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인권연구가 국제정치나 법학의 부속물로만 여겨졌던 우리의 전통에 비추어볼 때 인권의 발전사뿐 아니라 역사적 현실과의 연관 속에서 인권의 이론과 실제를 실천적으로 서술함으로써 본격적인 인권연구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결코 적지 않다. 특히 옮긴이가 정성스럽게 수집, 편제한 한국의 인권연대기는, 결코 만만하지 않은 질과 양의 책 내용을 정확한 우리말로 옮겨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인권교과서로 승화시켜 놓은 그의 의지와 노력과 함께 우리 인권의 지평을 한 단계 확장하는 너무도 소중한 디딤판이 되고 있다. 혹 북한의 요덕수용소를 향한 인권논쟁이 미국의 관타나모수용소에 내재된 패권주의를 은폐·엄폐하는 이 현실의 답답함을 깨치고자 한다면 누구나 한번쯤은 곰씹어 읽어야 할 책일 듯 싶다.

한상희/건국대 법대 교수

 

인권 개념도 역사의 산물이다. 인권학의 산실로 떠오르고 있는 미국 덴버대 교수인 저자의 야심 찬 저작인 이 책은 동서고금을 가로지르면서 인권사상의 기원과 그 발전 과정을 추적한다.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벨기에 브뤼셀의 유럽국제학교에서 공부한 저자는 자신의 조국이 팔레스타인인들의 인권을 억압하는 현실을 비판하는 인권운동을 펼치면서 인권학의 표준교재로 통하는 ‘인권독본’과 ‘국제주의와 그 배신’ 등을 저술한 실천적 인권학자다.

이 책은 인권의 역사를 전근대-계몽주의-산업혁명시대-세계대전시대-지구화시대로 나눠 살펴본다. 자유 평등 박애 관용의 인권 개념은 모든 전통 문화권 속에 그 맹아를 간직하고 있지만 18세기 서구 계몽주의에서 오늘날의 형태로 본격 발현했다.

계몽주의적 전통에서 자유주의적 1세대 인권(시민적 정치적 권리)의식이 싹텄고 산업혁명시대를 거치면서 사회주의적 2세대 인권(경제적 사회적 권리)의식을 낳았으며 제3세계적 3세대 인권(문화적 권리)의식은 세계대전의 시대를 관통하며 자라났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몇 가지 통념에 도전한다. 우선 과거 현실사회주의 국가에서 인권 침해가 광범위하게 자행된 것은 사실이나 참정권의 확대와 보통선거권의 부여 같은 제1세대 인권이 사회주의 이념 전통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또 1세대와 2세대 인권의식을 18세기 유럽 계몽주의와 그 계승자인 자유주의 및 사회주의의 산물로 바라보는 시각을 비판하면서 20세기 비서구권에서 식민주의에 대항한 투쟁이 큰 역할을 했음을 강조했다.

 

 

 

 

 

 

조선 후기 '입'으로 돈을 버는 사람이 있었다. 책 제목으로 쓰인 '이야기 책 읽어주는 노인'이다. 서울 동문 밖에 살던 그는 책 없이 입으로 국문 패설(민간에 전해지는 이야기)을 읽어주었다. '숙향전''심청전'같은 전기를 주로 애송했다. 문제는 노인이 가장 재미난 대목을 앞에 놓고 입을 다문다는 것. 궁금증을 참지 못한 사람들은 노인에게 다투어 돈을 던져주었다.

"애들과 부녀들은 안타까워 눈물까지 떨군다네/영웅의 성패가 어찌될 건가 손에 땀을 쥐면서./재미나는 대목에서 말을 뚝 그치니/돈 받는 법 묘하구나/누군들 뒷말이 듣고 싶지 않으랴."

TV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 노인은 이른바 지금의 토탈 엔터테이너가 아니었을까. 그의 속이 훤히 보이는 '상술'이 오히려 정겹게 다가온다. 요즘 같은 시절엔 상상도 못할 미담도 있다.

홍씨가 가세가 기운 이씨의 집을 사들였다. 그런데 수리 도중 돈 3000냥이 나왔다. 뜻밖의 횡재다. 그런데 웬걸? 홍씨는 이씨 집에서 나왔으니 돈을 돌려주려 하고, 이씨는 어차피 집을 넘긴 상황이니 새로 나온 돈도 홍씨 것이라고 사양한다.

조선 후기 여항(閭巷) 시인 조수삼(1762~1849)의 시와 글을 묶은 책이다. 여항은 백성들이 사는 거리나 골목을 뜻하는 말. 시는 물론 그림.의학.바둑.거문고 등에 두루 재능이 뛰어났던 조수삼이 19세기 조선 민초들의 삶을 진솔하게 들려준다. 굳이 비유하며 조선시대판 '만인보'쯤 될까. 부패한 왕조, 피폐한 경제 속에서 고단하게 살아갔던 백성들을 따뜻하게 보듬고 있다. 시편으로 돌아보는 19세기 조선 민중 생활사로 봐도 큰 무리가 없다.

박정호 기자 jhlogos@joongang.co.kr

 

 

 

 

 

 

이 책은 현대의 신분 증명이 어디서 유래했고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개괄한다. 이런 작업에 으레 끼어들기 마련인 ‘정체성’에 관한 복잡한 성찰은 없다. 책의 도입부는 “호주머니 속 신분증에서 중세의 흔적을 추적해보는 것이 주제”라고 못 박는다. 저자에 따르면 최첨단 홍채 인식 기술의 뿌리도 사실 중세에 닿아 있다. 안구에 광선을 쏘아 동공 안의 개인적 특성을 판별하는 방식은 이미 르네상스 시대 학자들이 착안했다. 그들은 눈빛으로 개인을 구별하는 연구에 골몰했다.

최초로 인명부를 만든 건 종교계였다. 1215년 ‘고해성사 증명서’가 탄생했는데, 이것이 서류를 통한 신원 확인의 시초가 됐다. 모든 신도가 최소한 1년에 한 번 고해성사를 하고 영성체를 받도록 통제하기 위해서는 기록이 필요했다. 명부와 고해성사 증명서를 대조해 의식을 실천하지 않은 자는 성찬식 참여를 금지했다. 14세기 말에는 군대도 체계적인 인원 관리를 적용했다. 당시 유럽의 군주들은 직접 용병을 기용하지 않고 중개인에게 위탁해 전쟁을 수행했다. 이들 ‘군대 장사꾼’은 병사 수를 부풀려 초과된 급여분을 챙겼다. 이런 꼼수를 막기 위해 고용주는 각 병사에게 신분증을 발급하고 명단을 만들었다. 이 같은 인적 관리는 징집하거나 탈영을 방지하는 데도 막중한 역할을 했다.

군인 같은 특정 계층에서만 적용됐던 신분증 제도가 보편화된 계기는 페스트 창궐이다. 15세기 말 유럽에서는 보균자를 구별하기 위해 세세한 개인정보가 망라된 ‘위생증’이 도입됐다. 사회로부터 버림받지 않으려면 각자는 자신의 건강함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현대와 중세의 신분증명 제도는 사회 구성원에 대한 체계적인 통제란 점에서 비슷하다. 그러나 기록과 통제가 늘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17세기 부유한 관광객들은 여행기에 “그놈의 여권이라는 게 없어도 (뒷돈으로) 이렇게 편히 다닐 수 있네”라고 적으며 거드름을 피웠다. 21세기 한국에서도 전자화된 인적 관리를 비웃듯 부유층 자제들이 병역의무에서 제외되곤 한다. 중세와 현대의 신분 증명은 그 허점까지 닮았다.

심재천 기자 jayshim@segye.com

 

 

 

 

 

 

1923년 창간된 여성잡지 '신여성'을 교육과 국문, 가정교육, 디자인문화이론 등 각기 다른 분야를 전공한 9명의 소장 학자들이 비판적으로 재해석했다.

잡지의 탄생 과정과 편집 구성, 필자, 출판과 유통 등을 꼼꼼하게 정리했으며 게재된 기사와 만평을 통해 여성의 풍속사를 설명했다.

책은 남녀 학생의 풍기문제, 여학생 제복 문제 등을 주제로 한 기사에 대해 "'신여성'은 당시 여학생의 순수가 침해되는 것에 대한 우려와 비난, 대안 제시와 같은 담론을 제출함으로써 역으로 '순수로서의 여학생', 즉 마리아로서의 여학생을 강력히 환기한다"고 분석했다.

저자를 대표해 서울대 교육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한 이희경 씨는 머리말에 "'신여성'은 신여성을 둘러싼 당대의 긴장과 갈등을 매우 첨예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텍스트"라고 적었다.

 

 

 

 

 

‘빅토리아즈 시크릿’은 미국 여성들 사이에 가장 유명한 속옷 브랜드다. 붉은색 실크와 검정 레이스 등 화려한 속옷들은 여성들의 시선을 잡으며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마치 영국 빅토리아 시대 귀부인의 방처럼 꾸며진 탈의실에서 속옷을 입고 거울에 비춰보던 이주은씨는 자신의 내면에 숨어있던 열정이나 욕망을 훔쳐 본 것 같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고 한다.

미술사학자인 그가 저서의 제목을 ‘빅토리아의 비밀’이라고 지은 것은 그때의 시선과 느낌을 영국 빅토리아 미술에서 그대로 느꼈기 때문이다.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는 여성의 순결과 금욕을 강조한 성적으로 가장 엄숙했던 시기다. 하지만 이 시대의 그림에 나오는 여성들에게는 순결하기 보다는 쓸쓸하고 또 관능적이다. 저자는 그 아이러니한 느낌에 주목하고 그림이 담고 있는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은밀한 뒷면을 조심스레 공개한다.
저자는 그림 속에 담겨 있는 사회·문화의 시대상을 꼼꼼하게 읽어내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섞어 생생한 경험처럼 되살려 놓는다. 늘 어렵게만 생각되던 미술사를 쉽고 흥미롭게 살려낸 것은 참 반가운 일이다.

“아름다운 겉모습으로 위장하고 있지만 그 여인들에게는 비밀이 있다. 그 비밀이 궁금해서 그림을 지나쳐버리지 못했다면 그건 이미 그림이 건 마법에 걸려든 것이다”고 저자는 말한다. 아름다운 색감과 신비로운 구도안에 숨겨진 빅토리아 시대의 은밀한 속내를 바라보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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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12-11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기 책 읽어주는 노인, 관심이 무럭무럭..그런데 가격이...;;;

이리스 2005-12-11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저.. 빅토리아 시크릿표 속옷 좋아하는데 ㅡ,.ㅡ

라주미힌 2005-12-11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숍님/ 가격이 문제겠어요. 비숍님 질러주세요.. ㅎㅎ
낡은구두님/ 빅토리아 시크릿 홈페이지 가봤는데... 좋네요. 자주 가봐야겠어요. ㅎㅎ

panda78 2005-12-13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음... 이번 건 꽤... 끌리는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