 속하는 사람도 그 세계에선 나름대로 ‘인정’을 추구하면서 살아가겠지만,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있는데 부유층이 추구하는 ‘인정’과의 엄청난 괴리에 마음의 평온함을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요컨대 ‘인정의 빈부격차’가 다시 문제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인정의 빈부격차’는 아직 심각한 화두로 떠오르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의 ‘인정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한 새로운 대안이 아주 자연스러운 시장 논리에 의해 유포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티티테인먼트’(tittytainment)라는 개념도 그런 관점에서 볼 수 있겠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세계화’로 인해 ‘20 대 80’(부유층 20%, 빈곤층 80%)이 이루어진 세상에선 티티테인먼트가 판치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이는 ‘entertainment’와 엄마 젖을 뜻하는 속어인 ‘titty’를 합한 말인데, 기막힌 오락물과 적당한 먹을거리의 절묘한 결합을 통해서 이 세상의 좌절한 사람들을 기분 나쁘지 않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 게임에 몰두하면서 흥분한 나머지 괴성까지 질러대는 어린아이들을 보면 그게 괜한 말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요즘 그렇게 말했다간 시대착오적인 인간으로 몰매 맞기 십상이다. 게임은 ‘국민산업’이 아닌가.


△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애를 쓰는 ‘인정투쟁’의 민주화 시대에 살게 되었다. 아니 언제는 그런 시대에 살지 않았단 말인가? 이렇게 정색을 하고 전투적으로 묻는다면, 인류 역사 이래로 그랬다고 한발 뒤로 물러서야 하겠지만, 겸손한 자세로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는 있을 것이다.

산부인과 병원에서 착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간호 조무사가 신생아를 학대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이 건으로 경찰서에 출두한 어느 간호 조무사는 “싸이월드에 있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예쁘게 꾸미고 싶었다. 영아들의 인상을 특색 있게 해 주변 다른 간호 조무사 또는 간호 관련 종사자들의 눈길을 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사진을 찍었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것, 이거 아주 중요한 ‘인정투쟁’이다. 한 인터넷 포털사이트 게시판에 “연예인 누드 사진을 보고 싶으면 내 홈피로 오세요”라는 글을 올려 작은 소동을 빚었던 주인공도 자신의 홈피 방문자 수를 늘려 인정을 받고 싶어했던 초등학생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리플’의 본질도 인정투쟁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최근의 ‘성기 노출’ 사건도 그랬지만, 무슨 사건만 터졌다 하면 어디서 그렇게 많은 ‘삐끼’들이 나타나는지 놀라울 지경이다. “놀러 오세요. 보러 오세요. 화끈해요. 죽여준다니까요.” 아니다. 삐끼는 아니다. 삐끼는 돈을 벌기 위해 그런다지만, 우리 시대의 사이버 삐끼는 자신의 미니 홈페이지 조회 수를 올리려는 소박한 마음에서 그러는 것뿐이다. 보여줄 것도 없으면서 거짓말로 유혹하는 삐끼들도 있다지만, 행여 화를 내선 안 될 일이다. 조회 수 올리는 걸로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그 소박하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한 몸부림에 감히 누가 돌을 던질 수 있단 말인가.

인터넷 이전과 이후가 이렇게 달라졌다. 과거 보통 사람들의 인정투쟁은 수단이 미비했다. 인정투쟁의 주요 수단이라 할 미디어는 엘리트의 독무대였다. 학생들의 경우 공부를 빼놓곤 기껏해야 소풍이나 수학여행에서 뭔가를 보여주는 것 이외에 이렇다 할 수단이 없었다. 운동을 잘하거나 주먹을 쓰거나 연애박사가 되는 길로 빠지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돈질도 부유층 자제에 국한되었다.

유희주의에서 공동체주의까지

인터넷 그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는 인터넷이 ‘규범 테크놀로지’로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보여주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 파급 효과가 인터넷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으며 앞으로 어떻게 더 달라질 것이란 말인가? 인터넷을 중심으로 보자면 ① 유희주의 ② 다문화주의 ③ 극단주의 ④ 공동체주의 등 네 가지 측면에서 이야기할 수 있겠다.


△ 정부가 인터넷 실명제를 들고 나왔을 때 네티즌들의 대다수가 이에 찬성했다. 이것은 무얼 의미하는가. 정치개혁연대 회원들이 인터넷 실명제에 항의하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사진/ 한겨레 김진수 기자)

첫째, 유희주의다. ‘유희주의’란 말은 없다고 시비를 걸 사람도 있겠지만, 이제 유희주의는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를 찜쪄 먹을 수준의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부상했다는 걸 인정하는 게 좋겠다. 인터넷의 본질은 유희다. 사람에 따라 ‘오락’이라고도 하고 ‘엔터테인먼트’라고도 한다.

‘엔터테인먼트 경제’는 이미 주류로 등극한 지 오래다. 인포테인먼트, 에듀테인먼트, 폴리테인먼트, 도큐테인먼트, 마켓테인먼트, 이터테인먼트, 처치테인먼트, 워크테인먼트, 쇼퍼테인먼트, 볼런테인먼트, 티티테인먼트 등 엔터테인먼트를 물고 들어가는 수많은 합성어들이 양산되는 게 그 위력을 잘 말해준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미래연구소 소장 폴 사포는 “디지털 기술은 너무나 흡인력이 강해서 ‘모든 것’을 유희의 도구로 만들어버릴 위험성이 크다. 로마제국의 멸망에서 읽을 수 있듯이, 위대한 문명의 몰락은 모든 것을 유희화한 데서 비롯됐다”고 경고했다.

그대로 믿을 말은 아니지만, 유희 아닌 것들이 이젠 유희와 더욱 치열한 경쟁을 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한숨을 푹푹 내쉬지 않을 수 없다는 건 분명해졌다. 유희는 인정투쟁의 주요 수단으로 등극하면서 전투성을 획득했기에 더욱 그렇다. 예컨대 정치가 무슨 수로 유희와 경쟁할 것인가. 하긴 그래서 정치가 자꾸 유희화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시사주간지마저 유희와 타협하지 않고 이렇게 골치 아픈 이야기 하면 문을 닫아야 하는 건가? 생각해볼 점이다.

둘째, 다문화주의다. 최근 인터넷엔 “님의 노예로 부려주시옵소서” “어린 ‘주인님’을 찾습니다” “내 속옷도 팔아요” 등을 외치는 카페가 많아졌나 보다. 가령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발’이란 단어를 치면 발을 탐닉하는 카페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한 포털 사이트에는 이런 카페가 600개 넘게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언론은 이런 카페를 ‘변태 카페’라고 이름 붙였지만, ‘변태’의 경계 설정은 이제 날이 갈수록 힘들어질 것이다.

그간 다문화주의는 소수자의 권익 옹호라는 점에서 좋은 의미로만 여겨져왔다. 인터넷 이전엔 당당하게 공개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소수자들 중심으로 소수자를 이해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터넷은 ‘소수자’의 폭발을 몰고 왔다. 인터넷 이전엔 뭉치기 어려웠던 소수자들까지 대거 인정투쟁을 위해 독자적인 동아리 또는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서구 사회에서 다문화주의는 늘 보수파의 공격 대상이었지만 이젠 일부 진보파도 다문화주의 공격에 합세했다. ‘성향의 소수자’건 ‘취향의 소수자’건 이들의 특성은 자신의 열악한 위치를 타개하기 위해 ‘단일 이슈 정치’에 몰두하기 때문이다. 즉, 자신들이 내세우는 이슈 한 가지만을 보고 정치적 판단을 내린다는 것이다. 진보파는 이런 정치 행태가 소수 집단간 ‘연대’를 파괴해 진보 정치에 큰 장애가 되고 있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이게 바다 건너 다른 나라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점점 한국의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사이즈’와 ‘주목’의 문제

셋째, 극단주의다. 인터넷은 대중의 전폭적인 참여와 그들의 인정투쟁 욕구로 인해 전반적으로 보아 반지성주의로 흐르게 돼 있다. 지성주의는 좋고 반지성주의는 나쁘다는 게 아니다. <한겨레> 문화생활부장 이인우는 “반지성주의·반지식인 정서는 2000년대 초반 한국 사회 문화의 특징적 흐름의 하나로 지적될 수 있다고 본다”며 그 이유 중의 하나로 인터넷을 지목하면서 다음과 같은 진단을 내렸는데, 이게 중립적인 분석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인쇄술이 지식의 생산과 소유의 패러다임을 바꾼 것과 같이 지식과 정보가 급속하게 전파되고 공유되고 가공되는 인터넷 문화가 지식과 정보의 평균화, 지성의 평등화가 가능한 것 같은 착각을 대중들에게 확산시키고 있는 것 같다.”

화끈한 해결을 선호한다는 점에서 반지성주의에도 좋은 점은 있는지 모르겠지만, 반지성주의와 사이버 폭력이라는 극단주의가 상호 무관할 수 없다는 건 분명하다. 정부는 사이버 폭력을 일소하겠다며 ‘인터넷 실명제’를 들고 나왔는데, 흥미로운 건 인터넷 실명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네티즌들의 의견이 반대하는 의견보다 최대 4배 가까이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야후 조사에서는 찬성 79%, 반대 20%로 나타났으며, 20~30대 이용자가 많은 네이버 조사에서도 응답자의 65%가 실명제 도입에 찬성한 반면 반대 입장은 32%에 그쳤다. 이게 과연 무얼 의미하는지 심층 분석해볼 필요가 있겠다.


△ 인터넷 전문가들은 한국 인터넷이 유희 중심적이라고 지적하면서 '인터넷 강국론'은 허구라고 주장한다. 사진은 서울 힐튼호텔에서 열린 한국인터넷 게임리그 결선 경기. (사진/ 한겨레 이정우 기자)

넷째, 공동체주의다. 지금은 무분별한 사용으로 오염된 단어가 되었지만 초기의 ‘해커’를 떠올리면 되겠다. 해커는 원래 ‘인정’ 하나로 먹고사는 사람들이었다. 도덕성 수준도 높았다. 남들이 자신의 기술 수준을 인정해주는 기쁨 하나로 돈도 받지 않고 폐인이 될 정도로 자신을 혹사해가며 프로그램 개발에 헌신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건 ‘사이즈’와 ‘주목’의 문제다. 누군가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행위를 할 때에 남들이 얼마나 주목해주느냐가 미칠 수 있는 영향을 생각해본다면 간단히 풀리는 문제다. 내가 무슨 희생을 하건 아무도 봐주지 않는다면 희생하고 싶은 마음도 약해질 것이다. 반면 나의 희생이 영웅적 행위로 널리 알려질 수 있다면 애초 마음먹었던 희생의 정도보다 ‘오버’할 수도 있다. 인터넷은 ‘사이즈’와 ‘주목’의 경계를 깬 열린 공간으로 이타성과 협동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주의의 가능성을 활짝 열었다.

‘인터넷 강국론’은 정말 허구가 아닐까

이렇듯 인터넷을 주요 무대로 삼은 인정투쟁엔 명암이 있다. 세계 각국의 인터넷을 두루 살펴보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한국 인터넷 문화의 독특한 특성 중 하나는 네티즌들의 인정 욕구가 매우 강하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간 한국은 보통 사람들의 인정 욕구 충족에 무심한, 아니 억압적인 사회였다는 점에 주목해보는 게 좋겠다. 대중의 인정 욕구 충족은 다양성을 생명으로 한다. 인정 욕구 충족의 방식이 획일적이라면 도대체 무슨 수로 그 많은 사람들의 인정 욕구가 충족되겠는가.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 사회는 인정 욕구 충족에서 일렬 종대로 줄 세우기를 좋아하는 유별난 문화를 갖고 있다. 돈, 아파트 평수, 자동차 배기량, 명품, 골프 등 모두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한 가지 잣대만으로 인간을 평가하는 데에 익숙한 문화라는 것이다.

바로 그런 무지막지한 위계가 “한국에선 인간답게 살려면 어찌어찌해야 한다”는 수많은 속설들을 낳았고, 또 이것들이 한국인들로 하여금 미친 듯이 공부하고 일하게 만든 동력이 된 게 아닌가 싶어, 과거의 민주화 투사들조차 자랑스럽게 뻐겨대는 ‘세계 10대 경제강국론’에 흔쾌히 박수를 치기가 어려워진다.

인터넷이라는 축복이 인정 욕구 충족의 다른 출구를 열어준 것은 그 어떤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다행스러운 일로 여겨야 마땅하겠건만, 다문화주의의 일부와 공동체주의를 제외하곤 이것마저도 혹 ‘티티테인먼트’가 아닌가 싶어 주저하게 된다. 인터넷을 누구 못지않게 사랑하는 많은 인터넷 기업가·전문가들이 한국 인터넷은 세계에서 가장 유희 중심적이라고 지적하면서 이른바 ‘인터넷 강국론’은 허구라고 주장하는 걸 보면, 그런 주저가 시대착오적인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인정투쟁 민주화의 내실화가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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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no Tech? Oh, NO!
2005년 08월 12일 | 글 | 김상연 기자 ㆍdream@donga.com |
 

나노입자가 혈액 내 적혈구 표면을 뚫고 들어가는 모습을 상상한 그림. 나노입자가 세포 안에 침투하면 DNA에 변형을 일으키는 등 다양한 스트레스를 가해 세포 자살을 유도할지 모른다. 크기가 너무 작기 때문에 인체 면역세포가 이를 감지해 없애기도 어렵다. 사진 제공 포어사이트 나노테크 인스티튜트
눈에 보이지 않는 ‘나노입자’가 뇌를 파고들어 종양을 일으킨다. 세포 속을 뚫고 들어간 나노입자는 DNA를 부수고 세포 자살을 유도한다. 나노 관련 공장 주변 지역이 오염돼 주민들이 병에 걸린다….

과연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질까. ‘나노로봇이 몸속을 돌아다니며 암세포를 제거하는’ 장밋빛 시나리오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상상하기 어려운 미래일 것이다. 그러나 미래기술의 선두 주자인 나노기술이 환경과 건강을 해칠 수도 있다는 우울한 전망이 미국에서 공식 보고서로 나왔다.

특허청 정현진 심사관은 지난해 4월 미국에서 열린 ‘기술과 환경적 건강: 나노기술의 의미’ 워크숍의 결과 보고서를 분석해 최근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나노기술은 nm(나노미터·1nm는 10억분의 1m) 크기의 원자나 분자를 자유자재로 조작해 신물질을 만드는 첨단기술이다.

몸속 나노물질 98%는 배출되고 2%는 중금속처럼 쌓여

나노기술의 부작용 중 하나는 나노물질이 중금속처럼 쌓인다는 점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몸 안에 들어온 나노물질의 98%는 48시간 안에 배출되지만 나머지 2%는 몸의 각 기관에 쌓이게 된다. 이 중 독성이 있는 나노입자가 치명적이다. 나노입자는 너무 작아 인체의 면역세포가 제거하지 못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축구공처럼 생긴 나노입자 ‘풀러렌’은 빛을 쬐면 독성을 갖고 있는 활성산소를 만든다. 활성산소는 DNA를 손상시켜 암 등 질병을 일으키곤 한다. 또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나노입자들이 세포 속으로 들어가면 심한 스트레스를 일으켜 세포 자살을 유도한다.

보고서에 따르면 듀폰 연구소의 데이비드 워하이트 박사는 이산화티타늄, 탄소분말, 디젤입자 등 몇 가지 나노입자는 크기가 줄어들수록 염증을 유발하는 등 독성이 강해졌다고 밝혔다.

실제로 미국항공우주국(NASA)과 텍사스대 연구팀이 탄소나노튜브를 용액 형태로 쥐의 허파에 주입하고 90일 동안 관찰한 결과 높은 독성이 나타났다. 미국 로체스터대 의대 권터 오베르되스터 교수도 지름 20nm의 미세입자를 쥐에게 15분 동안 호흡하게 한 결과 4시간 내에 죽었다. 그러나 6배 이상 크게 만든 입자를 흡입시켰을 때는 쥐가 죽지 않았다.

나노입자는 더 큰 물질에 비해 세포나 몸속 기관을 자유롭게 뚫고 지나간다. 대표적인 것이 뇌다. 원래 뇌는 독성 물질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단단한 울타리가 쳐 있다. 그러나 오베르되스터 교수팀이 지름 35nm인 탄소입자를 쥐에 흡입시켜 관찰한 결과 하루 뒤에 뇌의 후각 부위에서 검출됐다. 나노입자는 신경세포를 통해 뇌에 침투한 것으로 보인다. 만일 이 물질이 독성을 갖고 있다면 뇌에 치명적이다.

나노기술 위험성 대비해야

아직 실험결과가 많지 않아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이번 보고서는 나노기술의 밝은 미래뿐만 아니라 위험성도 함께 대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환경 전문가 발버스는 “DDT 등 기술 발전이 환경 파괴를 일으킨 사례는 적지 않다”며 “나노물질을 생산하기 전에 독성 시험을 거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정부가 나노기술에 대한 영향 평가에 400만 달러(약 40억 원)를 쓰는 등 각국이 ‘나노의 두 얼굴’을 조사하고 있다.

테라급나노소자개발사업단 이조원 단장은 “아직 국내에서 관련 연구가 없었던 게 사실”이라며 “하지만 정부 차원에서 나노기술의 안전성 확보를 위한 연구를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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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 만날 수 있을까
2005년 08월 14일 | 글 | 강석하 / 인터넷 과학 통신원 충북의대 기생충학교실 연구원ㆍscattrev@hanmail.net |
 

수천억개의 별을 가진 은하가 수천억개인 점을 생각하면 지구와 유사한 행성이 어딘가에 존재할 가능성은 매우 높은 편이다.
무더운 여름, 잠시 더위와 일을 잊고 시원한 파도소리가 들리는 백사장에 누워 무수한 별들을 바라보는 모습을 떠올려보자. 상상만으로도 설레지 않나. 이런 낭만적인 상상의 연장선에서 누구나 한번쯤 ‘혹시 저 별 어딘가에 누군가 살고 있지 않을까?’하고 생각해봤을 것이다.

지난 달 과학잡지 사이언스가 선정한 향후 25년 내에 맞닥뜨리게 될 과학계의 25가지 문제 중에는 ‘우주에는 우리뿐인가?’라는 문제가 포함돼 있다. 사이언스는 지구 외 행성에 지적인 생명체가 존재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언제 우리가 그들을 만나게 될 지를 생각해야한다고 말한다. 한 술 더 떠 운이 좋으면 25년 내에 외계의 지적 생명체의 흔적을 찾을 지도 모르다고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외계 생명체를 발견하려는 가장 큰 시도는 전파를 통해 외계의 지적인 생명체가 보냈을지 모르는 신호를 찾는 SETI(Search for Extra Terrestrial Intelligence) 프로젝트로 45년전에 시작됐다. 현재까지 특별한 신호가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SETI는 많은 일반인들과 물리학자와 천문학자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생물학자들은 다소 회의적이다.

생물학자들은 외계인의 존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외계 지적 생명체를 발견할 가능성은 다음 두 질문을 통해 접근할 수 있다. ‘외계에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와 ‘우리가 그들과 교신할 수 있는 확률은 얼마나 될까’이다.

외계에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은 과연 얼마나 될까. 일반인에게 ‘외계 생명체’를 말하면 대개 인간과 같은 지적 생명체를 떠올린다. 하지만 생물학자들이 생각하는 ‘외계 생명체’는 자신을 복제하는 능력을 가진 분자 복합체다. 생물학자들은 자신을 복제할 수 있는 생명체가 외계에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과학자들이 화성에 생명체가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할 때는 이런 의미의 생명체를 말한다.

실제 특정 조건에서 분자들이 생명체로 발전할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이 과학자들에 의해 제안됐다. 지구를 예로 들면 생명체가 등장하기에 적합한 상태가 된 것은 38억년전으로 추정되며, 최초의 미생물은 35억년전부터 나타났다. 약 3억년 사이에 생명체가 탄생한 것이다. 따라서 지구와 비슷한 조건의 행성이 많다면 생명체를 잉태한 행성이 존재할 가능성은 충분히 높다.

지구인과는 다르지만 사람과 유사한 형태의 외계인이 등장한 영화 ET의 한장면.
두번째 질문으로 넘어가보자. 우리가 외계인과 교신하려면 외계 생명체가 지능을 갖도록 진화해야 한다. 생명의 출현이 곧 지적인 생명체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일까. 유명한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지적일수록 더 좋다(Smarter is better)"라고 말했다.

그러나 올해 작고한 20세기의 다윈이라 불리는 에른스트 마이어는 높은 지능을 갖는 것이 꼭 유리한 것만은 아니라고 세이건의 주장을 비판했다. 그는 세이건의 말이 옳다면 현재까지 지구상에 출현했던 약 10억 종의 생물들 중에 높은 지능을 갖는 생물이 수백만 종이 돼야 하지 않냐고 반문했다.

또 그는 동물계에서 눈의 진화가 독립적으로 40번 이상 일어났고, 반딧불이와 같은 생물발광의 진화는 독립적으로 26번 이상 일어났다며, 고도의 지능이 눈이나 생물발광처럼 보편적으로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는 특성이라면 지능 역시 다양한 계통에서 여러번 진화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지능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생명체의 보편적 특성이 아니라 아주 특수한 예외에 해당한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뇌는 굉장한 사치품이다. 신생아가 소비하는 에너지의 60%가 뇌에 사용된다. 인간이 어떻게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는 뇌를 갖도록 진화했는지는 현재 진화생물학자들이 골몰하는 문제 중 하나이다.

또한 진화생물학자들은 진화는 어떤 정점을 향해 발전해가는 것이 아니라 단지 환경에 적응해나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애초에 인간처럼 고도의 지능을 갖도록 진화해야할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니고 단지 그렇게 될만한 환경에 놓였기 때문에 현재의 인간이 만들어졌다는 생각이다.

20세기의 다윈 에른스트 마이어 박사
따라서 문명을 이룰 정도의 지능을 갖도록 진화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더욱이 그들이 우리와 교신하려면 전파를 이용해야 하고, 지구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야 하며 적절한 시기에 전파를 보냈어야 한다. 그들이 100년 전까지 전파를 보내다 멸망했다면 우리는 그들의 메시지를 포착할 수 없다.

마이어는 이 모든 확률을 계산해보면 SETI를 통해서 외계인과 교신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고 주장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했던가. 생물학자인 마이어는 여기에 더해 가능성도 없고 실용성도 없는 외계 생명체를 찾는 데에 쓸 돈을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는 열대 우림의 알려지지 않은 다양한 생물들을 연구하는데 써야 한다고 비판했다.

사람들은 외계인의 존재여부에 관심이 높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 ‘우주전쟁’에서 외계인이 잔혹한 살인마로 그려졌다. 반면 외계인을 추종하는 라엘리안이라는 단체도 있다. 우리가 외계인을 만날 가능성이 생물학자들은 희박하다고 얘기하지만 밤하늘의 별을 보며 저 하늘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는 외계인을 상상하는 일까지 막을 순 없다. 한 편의 연애소설처럼 저 하늘 어딘가에서 우리를 애타게 찾고 있는 누군가가 있지 않을까라는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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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5-08-15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주미힌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만나는 것'은 어렵다 해도 단 한번만이라도 '발견' 혹은 '교신' 하는 것은 언젠가 가능하지 않을까 꿈꾸어 봅니다.

현실적으로는 에른스트 마이어 박사의 지적이 맞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SETI에는 돈이 얼마 들지 않는걸로 알고 있거든요.

아레시보 망원경에서 전파를 탐지하는 것은 다른 연구용으로 탐지하는 전파를 곁다리로 얻어서 분석하는 것이고, 자료의 분석은 세계 몇십만명의 개인 컴퓨터를 이용해서 하니까요.
아마 돈은 이런 자료를 보내고 받고 하는 작은 서버 관리비만 들 것 같습니다.
그마저도 비용의 대부분을 일반인들의 기부에 의해 운영되고 있구요.
이정도도 아깝다고 하는 것는 너무 삭막하지 않을까요? ㅜㅡ

헤헤... 개인적으로 SETI 자료 분석에 참가하고 있기 때문에....
정말 교신, 아니 외계 전파를 한번만이라도 수신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라주미힌 2005-08-16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인간의 수명이 100년도 안된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죠.
 

질문

사리가 뭐 돌처럼생긴것가튼데 자세히 간단하게 알기쉽게 아리켜 주세요~

답변

ineedxxxxx (2004-02-22 16:02 작성) 
 
수행을 많이 하신 분의 몸에서 나오는 수행의 결정체 같은 건데요.

이번에 서옹큰스님 다비식때 신비로운 사리출현이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넣지 않고 밀봉해서 묻어둔 항아리에 사리가 출현한 것이죠.

이것은 현대과학으로는 풀기 힘든 신비로운 일인데.
어쩌구 저쩌구...
양의 성질을 가진 수행의 힘이 삼매의 불로 타오르는 다비과정에서 음의 기운을 찾아 들어가게 되고 항아리 안에 있는 물을 만나는 순간, 순식간에 응결되어 명당수 안의 사리로 나타난 것입니다.
어쩌구 저쩌구...

 
 
내용 추가 다른 의견

 
redxxxx
2005-08-14 01:51 화장터 가서 화장하는 사람한테 물어봐라...웃는다...ㅋㅋㅋㅋ
<------------------  너무 현실적이고 시니컬한 흐흐
 
hunxxxxx
2005-08-14 00:48 다른의견  선생님들도 화장하면 사리가 나온다던데... 그래서 저희 학교 쌤이 그러는데 말을 많이 하는 사람들을 화장하면 사리가 나온다더군요 침이랑 관련이 있는건가? =ㅁ=
<---------------- 참 상상력하고는.. 흐흐
 
qkrgxxxxxxxx
2005-08-13 23:21 사리는 요로나 담낭 등의 결석이 아니고요.. 그냥 매장하면 안생기고요... 고온에서 화장할 때 리튬(Li)을 비롯하여 티타튬, 나트륨, 크롬, 마그네슘, 탈슘, 인산, 산화알루미늄, 불소, 산화규소 등이 뭉쳐서 생깁니다....... 화장장의 온도와 원소들의 구성비가 중요합니다....원소에 따라 사리의 색깔 과 크기 형태가 달라 집니다...일부 나라에서 이걸 만들어 유골함에 봉안하는 것이 유행이죠....우리나라도 이 시스템 도입되었습니다.... 가족유골을 사리로 만들어 보관할 수 있는 거죠....
<---------------가장 그럴듯...
 
chuxxxx
2005-08-13 23:20 화장터에서 일반인의 몸에서는 사리가 안나오는 이유는 사리를 추가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ㅡ,.ㅡ;;;
<--------------- ㅎㅎㅎㅎ  언어의 유희를 아는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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