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들에 대한 근거 없는 믿음을 쫓아가다 보면, 기대했던 만큼의 붕괴를 보답 받게 된다. 피상적인 인식이 투과할 수 없는 영역이 있음에도 그 너머를 상상하는 것은, 상상하는 자의 책임이지 보여진 자에게 전적으로 죄를 묻기엔 억울한 면이 있다. 욕망하는 인간들이 보는 것은 자신의 욕망일 뿐이다. 라캥이 카미유를 보던 시선으로 테레즈를 보게 되면 심각한 오류가 난다. 비슷한 결과를 얻는다 해도 동기는 전혀 엉뚱한 것이므로 상황이 바뀌면 다른 것이 되어버리기 십상이다. 골골한 카미유는 동물적인 로랑의 욕망을 볼 수 없었으며, 굶주린 테레즈의 허기는 그 무엇으로도 채울 태세였기에 욕망의 구도는 지극히 비평형 상태에서 출발한다. 이들의 관계는 이기적 욕망의 먹이사슬 같은 것이다. 욕망은 채울 수 없어야 그대로인 것으로 남는다. 간통은 ‘간간히 통해야’ 하는 것이고, 불륜은 부적절해야 하는 것. 반숙으로 만들었어야 할 것을 완숙으로 완성시켰다는 것이 치명적인 문제였다.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니 공포와 불안, 죄의식이 그 자리를 메운다. 열에너지의 과잉이 급격한 팽창을 불러오고, 결핍으로 소멸하듯 인간은 극단적 상황에서 바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게 된다. 필요에 의해서 관계가 형성되었고, 이기적 욕망으로 유지할 수 있는 것들의 한계는 잔인하게 보인다. 인간 본성의 무엇인가가 걸려있기에 참혹함이 더 하다. 하지만 그렇게 평가를 내리려면 인간 본성의 복잡함을 설명해야만 한다. 욕망의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 합리적일까. 그래도 그것의 끝에서 떨어지는 것이 나을까. 인간에게 무엇을 채워 넣느냐… 무엇으로 채워져 있느냐… 흡사 생체실험 같은 소설이다. 불륜과 살인을 있게 한 기질에 대한 연구가 아니다. 극단적 상황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인간적 성정의 민감한 섬모를 관찰하는 과학자의 시선이 느껴진다. 결국 이 소설은 작가의 욕망의 주물 안에서 태어난 셈이 아닌가. 서문이 가장 적나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