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가 말했다. "인간들은 이미 길들여진 것만 알아요. 그들은 무엇을 알 시간이 없어요.” 밥벌이에 길들여진 인간은 세상을 알 시간이 없다. 욕망은 커져만 가는데 세상에 침식되어 좁아져만 가는 영역에서 만족감을 찾으려니 삶이 고통이 된다. 서브프라임 사태로 한때는 휘청거렸지만, 경제의 장밋빛 전망이 꽃망울을 틔우니까 이전으로 돌아갈 태세다. 부동산 가격은 미친 듯이 오르고, 해고의 자유를 만끽하며 기업들은 노동자의 삶을 위협하고 빼앗고 있다. 땅을 가진 자의 권리는 땅을 빌린 자들의 생에 대한 권리마저도 가져가버린다. 흔하게 벌어지고 있는 일상의 테러에 익숙해지는 것만이 서민적 삶의 덕목이던가. 생태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던 인간세계도 상위 몇 퍼센트의 인간들에 의해 균형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은 수치를 통해 알 수 있다. 포식자에 의해서 개체수가 줄어들고 있다는 것. 대표적인 것이 출산율 저하가 아닐까? 남의 먹잇감으로 살아가게 둘 수 없다. 아니 나조차 버틸 수 없는 이 세상에 어찌 자식에게 이 세상을 물려줄 수 있을까. 인간적 품위를 지킬 수 없는 계급의 인간들은 스스로 개체수를 줄이기 시작했다는 점은 체제의 종말 멀지 않았음을 느끼게 한다. 이론에 따르면 포식자들도 줄어들겠지만, 세계화라는 페러다임을 만들어 놓고 전 세계의 약자들을 먹어 치우고 있으니 당분간은 지속되겠지만…… 너희들의 종말도 멀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놔둘 수는 없다. 인간의 삶에 비해 너무 먼 미래의 일이다. 일단은 살고 볼 일이 아닌가. 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해보자는 것. 우리의 한 발작이 다음 세대의 한 발작을 덜 수 있지는 않을까. 자본의 욕망은 모두의 욕망으로 치환된 지는 오래지만, 그 욕망에 백태클이라도 걸어야 하는 게 우리가 지닌 책임이 아닌가 한다. 욕망의 질을 바꾸던 체제의 상식을 바꾸든 진보는 필연적 운명에 앞서야 한다. 세상을 이해하고 고민하는 방식에 벽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 책에서는 대화를 이어가게끔 하는 친절함과 낮은 시선이 있다. 그것을 통해 삶과 인간에 대한 끈끈한 애정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가 취하고 있는 태도는 어떠한가. 우리의 고민은 계속 되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며, 모두의 것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삶의 정치가 되어 힘이 되었으면 한다. 어린 왕자가 비정규직 왕자로 귀환하였다. 여우와 뱀이 스승이었고, 우주의 여러 별을 돌며 많은 것에 귀를 기울이며 성장하였던 왕자가 다시 우주를 떠돈다.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는 어린 왕자의 오마주가 되어도 어색하지가 않다. 너무 흔해져 버렸어. 세상은 흔해 빠졌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