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수용소에서 - 개정보급판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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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부는 강제수용소에서의 개인적 체험, 후반부는 정신과 의사인 저자가 정립한 로고테라피 이론의 소개로 이루어져 있다. 인상 깊은 것은 저자가 소위 환경결정론을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그 어떤 극한의 억압적 환경 속에서도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자유의지, 즉 인간에게는 언제나 주체적 선택의 자유가 있음을 부단히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우슈비츠에서 아내와 부모를 잃고 여러 수용소를 전전하다 가까스로 살아 돌아온 저자의 이력을 감안할 때 이러한 주장이 갖는 깊이와 울림, 그 호소력은 상당하다.

주체적 선택의 자유에 앞서 저자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으려는 노력이다. 삶의 의미와 목적이란 결코 항구적인 것도, 추상적으로 접근할 만한 어떤 것도 아니다. 대단히 구체적이고 개별적이며, 상황에 따라 가변적이기도 한, 어디까지나 당사자 스스로 강구해 나가야 하는 실존적 주제이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는 니체의 말을 인용하면서 저자는 삶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끊임없는 상기와 믿음이 자신을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게 한 힘이 되었음을 고백한다.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방법으로 저자가 꼽고 있는 세가지 길은 다음과 같다. 첫째,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둘째,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선, 진리, 아름다움, 자연과 문화의 향유)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사랑의 체험). 셋째,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첫 번째는 창조적인 일을 통해 가치를 실현하는 적극적인 삶이다. 두 번째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소극적인 삶이다. 비교 우위를 논할 수 없는, 둘 모두 개별적인 삶 속에서 인간이 이룰 수 있는 훌륭한 성취이다.

하지만 저자가 단연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창조와 즐거움이라는 두 기회가 모두 절멸했을 때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세 번째 길이다. 인간이 시련을 가져다주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그에 대한 자신의 내적 태도를 스스로 결정할 수는 있다. 시련에서 의미를 구할 것인가, 그러니까 자신의 시련을 가치있는 것으로 만듦으로써 외형적인 운명을 초월해 자신의 존재를 높일 것인가. 아니면 시련과 함께 휩쓸려 갈 것인가. 고귀할 것인가 추락할 것인가. 주체적 선택의 자유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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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 읽기 세창명저산책 43
허경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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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푸코의 논의를 나의 용어로 다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푸코는 세 개의 실체로 구성된 초시간적인 ‘주체-대상-인식’이라는 기존의 방식을 ‘주체화 과정-대상화 과정-인식 과정’이라는 세 항이 관계된 동시적 형성 과정으로 바라본다. 또한 시공을 초월한 것으로 가정되는 기존의 ‘실체관’을 부정하고 모든 것이 특정 시공간 안에서 (특정 관계들의 얽힘 안에서) 형성되었다는 관계론적 생성론을 지지한다.” (114쪽)

“분석의 대상은 초역사적인 것으로 가정되는 어떤 누구 혹은 무엇인가의 ‘본질’이 아니라, 그것이 다른 어떤 것이 아닌 바로 그것이 되도록 자기 자신과 대상 그리고 인식을 상호 구성하며 만들어간 ‘동시적•상관적 관계들의 구축•형성 과정’에 관한 분석이다. 따라서 고고학적 분석은 주체와 대상 그리고 이들 사이의 인식 형성과정이며 모두에 대한 역사적•비판적•정치적 분석을 수행한다. 이것이 푸코가 말하는 주체화•대상화•인식론화 과정에 대한 분석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바라보면 -들뢰즈가 <푸코>에서 적절히 지적한 것처럼- 말년의 푸코가 ‘주체화’의 문제에 천착한 것은 대중의 일반적인 오해와 달리 주체로 회귀한 것이 아니라 주체의 형성 과정에 대한 역사적 분석, 곧 주체 형성의 계보학을 수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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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e to Learn: Why Unleashing the Instinct to Play Will Make Our Children Happier, More Self-Reliant, and Better Students for Life (Paperback)
Peter Gray / Basic Books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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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근한 감동과 함께 결코 쉽지 않은 과제를 남겨준 책. 검색해 보니 <언스쿨링>(황기우 옮김, 박영스토리, 2015)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본이 나와있다. 한국의 언스쿨링 모임도 여기저기서 눈에 띈다. 하지만 언스쿨링이라는 것도, 이상만 좇는 낭만주의 실험으로 전락하지 않으려면(자식을 담보로 모험을 할 순 없잖은가), 조직화된 현대사회에서 체계적이고 규모있게 실효성을 가지고 지속되려면, 아이러니한 명칭이지만, 그 취지와 철학에 공감하는 어른들이 적극적으로 기획하고 운영하는 ‘언스쿨링 스쿨’의 형태가 되어야지 않을까. 이 책 5장 서드베리 스쿨의 사례가 좋은 참조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유전적으로 수렵채집인의 습성이 남아있다 하더라도 어쨌든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은 더 이상 수렵채집사회는 아니니. 인류사에서 수렵채집인들은 제대로 된 문명을 건설하는데 실패했고 생존경쟁력 면에서 취약해 결국 도태되었다는 냉엄한 역사적 현실을 간과해서도 안 될 것이다. 잃어버린 원시 자연의 본능과 자발적 놀이의 즐거움을 일깨우면서도 결코 반사회적 방임으로 흐르지 않는, 체제보완형 언스쿨링의 길을 잘 찾아봐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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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Buddhism Is True: The Science and Philosophy of Meditation and Enlightenment (Paperback)
로버트 라이트 / Simon & Schuster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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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진화심리학자의 붓디즘 입문기. 불교 유식사상의 근거를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조명하고 있는 점이 신선하다. 현상을 왜곡하고 번뇌 망상에 사로잡힌 인간이 겪는 일생의 고통은 우리 유전자가 생존과 번식에 성공했기 때문으로, 다시 말해 고통은 생존의 필연적 대가라는 것. 진화심리학 분야에서 최근 지지를 얻고 있는 modular-mind model 이론과 이의 실천적 응용으로서 위빠사나 명상을 주목하고 이 둘을 접목시켜 마음의 생성과 역동을 포착하는 부분, 분산된 집중력에서부터 '혐오'와 같은 강렬한 감정까지도 mind-module의 메커니즘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넓은 의미에서) 약물중독과 같은 충동 조절의 문제로 보고, 만족 보상 기전에 의해 강화되어 왔던 모듈을 RAIN(recognization, acceptance, investigation, nonidentification)을 요체로 하는 위빠사나 수행법을 통해 약화시킴으로써 저항이나 통제와는 다른 차원에서 심리적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는 방법, 외부 세계를 인식하는 데 있어서 자기중심의 감정과 판단, 이야기의 개입을 최소화했을 때 비로소 만물의 연속성을 발견하게 된다는 명상가들의 경험담 등등 반추해볼 만한 대목들이 많다.

프리초프 카프라의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이 현대물리학을 불교의 선사상에 포개어 놓는다면, 이 책은 인간 내면의 최신물리학이라 할 법한 진화심리학을 그리 해보이고 있다. 마찬가지로 양쪽의 세계가 설득력 있게 맞물린다. (정확히는 진화심리학이 불교 철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좋은 발판이 되어준다고 해야겠지만) 도대체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있기라도 한가 싶은, 아니 적어도 그런 막강한 기세로 보이는 진화심리학에 지적 토대를 둔 저자가 학문적 답보상태에 이르러 그 돌파구를 불교 명상수행에서 찾으려 한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여러 심리 실험 데이터, 수련을 쌓은 명상가들과의 문답, 명상 수행 과정에서의 개인적 체험 등을 긴밀하게 교차해 가며 초심자의 시각에서 불교 철학(사성제, 연기설, 무아론, 공사상, 열반 등등)을 들여다 보고 있는 이 책은, (1)근대 서구 과학의 세계관과 사유체계(진화심리학도 결국 이의 산물인 바)에 이미 깊이 길들여져 있는 동시에 (2)어떤 분야든 일단 먼저 책으로 파악하려는 습벽을 떨치질 못하는, 양대 악조건에 놓인 이들에게 희망을 준다. 이런 중생들도 얼마든지 깨달음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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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 2024-07-09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이 책 초반부에 웃기는 한 구절이 있었는데... 붓디즘을 구태여 ‘웨스턴 붓디즘’이라고 칭하면서 마치 동양의 붓디즘이 자연에서 막 채굴한 (질 좋고 안좋은 거 다 섞여있는 벌크한) 원유 같은 것이고 자기네들의 붓디즘은 그걸 고도로 정제한 거라는 식으로 말을 하더라는... ㅎㅎㅎ
 
마키아벨리 어록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8
시오노 나나미 지음, 오정환 옮김 / 한길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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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가 결코 독재자들의 교본일 수 없는 까닭은, 그가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에, 그리고 지도자 개인에게 유해한 것은 끊임없는 탄압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공포와 의혹에 몰아넣는 일이다. 그것은 유해를 넘어 위험하다. 인간은 절망적인 공포에 사로잡히면, 자기 몸을 지키겠다는 생각만으로 광포하고 무모한 반격을 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시민을 함부로 형벌이나 탄압으로 억누르는 어리석은 짓을 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이 안심하고 생활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고, 그들의 마음이 자기 일에만 쏠리도록 해주어야 한다."(정략론 중에서) 그가 독재정치를 위험하게 보는 것은 권력의 남용에서 발생하는 도덕성의 결여라든가 반인도주의적 성격이라든가 등등의 이유 때문은 전혀 아니며, 다만 오로지 그것이 민심의 반발을 야기하여 결과적으로는 광포한 사회적 혼란을 유발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사고방식이야말로 진짜 마키아벨리즘 아닐까.

한편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썼음에도 정체의 문제에 있어서는 기본적으로 공화주의자였단 사실은 다음의 언급에서도 잘 나타난다. "한 개인의 역량에만 의지하는 국가의 생명은 짧다. 제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더라도 그 사람이 죽으면 만사가 끝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선임 지도자의 재능이 승계되는 예는 참으로 드물다. 건전한 국가란 우수한 지도자가 죽은 뒤에도 누가 뒤를 잇든지 그 노선이 계승되어나갈 수 있는 체제가 구축된 국가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정략론 중에서) 그러나 마키아벨리가 군주의 역량에 무게를 두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나는 공화국조차도 원래 개개의 위대한 군주적 기량의 소유자나 조직자의 힘 없이는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하므로, 나의 공화주의적 이상은 처음부터 군주주의적 색채를 띠고 있었는지도 모른다."(서신 중에서) 마키아벨리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정체는 어떤 것이었을까? 현대의 대통령제가 이에 근접하다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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