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각대장 존 비룡소의 그림동화 6
존 버닝햄 지음, 박상희 옮김 / 비룡소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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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은 아침 일찍 등교하는 부지런한 아이지만, 이상하게도 학교 가는 길목에서 홍수를 만나기도 하고 짐승의 습격을 받기도 해서 어쩔 수 없이 매번 지각을 한다. 선생님은 언제나 잔뜩 화난 얼굴로 반성문을 써오라고 명령한다. 이 동네에 홍수나 짐승의 습격 따위 희한한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야단치면서.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은 수업 도중 거대한 원숭이에게 붙들려 공중에 매달리고, 어서 좀 구해달라며 울부짖는 선생님을 향해 존은 ‘이 동네에 저런 거대한 원숭이는 없다’고 대꾸하고 유유히 집으로 가버린다. 그리고 다음 날, 모든 걸 체념한 사람 특유의 의연한 자세로 또 다시 등교하는 존.
 
존이 거짓말을 한 것이라면 선생님의 원숭이도 거짓말이었을 터. 저마다의 진실은 언제나 저마다에게만 절박한 진실일 뿐, 우리는 입장이 다른 타자 앞에서는 끝내 거짓말쟁이일 뿐이다. 그 간극이 때로는 너무나 도저해서, 원숭이 손에 대롱대롱 매달린 선생님만큼이나 섧다. 존이 가버리고 선생님은 눈물을 흘렸을까. 한없이 우울한 색채로 그려진 등굣길과 몹시도 건조한 문체 때문에 자꾸만 잔상이 아른대는 야릇한 그림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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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 선사시대부터 중세까지, 개정판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아르놀트 하우저 지음, 백낙청 외 옮김 / 창비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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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놀트 하우저는 예술사를 자연주의와 형식주의가 대립해온 지난한 과정으로 보고 있다. 이 대립은 철학적으로는 유명론과 실재론, 정치적으로는 진보주의와 보수주의, 종교적으로는 현세적인지 내세적인지 하는 경향, 사회적으로는 상업이 발달하거나 자유가 허용되는 정도와도 맥을 같이 한다. 이 책에서는
 
(1)추상 개념이 전혀 없었던 구석기 시기의 사실적인 표현주의가 신석기 시대에 이르러 기하학적인 모습으로 양식화되고, 통일적 조직과 피안의 세계관이 발달했던 이집트 전제왕권 시기에 이르러 극도로 추상화 되는 경향(이집트에서도 왕권의 흥망에 따라 자연주의적인 경향이 간혹 나타나기도 하지만) 자연주의양식으로 발전하기까지. (2)크리티섬의 자유분방했던 예술사조가 그리스 문명의 발달과 함께 이집트의 영향을 받아 딱딱한 아르케익 양식으로 변모하고, 페르시아 전쟁 이후에는 보다 자유롭고 웅장하게 발전하여 이윽고 문명의 전성기 시절 우미양식을 거쳐 헬레니즘 시대에 이르러 그 정점을 찍기까지. (3)로마문명이 쇠퇴하고 그리스도교 시대와 함께 시작된 극도로 추상화된 양식이 (프랑크 왕국 카롤링거 왕조 시기에 잠시 절충주의적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가장 ‘중세적’이었던 교부철학의 시대에 비자연주의, 형식주의, 기능적인 특징을 지닌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일관하다가, 로마네스크 후기에 이르러 스콜라철학의 발달과 궤를 맞춰 점차 역동적인 모습을 띄더니, 11세기 이후 도시와 상업이 서서히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정신주와 현세긍정적인 감각주의가 교착된 고딕양식으로 발전하기까지(번호는 내맘대로 매김)

를 죽 훑고 있다. 선사시대에서 중세 이후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시대마다 조형예술가의 사회적 입지가 약간씩 달랐다는 점, 같은 예술가라도 문인과 조형예술가의 사회적 입지의 차이가 매우 컸다는 점은 흥미로운 대목. 즉, 선사시대의 조형예술가는 일종의 특수능력보유자로서 나름의 대우를 받다가, 노동을 천시했던 그리스시대에는(시인의 원조격인 소피스트들이 당대에 받던 대우와는 달리) 굉장히 무시당했다가, 헬레니즘 시기에는 플로티노스 사상의 유행으로 일시적으로 쬐끔 천재 대우를 받기도 하지만, 중세 후기에 이르러 개인 공방을 차리고 예술품을 독자적으로 주문 생산할 때까지도 여전히 보잘 것 없었다는 것. 천재 대접은 르네상스기에 이르러야 비로소 이뤄지는데, 아놀드 하우저는 이런 현상을 ‘육체노동을 천시하는 체면 의식’의 소산으로 보고 있다.

한편, 민족대이동시대 및 영웅시대에 처음으로 등장한 시인들은 대부분 무사나 왕의 측근이었을 것이라고. 물론 이들은 후에 왕궁 내에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화되고 비정규직들은 방랑시인으로 전락하기도 하면서 대중 사이로 스며들게 된다. 권력층에서 나온 예술가가 시인이었다면, 민중이 배출한 최초의 예술가는 미무스(마임)인데, 말하자면 이 둘이 문학의 원류를 형성한 셈이다.

중세만의 독특한 계급인 기사 집단에 대한 부분(p.273)도 흥미롭다. 이들은 말하자면 원래 귀족의 딱까리였다가 귀족으로 승격된 부류인데 기사도 정신이라는 것은 사실 졸부들이 졸부 티 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갓 귀족된 자’의 극도로 ‘오바’하는 정신이었던 것. “기사의 계급적 이상, 귀족의 계급의식, 계급적 이데올로기는 이때부터 비로소, 그것도 바로 기사계급에 의하여 형성”되었다는 점, 노블리스 오블리주 문화도 사실은 이 기사도 정신에서 비롯한 것이었다는 점은 역사가 보여주는 조크라고 해야 할까. 체면과 절도, 인내와 극기, 충성과 명예 추구 등 온갖 영웅적인 덕목을 고수하던 기사계급이 경제적 합리주의, 영리추구, 계산과 절약과 흥정을 삶의 모토로 여기는 상인 계급에게 맥없이 나가 떨어지는 모습은 구한말 몰락의 길을 걷던 양반들의 처지와 영락없이 똑같다.

어찌되었든 이 기사계급으로 인해 중세만의 독특한 궁정문학인 기사도 문학이 생겨나게 되는데, “감정의 섬세성과 내면성, 사랑하는 사나이가 그 사랑의 대상인 여성을 생각할 때마다 갖는 경건한 마음, 끝나는 바가 없고 채워지지 않으며 또 한계를 지을 수 없기 때문에 채워질 수도 없는 사모의 정”의 끝장(!)을 보여주는, 그야말로 로맨스 문학의 원류인 기사도 문학에 대한 분석 또한 흥미롭다. 사회학자들에 따르면, 이 문학이 보여주는 “궁정적, 기사적 연애관은 정치적인 주종관계가 대(對)여성에 대한 관계로 옮겨간 것”이라고. 연애의 봉사는 곧 주군에의 봉사의 모방이며, 일종의 “정치 찬가”라는 것이다. 이와 함께 “제후나 호족들이 전쟁에 몰두하여 종종 궁정이나 성을 장기간 비울 수밖에 없었고, 그의 부재기간에 부인이 군주의 권력을 행사하는” 상황에서 궁정에서 봉사하는 시인들이 권력층 여성의 구미를 충족시키기 위해 (마치 여성들의 신데렐라 판타지에 전적으로 부응하는 한국드라마처럼) 기사 캐릭터를 그런 식으로 더 이상화시켰다는 것이다.

저자는 여기서 더 나아가 기사도 문학의 기저에 깔린 (어찌보면 상당히 노골적인) 성적 요소를 읽어내면서, 이 문학의 저자들인 기사출신 시인의 사회적 성향을 주목한다. 즉 기사도 문학이야말로 교회의 금욕적인 계명에 대해 신흥귀족이 보여주는 반항의 한 산물이며, 인습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분방한 그들의 사고방식이 여실히 표현된 문학이라는 것. “기사계급의 연애처럼 남의 부인에게 성적으로 쏠려 있는 심리적 메커니즘이라는가 그러한 감정이 그것을 자유로이 나타낼 수 있음에 따라 더욱 더 고조된다는 현상은 종전의 종교적, 사회적 터부의 위력이 쇠퇴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가진 신흥귀족의 등장에 의해 성적 감정이 마음껏 발휘될 수 있는 터전이 미리 마련되어 있지 않았더라면 실현될 수 없었을 것이다. -p.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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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라는 뼈 문학과지성 시인선 369
김소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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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숭깊고 고아하다. 오른쪽 귀퉁이를 하나 둘 접다보니 이내 그쪽만 뚱뚱해져 버리고 말았다. 시는 물론이고 뒷부분에 신형철이 쓴 해설까지도 곱다. 이런 시집을 읽어놓고 그저 곱다는 말밖에 못하는 나의 무능이 답답하고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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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비평 146호 - 2009.겨울
창작과비평 편집부 엮음 / 창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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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창비신인상 당선작 가운데 진은영 시에 대한 평론이 있었는데, 얼마 전 진은영의 <우리는 매일매일>을 갸우뚱하며 읽었던 나로서는 간지럽던 부위가 시원해지는 평론이었다. 진은영의 시 <아름답다>에서 이미지의 기저에 배어 있는 언캐니한 느낌에 대한 발견, <청춘3>이 정치적 의미로 확장되어 읽힐 수도 있다는 것, <눈의 여왕>에서 ‘피 묻은 자줏빛 살덩이’라는 구절의 해석 등은 이 글을 읽으며 얻은 수확이다. 좋은 평론은 시집을 다시 뒤적여보게 하는구나.  

이 글에 따르면, 진은영의 시는 "시어의 지시성을 의도적으로 회피함으로써 의미의 가독성을 경계하고 특정한 메시지를 지닌 언표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시적 발화를 수행"하고 있다는 것. 그녀의 시는 그림으로 치면 구상회화가 아니라 비구상 꼴라주이며, 이 꼴라주 속에서 불화하는 이미지들의 고유한 배치가 때로 언캐니한 느낌을 만들어 내어 "단어가 환기하는 익숙한 의미체계에 불편하고 이질적인 느낌을 전달"한다는 것.  

그러고 보면 익숙한 의미체계에 종속되어 있던 이미지들을 방생하고 온존하게 독립시키는 일이 진은영 시의 주된 작업일 수도 있겠다. 그녀의 시를 읽으면서 받았던 인상, 그러니까 두 눈이 핑핑 돌면서 잠시 환각 상태에 빠졌다가 그만 노곤해지고 결국엔 공허해져 버리는 경험(?)을, 나는 그저 이미지의 인플레이션과 그로 인해 상대적으로 빈곤해져버린 의미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평론을 읽고 나니 진은영 시에 대한 그간의 내 느낌들이 피상적 독해에서 비롯되었던 건 아니었나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진은영에게 시의 유토피아란 아마도 감성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이 서로를 투신하여 ‘미적으로’ 결합하는 상상일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감성과 난해한 문법으로 무장하는 젊은 시인들의 지형 안에서 그 상상의 영역은 지극히 빈곤해 보이며, 때문에 그녀의 곤경과 고투는 충분히 격렬한 것이 된다." -p.315 

<우리는 매일매일>을 읽으면서, 흡사 포탄처럼 쏟아지던 무수한 이미지들을 받아내느라 시각적 피로감을 겪긴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를 읽는 내내 나는 마치 기백이 넘치는 명랑한 이웃집 언니의 목소리를 듣는 것 같았는데, 이 건강하고 씩씩한 기백이야말로 "격렬한 고투"의 추진력이자 진은영 시의 미덕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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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동아리 사람들끼리 암실을 빌려 사진 작업을 했던 적이 있다. 자궁 같던 암실에서 흑백 필름을 현상하며 느꼈던 흥분과 설렘을, 아직도 나는 두근대는 추억으로 간직하고 산다. 현상액에 인화지를 띄우고 가만가만 흔들면 낮에 찍었던 풍경들이 아스라이 떠오르기 시작하는 것인데, 그때의 벅차오름을 어떻게 필설로 형언할 수 있을까. 상(像)이 꽃처럼 피어나던 그 마법 같은 현현의 순간을.

 

시도 그렇게 오는 시가 있다. 처음엔 아무 것도 안 보이지만 곰곰이 있으면 문득 꽃처럼 피어나는 시. 그래서 어쩔 줄 놀라 두 눈 비비고 다시 들여다보게 되는, 그런 시. 쉬운 시가 재미없는 까닭은 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꽃도 사진도 시도 피어나는 순간이 가장 눈부시다. 피어나는 순간의 시가 가장 아름답지만, 필듯 말듯 하는 순간의 시도 애틋하다. 잡힐 듯하다 놓칠 때마다 정수리가 자꾸만 간지럽다. 난해한 시가 꼭 싫지만은 않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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