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에 30대로 보이는 남자 손님과 대판 싸웠다. 싸우면서 깨달았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이런 싸움을 손꼽아 기다려 왔는지를. 나랑 싸웠던 그 남자는 처음에 나에게 '씨발년'이라 했고, 그 다음에는 '법대로 하라'고 했으며, 좀더 지나서는 '법이면 다냐'고 하다가, 그 다음에는 '새파란 것이 어디서 반말이냐'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서로 감정 상하지 말고 좋게 끝내자'며 나를 타일렀다. 그는 감정의 제어가 서툴고 말에는 어떠한 논리도 없는, 한마디로 단순하고 과격한 유형이었지만, 근본적으로 성품은 유순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이 싸움이 너무나 재미없게 끝나버린 결정적인 이유였다. 그가 좀 더 지능적이고 광포했더라면, 아니 말을 하는 데 있어서 최소한의 논리력이라도 갖추었더라면, 싸움은 훨씬 더 흥미진진했을 것이다.

 

나는 솔직히 그가 내 뺨이라도 때려주었으면 싶었다. 만약 내가 뺨을 맞았다면 나는 그 즉시 테이블을 뛰어 넘어가 그에게 덤벼들어 목덜미를 갈기갈기 물어 뜯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그 순간 실로 혼신을 다해 싸울 태세였던 것이다. 싸움이 불러일으키는 흥분과 긴장, 그것이 주는 쾌감은 그만큼 엄청났다. 싸움은 그동안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도 모르게 몽롱한 상태로 늘어져 있던 온몸의 세포들을 하나 하나 흔들어 깨워 주었다. 목에 핏대를 세우며 경찰을 부르겠다고 외치는 순간, 나는 극도의 쾌감 속에서 마치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싸움이 싱겁게 끝나버리자 말할 수 없이 허탈했다. 정말이지 오늘보다 훨씬 더 악랄한 손님을 만나고 싶다. 씨발년 따위보다 몇십 배는 더 강력한 욕을 얻어듣고 싶다. 나의 호전적 본능을 일깨워줄 인간 말종을 만나서 경찰한테 붙잡혀갈 때까지 피 튀기는 육탄전을 벌이고 싶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pjy 2010-08-09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본적으로 성품은 유순한 사람이었다' 요게 싸움을 참으로 허무하게 만들죠--;
스트레스가 많으신가봅니다^^;

수양 2010-08-09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트레스로 인해 나날이 전투적 인간으로 거듭나는 중입니다. 허허
 

일찍이 지혜로운 철학자가 천명하였듯이 우리는 말 할 수 없는 것들에 관해서는 침묵해야만 한다. 침묵은 어쩌면 최소한의 양심이나 예의 같은 게 아닐까. 삶에도 뼈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의 성분은 오로지 말할 수 없는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을 것이리라. 말이라는 것은 대저 얼마나 본질로부터 먼 곳에 있는가. 그것은 얼마나 남루하고 곤궁한가. 우리는 묵직한 짐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사막을 횡단하는 한 마리 낙타처럼 육중한 말들 속에 파묻혀 끝끝내 고독하리라. 무수한 말들은 모조리 실패할 운명이다. 세계의 모든 비밀은 말 속에서 더욱 더 견고하게 은폐될 것이므로. 말이 알리바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체념 속에서 한동안 아무 말도 못 쓰고 그냥 살았다. 무슨 말을 해도 그것은 결국 내 삶의 언저리에서 변죽만 울려댈 것이었다. 그러나 말문이 막혀버린 세헤라자데에게는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임을 이제는 알겠다.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결코 말해질 수 없는 것들 속에서 끊임없이 자맥질을 하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다. 굴러 떨어질 바위를 열심히 밀어올리는 시지푸스처럼, 절망적이고도 힘차게 무슨 말이든 지껄여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쓴다, 다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우리들의 진화 - 2010 제17회 김준성문학상 수상작 문학과지성 시인선 362
이근화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한 계절에 한 번씩 두통이 오고 두 계절에 한 번씩 이를 뽑는 것
텅 빈 미소와 다정한 주름이 상관하는 내 인생!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나를 사랑한 개가 있고 나를 몰라보는 개가 있어
하얗게 비듬을 떨어뜨리며 먼저 죽어가는 개를 위해
뜨거운 수프를 끓이기, 안녕 겨울
푸른 별들이 꼬리를 흔들며 내게로 달려오고
그 별이 머리 위에 빛날 때 가방을 잃어버렸지
가방아 내 가방아 낡은 침대 옆에 책상 밑에
쭈글쭈글한 신생아처럼 다시 태어날 가방들
어깨가 기울어지도록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아직 건너보지 못한 교각들 아직 던져보지 못한 돌멩이들
아직도 취해 보지 못한 무수히 많은 자세로 새롭게 웃고 싶어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中에서 

 
   

시인은 자기 인생이 마음에 든다고 말하지만, 이 말이 마냥 명랑하게 들리지만은 않는다. "텅 빈 미소"와 "다정한 주름"과 "기울어진 어깨"로 선언하는 긍정이기에. 결코 쉽지 않은 긍정일 테다. 비감을 품었지만 그렇다고 자조적이지도 않은, 수굿한 자세로 담담하게 선언하는 이런 긍정이 어떻게 쉬울 수 있을까. 쉽지 않지만 나도 따라서 말해볼까. 나도 내 인생이 마음에 든다고. 늘어나는 체중과 변변찮은 통장 잔고와 못 갚은 이자처럼 불어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도 내 인생이 마음에 든...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6
프란츠 파농 지음, 남경태 옮김 / 그린비 / 201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폭력은 흔히 악으로 규정된다. 박애정신과 시민의식을 갖춘 사람들은 비폭력 평화주의만이 갈등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도라고 말한다. 이런 와중에 폭력을 선동하는 무리들은 언제나 극단주의자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경계와 비난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모든 도덕 판단이 그러하듯 폭력이 악이라는 테제 역시 특정한 계보 속에서 산출된 명제일 뿐이다. 그리고 이 계보는 지극히 '정치적'이다. 폭력의 종류에도 여러 가지가 있으며, 그중에는 분명 ‘옹호해야 할 폭력’이 있다. 폭력이 악이라는 테제는 이런 폭력의 가치마저 폄하하고 부정하게 만든다. 

옹호해야 할 폭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억압받는 소수자가 행하는 폭력이다. 소수자가 저지르는 폭력은 강자가 자기 보존과 확장을 위해 수행하는 폭력과는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강자의 폭력이 생명욕동에서 비롯하는 유기체적 성장의 수단이라면, 소수자의 그것은 온통 죽음욕동으로 들끓는 폭력이다. 소수자의 폭력은 목숨을 걸었으되 아무런 승산도 전망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폭력이다. 극한의 절망 속에서 분투하는, 처절한 자멸의 폭력인 것이다.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을 이끌었던 프란츠 파농은 착취당하는 원주민이 식민지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 극단적인 폭력투쟁 뿐이라고 강변한다. 그는 폭력의 행사가 다양한 부족의 원주민을 한 덩어리로 묶어주며, 각 개인의 의식에 공통의 대의와 민족의 운명, 집단의 역사 같은 관념들을 싹트게 한다고 말한다. 결집된 민중의 폭력을 식민지 해방을 위한 결정적 수단으로 여겼던 파농에게 비폭력 평화주의, 점진적 개혁, 지배국가와의 타협을 외치는 식민 치하의 민족주의 정당은 어디까지나 ‘자유를 누린다고 착각하는 노예계급’에 불과했다. 민족주의 정당은 겉으로는 평화를 부르짖으면서 실제로는 착취국의 정치 세력과 은밀하게 결탁하여 식민 체제를 영속화했기 때문이다. 

1961년 이 책의 서문을 쓴 사르트르는 알제리 독립전쟁 당시 알제리민족해방전선(FLN)을 지지했던 프랑스의 유일한 지식인이었다. 그는 식민 치하에서 착취당하는 소수자 계급의 극단적 폭력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을 재창조하는 과정이다. (...) 부드러움으로 폭력의 흔적을 지워버릴 수는 없다. 오직 폭력 자체만이 폭력을 부술 수 있는 것이다. 원주민은 무력으로 이주민을 몰아냄으로써 자신의 식민지 노이로제를 치료한다. 분노가 들끓을 때 그는 잃어버린 순수함을 되찾으며, 자기 자신으로 돌아와서 자신의 자아를 스스로 창조한다. (...) 반역의 무기는[즉, 폭력은] 그가 인간임을 증명하는 증거다. -p.36 <1961년판 서문 中에서>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알제리 원주민들이 보여준 극단적인 무력투쟁은 정당방위로서의 폭력도 아니고, 정당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폭력도 아니었다. 그들의 폭력은 도덕이나 정의의 범주를 초월한 영역에 있었다. 그들의 폭력은 ‘존재론적’이었다. 그들은 폭력을 통해 실존하는 인간이 되었던 것이다. 

인간은 궁지에 몰렸을 때 폭력적으로 돌변한다. 궁지에 몰린 인간이 보여주는 ‘너 죽고 나 죽자’ 식의 폭력, 그것은 일종의 자해다. 자해는 자기를 파괴하는 행동이지만, 한편으로는 죽음욕동의 분출 속에서 자기의 실존을 확인하는 행동이기도 하다. 인간을 인간으로서 실존하게 하는 폭력,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폭력, 자멸 속에서 생의 감각을 느끼는 데 소용되는 폭력. 과연 이러한 폭력을 ‘악’이라 규정할 수 있을까. 만약 이것이 '악'이라면, 자유와 평화와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이러한 '악'을 타도해야 한다고 호들갑을 떠는, 그럼으로써 자신들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교묘한 정치적 제스처는 어떠한가. 그것이야말로 더 끔찍한 ‘악'이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요즘에 케이블 채널 QTV에서 하는 '순정녀'라는 오락프로를 거의 한 회도 안 빼먹고 열광적으로 시청하고 있다. 이 프로에서는 매 회 열 명 남짓한 여자 연예인들이 대거 출연해서 서로 순위를 정한다. 그때그때 달라지는 순위의 기준은 대략 이런 식이다. 가장 가식적일 것 같은 여자, 가장 뒷담화 심할 것 같은 여자, 가장 남자를 밝힐 것 같은 여자 기타 등등. 순위를 정하는 과정은 언제나 흥미진진한데,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인신공격성 발언이 쉴새없이 터져나오기 때문이다.

최근 이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한 여자 연예인이 방송 도중 성희롱에 가까운 막말을 해서 인터넷이 잠깐 들썩였다. 사람들은 그녀가 내뱉은 원색적인 막말에 대해 비난을 쏟아부었고 그녀는 졸지에 인간 말종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그녀를 도덕의 잣대로 심판하기보다 차라리 그녀의 막말에 더없이 환호하는 편이 우리에게 있어서는 좀 더 자연스러운 행동일 것 같다. 사실 비난했던 사람들 역시 이미 충분히 즐거움을 향유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방식으로 막말의 즐거움을 향유한 셈이다. 비난은 즐거움의 우회적 표현이다. 어쩌면 비열한 표현인지도 모른다.  

내가 이 프로를 좋아하는 까닭은 굉장히 잔인하기 때문이다. 이 프로는 고대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이루어졌던 검투사들의 경기를 연상케 한다.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피 튀기고 싸우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환호했던 당시의 로마 시민들과 오늘날 나를 비롯한 QTV 순정녀 시청자들의 궁극적 차이가 무엇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순정녀 출연자들은 매 회 방송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처참한 막말을 내뱉으며 만신창이가 된다. 우리는 그들의 공멸에 환호하고, 그들은 만신창이가 된 대가로 출연료를 지급받는다. 아마도 그 옛날 로마 콜로세움에서 목숨을 걸고 싸워 이긴 검투사들이 받았던 급료와 비슷한 수준일 것 같다. 방송을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순정녀 출연자들은 언제나 씩씩하고 용감하다. 그들은 존재론적 비애마저도 쿨하게 헤쳐 나간다. 검투사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