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리영희, 임헌영 대담 / 한길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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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도 나오는 얘기지만, 선생의 지식인으로서의 태도는 여러 가지로 루쉰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독재 정권에 우호적이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맹목적으로 민중계급을 지지하지도 않는다. 책장에 꽂힌 책(가족 중 누가 구입한 것인지는 모르겠다)을 우연히 읽어본 건데 아무래도 독서의 순서가 잘못 된 듯. 리영희 선생의 저작들을 읽어보고 나서야 이 책에 대해 무어라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

이런 상황에서 ‘친미 반공 군부 독재’ 체제 수립을 위해 나온 이데올로기가 바로 ‘로스토 독재개발이론’입니다. (...) 케네디 대통령의 후진 동맹국가 운영정책의 기둥으로 채택된 거요. 이는 바로 후진 미개발 사회에서의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친미국적 군부의 강력한 독재체제로 우선 사회적 통합과 안정을 실현한 후, 그 바탕 위에서 후진 사회적 부정 부패들을 척결 개혁하면서 경제건설과 정치적 안정을 달성하는 개발이론이지. 이 이론이 그때 남한에 적용되어, 박정희어 5.16 쿠테타가 표방한 강력한 반공이념 아래에서 경제개발이라는 국가정책으로 채택된 것이지요. (...) 케네디가 채택한 이 로스토 독재개발이론은 그 집행주체를 군대로 설정한 것이 특징이에요. (...) 박정희 정권의 일정한 물질적 성과를 마치 박정희 대통령의 뛰어난 정치적 지도력처럼 착각하는 사람들도 꽤 많은데, 사실은 이상과 같은 미국의 세계적 체제경쟁 배경 때문이었다는 국제정치를 알 필요가 있어요.(295)

우리가 경험했고, 또 경험하고 있는 온갖 성격과 형태의 사회에서, 오랜 체험과 그것으로 얻어진 예지로써 이제 내릴 수 있는 한 가지 결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자유와 평등은 동등하고 동격의 가치를 지닌 요소이지만, 집단적 인간의 행복 추구의 실천적 순서로서는 ‘자유’가 ‘평등’ 앞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 자유는 ‘인간’ 생명체의 원초적 본성이고, 평등은 개개인의 집단적 생존이 형성된 뒤에 생명이 요구하는 ‘추후적, 사회적 조건’이라고 생각해요.(523)

자기 나름의 문제의식이나 분석방식 없이 남의 이론을 빌려서 자기의 권위로 이용하는 작태를 나는 멸시해요. 내 글에는 누구는 이렇게 말했다는 식이 없어. 정치이론도 사회비평도 다각도로 교차검증한 다음에 일단 소화하고, 내 머릿속에서 내 것으로 만들고, 충분히 반죽해서 자신의 누룩을 가미해서 발효시켜서, 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 나는 현학적인 것을 제일 싫어하는데, 그런 현학적인 글을 쓰는 사람들은 그 인용한 누구의 이름에 자기를 동일시하려는 허영에서 출발해요. 자기의 지식이 돼버린 것은 굳이 누구의 것이라고 할 수 없어요. 대신 뼈를 깎는 노력을 통한 철저한 ‘자기화’가 필요하지.(549)

1980년대 후반에 우리나라의 젊은 투사들 사이에서 드러났던 현실대응에 대해서는 내가 공감할 수 있는 영역이 별로 없었어. 나는 그쪽에 대해서, 어떤 의미에서는 냉담했다고 그럴까. 그것이 우리 전체가 직면하고 있는 역사적 단계에서 해결해야 할 구체적인 문제를 극복하는 데 오히려 전력을 분산, 소모하지 않을까 우려했어요. (...) 세계의 정치개혁운동사에서, 어느 나라의 경우에나 큰 공통점이 있어요. 즉, 우익은 이권으로 뭉치고 좌익은 이념으로 모이지만, 동시에 우익은 이권분배의 크기로 분열하고 좌익은 이념을 지나치게 정밀화, 세밀화하는 ‘작음’의 고질적 아집 때문에 망한다는 역사적 경험이에요.(625)

자본주의가 앓는 사회적 암을 치유하는 데 사회주의라는 항생제가 필수적입니다. (...) 사회주의가 없는 자본주의는 부패, 불법, 부정, 타락, 빈부격차, 폭력, 범죄, 잔인, 인간소외 등을 낳게 마련이에요. 그것들은 자본주의의 ‘본태성 질병’이에요. 어쩔 수 없어요. 사회주의의 인간중시적 가치관만이 그러한 자본주의의 반인간적 측면을 방지하고 보완하는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본주의의 질병이 그 제도의 골수에까지 심화하여 제도 자체가 붕괴하는 위험을 어느 정도 선에서 예방하고 존속하기 위해서는, 또 그렇기를 원한다면 사회주의가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이지요. 나는 우선 지난 300~400년 사이에 인류의 발전을 이루어왔던 제도의 변화를 바라보면서, 그래도 상대적으로 바람직한 것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적절한 배합이라고 생각합니다.(685)

나의 결론은 인간은 물질적 요소로 존재하는 동물이니까 자본주의적 요소로 말미암은 필연적인 비인간화적 결과를 5할 정도의 선에서 인정하고,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인간성 파괴의 측면을 보완하기 위해 게마인샤프트적 사회주의적 요소를 5할 정도 융합하는 방식으로 사회민주주의적 체제가 현실적으로는 결함과 약점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인류사회의 현 발전단계에서는 가장 낫고, 사회주의 없는 미국식 체제보다 우월하다고 확신해요. (...) 우리는 아무리 희구해도 이미 먼 옛날에 인류의 사회적 형태로 지나온 ‘게마인샤프트’(물질적 이해관계가 아니라 인간적 유대가 기본원리인 공동체)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 ‘게젤샤프트’(서로의 이해관계의 계산을 매개로 이익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사회)와 적절히 배합한 인간 생활 형태를 미래의 상으로 그려볼 수밖에 없겠지요.(687)

198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이 나라와 사회에서 일정한 선구적 역할을 해온 것이 사실이에요. 하지만 광주민주항쟁 뒤에는 우리 대중의 의식이 급진전했고, 국민생활과 민족문제의 국가적 위기, 사회적 부조리 전반에 대한 지식인, 청년, 대학생, 노동자들의 문제의식과 인식능력의 수준이 나를 뛰어넘는 감이 있을 만큼 발전했어요. 60~80년대에 걸친 나의 글과 책과 말 그리고 나의 행동으로 계몽되고 ‘의식화’된 후배와 후학들의 역량이 놀라울 만큼 커졌어요. 내가 할 역할은 다 했고, 남은 역할은 내가 변치 않고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있어주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이 나라, 사회의 변화와 진전을 지켜보면서, 혹시 요구가 있으면 몇 마디를 해주는 것으로 족하지. “족한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는 성현의 가르침은 지금 바로 나에게 한 말이라고 생각하게 됐어요.(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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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집회 때 일이다. 자정을 넘어서면서 명박산성 앞의 시위는 점점 더 과격해지고 있었다. 시위대 중 앞쪽에 포진해 있던 일부 무리가 산성을 넘어서 청와대로 돌격하자고 선동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선동과 동시에 마치 짜여진 각본처럼 어디선가 정체모를 대형 스티로폼 벽돌들이 속속 등장했다. 대체 누구의 아이디어로 동원된 것인지 명박산성 못지 않게 궁금해지는 스티로폼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위대 앞의 무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스티로폼 벽돌을 하나 둘 쌓아올려 명박산성을 뛰어넘을 계단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위 행렬의 꽁무니에 있던 사람들은 반쯤은 시위를 즐기러 나온 방관적인 무리들이었기 때문에 시위가 과격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더군다나 청와대로 진입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그들은 험악한 표정으로 스티로폼 벽돌을 치우라고 난리였다. 갑자기 나타난 스티로폼 벽돌로 인해 '산성을 뛰어넘을 것이냐, 말 것이냐', '스티로폼을 치워라, 말아라', '청와대로 돌진하자, 말자' 하는 의견 대립이 첨예해지면서 시위대는 돌연 난장판이 되어가고 있었다.

명박산성 앞의 시위 무리가 내분으로 아수라가 되어가는 동안, 시위대 뒤켠에서는 퍽 대조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긴 머리를 풀어헤친 청년들이 북치고 장구치며 노래를 불러댔고, 한쪽에선 통닭을 시켜먹는 아저씨들도 있었다. 차량 운행이 통제된 거리 곳곳에는 빈 소주병들이 심심찮게 굴러 다녔다. 열에 받쳐 악다구니를 질러대는 시위대 전방의 무리들에 비하면, 후방에 포진해 있던 사람들은 상당히 얼빠지고 심드렁한 상태였는데, 그러면서도 그들은 내심 뭔가 즐거운 기색이었다. 나는 문득 명박산성 바로 앞의 과격한 시위대 무리가 후방의 아나키 사회를 수호하기 위해 정부와 격전을 벌이는 최전방의 투사들처럼 생각되었다. 

명박산성을 뛰어넘어 청와대로 진격하는 게 대체 미국산 쇠고기랑 무슨 상관이 있는지 나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스티로폼까지 준비했던 그 과격한 정치 조직은 대체 청와대까지 쳐들어가서 뭘하려고 했던 걸까. 이명박 볼기라도 때리려는 계획이었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는 당시에 어쨌든 산성을 넘자는 사람들을 지지하는 쪽이었다. 순전히 그건 아나키적 해방 공간이 좀더 확대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이후로도 나는 무질서하고 방만한, 그러면서도 이유없이 달뜨게 되는 집회 특유의 이상야릇한 분위기를 만끽하러 촛불에 몇번 더 참여했었다. 촛불시위 때를 돌이켜보면, 나는 정치적으로 진보도 보수도 아니었다. 나는 그저 불순분자였다. 내가 좀 더 평화를 지향했다는 점만 빼면, 촛불을 핑계로 억눌린 생의 에너지를 분출하고자 닭장차를 때려부쉈던 사람들(분명 이런 자들도 있지 않았을까?)과 나는 심정적으로 완전히 한패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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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2 08: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02 08: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양 2010-09-02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기자들 월급은 나와야 하는데;;;
 
한국문학과 그 적들
조영일 지음 / 비(도서출판b)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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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대학가에서 학생회의 위상이란 아무래도 독재정권 시절과는 판이할 수밖에 없었다. 가령 나와 내 친구들의 경우, 우리는 대체로 학생회 활동에 비참여적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학생회 그룹에 딱히 반감을 가졌거나 냉소적이던 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대단히 관용적으로, 조심스럽게 무관심했다. 무수한 관심사 가운데서도 특히 정의와 대의에 관심이 많은 집단이었던 그들을, 아마도 우리는 일종의 '동아리'처럼 받아들였던 것 같다.

 

이 책을 읽어보면, 90년대 이후 학생회 그룹과 비슷한 위상에 놓여 있는 게 오늘날 한국 문단 문학의 상황인 듯하다. 한때 자신을 수식했던 '대표성'이라는 기의가 얼마간 미끄러져 나가버린, 그래서 이제는 자신의 텅빔을 끊임없이 은폐해야 하는 일만 남은, 한없이 불안한 상태의 기표라는 점에서 이 둘은 처지를 공유한다. 한국문학의 종언을 둘러싸고 벌어진 문단 내부의 여러 논의들은, 문단에 속해있지 않은 외부자의 시선에서 봤을 때조차도 무척 강박적인 인상으로 비춰진다.

 

“우리는 문학이 철학책이나 사회과학서적보다 더 많이 읽히며 영향력을 가졌던 시기를 경험한 바 있다. (...) 그때의 독자구성은 오늘날의 독자구성과는 상당히 달랐다. 상층 엘리트계층은 물론이고 하층 노동자계층도 한국문학의 매우 큰 소비자였다. (..) 그러나 이런 독자들이 모두 떨어져나가고 20~30대 중산층 여성, 여학생, 문학청년만 남은 것이 오늘날의 문학상황이다.” 저자가 말하는 독자구성의 변화는 문학의 장르화(化)와 궤를 같이 한다. 근래에 국내 문예지에 실리는 단편 소설들만 하더라도 다루는 소재나 주제, 서술 기법이 어느 정도 일관되어 있고, 그 일관성이 모여 어떤 독자적인 '풍'을 형성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장르적 스타일이 뚜렷해지고 독자 구성이 협애해져 가는 이러한 상황을 가리켜 문학이 바야흐로 임계지점에 다다른 것으로 진단하며 꼭 개탄하기만 해야 할까. 오히려 이러한 새로운 국면이 보여주는 특징들을 한국 문단 문학의 또 다른 정체성으로 삼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 장르화(化)가 거스를 수 없는 현실이라면,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문단 문학은 대의에 대한 미련을 깨끗하게 버리고 오히려 더욱 더 철저히 특정 독자층을 공략하는 길로 나아가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종점의 징후라면 좋다, 종점으로 돌진해보자. 한국 문학 최후의 수요층인 “2~30대 중산층 여성” 독자의 조심스런(다소 도착적인?) 제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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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파업, 30대 여자들이 결혼하지 않는 이유
위선호.윤단우 지음 / 모요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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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는 현재 30대 중반에 해당하는 70년대생 여성들을 결혼파업 1세대로 보고 있다. 1세대인 70년대생들이 파업의 물꼬를 터놓고, 이후 80년대생들이 어느 정도 환경의 기반을 닦아두면, 90년대생 여성들이 30대 중반이 되었을 즈음에는 독신 문화가 제법 정착되어 있으리라는 게 이 책의 전망이다. 실제로 70년대부터 독신자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던 일본에서는 오늘날 도쿄의 도심지역 30대 여성 미혼율이 50% 정도에 이른다고 한다. 

저자는 "한번 치솟은 미혼율은 쉽게 내려가지 않기 때문에 정책결정자들이 미혼율을 낮출 궁리를 하느니 차라리 미혼율이 계속 높아질 것이라는 가정 아래 정책을 수립하는 편"이 더 현명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한 정책의 모범적인 예로 이 책에서는 프랑스의 '팍스'라는 제도를 소개하고 있다. 팍스는 결혼에 준하는 법률적 보호 장치로, 성인이고 어느 쪽도 결혼 상태가 아니며 자유의사이기만 하면 동성 간에도 이 제도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저자는 팍스가 "약간 느슨한 결혼제도"라기보다는 아예 "프랑스인이 만들어낸 새로운 가족제도" 같다고 말한다. 한편, 일본에도 독신자들이 연령에 관계없이 공동생활을 하는 주택으로 '콜렉티브 하우스'라는 게 있다고. 

모성본능도 번식욕구도 절대적으로 희박한 데다 전형적인 건어물녀인 나로서는 조만간 파업의 선봉에 서게 될 가능성을 결코 배제할 수 없는 것인데, 거동이 불편한 노년이 되었을 때까지도 혼자 살아야 한다면 아무래도 영 자신이 없고, 나와 비슷한 처지의 독신자들과 함께 생활 공동체를 조직해서 살아가는 건 그래도 괜찮을 것 같다. 제도가 문화를 좇아가는 데 십 년 이상이 걸리는 게 현실이므로 내가 파업에 동참하게 되면 아마도 제도의 혜택은 거의 못 받을 것이고, 그나마 문화적 인프라라도 조금이나마 구축되어 있다면 다행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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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y 2010-08-23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미 진상 건어물녀로서^^; 인프라 구축을 쪼콤 바랍니다~

수양 2010-08-23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국건어물연대라도 어서 빨리 생겨야 할텐데요ㅎㅎㅎ
 

논리가 탄탄한 글은 시 만큼이나 아름답게 느껴진다. 라고 쓰고 후회한다. 때를 가리지 않는 이 구제할 수 없는 감상벽을 어찌할 건가. 아마도 내가 비판적 읽기에 취약한 까닭은 논리적인 독해를 해야 할 텍스트조차도 순 유미주의적인 관점에서 감상적으로 소화해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임지현의 <우리 안의 파시즘>도 얼마나 '아름다운 글'이라 여기며 읽었는지. 제발 이제는 사회과학서적들을 그런 방식으로 읽는 태도를 버리고 싶다.  

쓸데없는 감상주의에 빠져드는 것을 배격하기 위해서라도 일부러 시와 그림 따위를 멀리 하고 논리적인 글들을 많이 읽어 나가야지 않을까. (그러나 과연 시를 끊는 게 가능할 지) 사유가 빈곤한 감상주의는 삶을 쉽게 신파로 몰아가고 그 끝에는 언제나 칠흑 같은 정념만이 입을 벌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스피노자도 말했듯이 인간은 냉철한 인식을 통해 비로소 정념의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감상이 배제된 인식, 요즘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게 있다면 오로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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