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엑스트라바간자 [한글자막] - 베르비에 음악제 10주년 기념 콘서트 실황
키신 (Evgeny Kissin) 외 / 소니뮤직(DVD)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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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성과 환희, 황홀한 웃음을 안겨주는 이런 DVD야말로 '소장각'이다. Happy Birthday 변주곡은 너무나 즐거워서 듣다보면 절로 깔깔거리게 된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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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테리적 자아를 지탱하는 것은 공허다. 그들은 거대한 무(無)로 이루어진 사람이다. 마치 신기루처럼 혹은 투명인간처럼,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한, 있으면서도 없는, 존재 자체가 부조리한 사람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어쩌면 유일하게 '없음'을 눈치채버린 사람들인지 모른다. 히스테리는 그것에 대한 형벌인지도.

 

그들은 끊임없이 몰두할 만한 ‘어떤 것’을 찾아내어 그것으로 ‘무’라고 하는 자기를 덮어 씌워버림으로써 간신히 윤곽을 만들어 낸다. 오로지 그 윤곽을 통해 비로소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안심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어떤 것’은 무엇보다도 원대하고 강력해야 한다. 거대한 공허를 완벽하게 덮어 씌워버리기 위해서. 또한 그것은 견고하고 튼튼해야 한다. 쉽게 구멍이 뚫려서는 절대로 안 될 것이다. 그리로 모든 게 다 빨려들어가 버릴 테니까.

 

원대하고 강력하고 견고하고 튼튼한 것. 실로 막강한 것. 그런 게 사랑, 부, 권력, 명예 따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히스테리적 자아한테 그런 것들은 너무 약하다. 그런 것들은 모두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인데 관계라는 건 허물어지기가 너무도 쉬우니까. 그렇다면 히스테리적 자아는 궁극적으로 무엇을 택할까. 그는 진리를 택할 것이다. 진리는 결코 허물어지지 않으니까. 아니, 허물어지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리니까. 그는 아마도 진리 중에서도 가장 형이상학적인 진리- 철학이나 신학에 목 매달게 될 것이다. 사제의 학문에 목 매다는 것이 그가 생을 보전하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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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가에 사로잡히는 일도,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일도 결정적으로는 모두 재미가 좌우하는 것 같다. 관심과 집착, 싫증과 무관심의 양상으로 나타나는 발생과 소멸의 한 주기- 그것을 내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이라 한다면 그러한 사건의 국면을 좌우하는 요소들은 결코 윤리나 정의, 명분, 강제, 책임감, 자기 절제 따위가 아니다. 그런 것들은 차라리 껍데기이고 둔갑이다. 그러니까 기표 같은 것들이다. 기의를 잊어버리고 기표만을 과도하게 의식하게 될 때, 내 안에서는 극렬한 반동 현상이 일어난다. 집착을 끊기 위한 집착. 명분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한 명분. 강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강제. 반동과 재반동이 거칠고 게다가 비본질적이기까지 한 격랑이라면, 재미는 격랑 아래의 도저한 흐름이다. 그것은 사건을 좌우하는 본질적이고 결정적인 심급이다. 재미난 것을 만났을 때에야 비로소 내 안에서 어떤 새로운 발생이 일어난다. 그리고 내 안의 촉수들이 일제히 발기하는 바로 그런 순간에 비로소 나는 어떤 강렬한 살아있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나는 좀 더 재미에 충실해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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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긴 사람으로 돌아가고 싶다. 돌아가서 다시 이런 글을 적고 싶다. 저런 글을 쓸 때의 내가 가장 나다운 상태였던 것 같다. 예전에는 세상이 나에게 농을 걸어오면 나는 그것을 제법 즐겁게 받아쳤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 이렇게 웃음을 몽땅 잃어버리고 말았을까. 웃음의 파산. 웃음의 금치산자. 요새는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고 놀란다. 너무 정색을 하고 있어서.

 

웃음과 장난기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이 슬프다. 그것이 늙음의 표식인 것을 알기에 더욱. 강자에게 힘이 있다면 약자에겐 깊이가 있다는 말이 (물론 이 말은 약자를 변호하기 위한 말이었지만) 나에게는 강자에겐 웃음이 있는데 약자에겐 심각함이 있다는 말처럼 들린다. 소설가 아무개는 삶 앞에서 장난치지 말라고 했지만 장난칠 수 없는 삶이야말로 죽은 삶이 아닐까. 생명의 본질은 유희라는 점에서.

 

내 인생이 소설이라면,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이나 이문구의 <관촌수필>같은 종류였으면 좋겠다. 암담하고 서글픈데 한없이 웃긴 인생. 모두가 슬피 우는 상황 속에서 눈치없고 실없고 방정맞은 사람이고 싶다. 어두운 상황에서 피식 웃어버리는 것이야말로 강자적인 힘이 아닐까. 심각하고 무거운 사색보다는 해학과 유머를 간직한 글이 더 건강하다. 다시 그런 글을 적고 싶다. 아니, 적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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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 - 개정판 스피노자 선집 5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 지음 / 서광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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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앞서 증명했던 것 요약: 신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신은 유일하다. 신은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서만 존재하고 작용한다. 신은 만물의 자유 원인이다. 모든 것은 신 안에 존재하며 신 없이는 존재할 수도 파악될 수도 없다. 모든 것은 신에 의해서 예정되어 있다. 더욱이 그것은 의지의 자유나 절대적 재량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의 절대적 본성이나 신의 무한한 힘에 의한다. (이 모든 ‘사물의 질서’는 신이 의지한 것도 아니고, 생각해낸 것도 아니고, 어떤 판단을 통해 고안해낸 것도 아니다. 그저 이것은 본성이다. 절대적 본성. 그러니까 그냥 좋아서 그러는 것이다. 그저 좋아서 발현하고 발산하는 게 사물의 질서다.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그냥 좋아서.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이 무한한 발현! 발산!) 

목적론적 신 부정: 신이 모든 것을 특정한 목적에 따라 이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원인과 결과, 수단과 목적 이런 구분은 인간이 만들어낸 자의적인 분류이다. 왜냐,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사물의 원인 같은 거 모르지 않나. 그저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충동을 지닐 뿐인 거다.  

가치의 자의성: 선 vs 악, 질서 vs 혼란, 따뜻함 vs 추움, 아름다움 vs 추함, 옳음 vs 그름 등의 모든 가치평가는 인간의 주관에 의한 자의적 분류이다.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유용한 것을 핵심이라고 판단하고, 자기들을 가장 유쾌하게 해 주는 것을 가장 탁월하다고 평가한다. 또한 사람들은 모든 것이 자기들을 위하여 만들어졌다고 믿으며, 그들은 어떤 사물에서 자극받는 정도에 따라서 그 사물의 본성을 선하다 또는 악하다, 건전하다 또는 퇴폐적이다, 도덕이다 부도덕이다고 말한다. 회의론이라는 것도 결국은 이런 기준에서, 그러니까 인간 본위의, 인간 층위의 기준에서 논박이 오가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것. 이를테면 어떤 이한테는 아름다운 게 어떤 이한테는 추할 수 있고 하는 그런 차이 때문에. 

표상, 그리고 완전성: 우리의 표상을 훨씬 능가하는 무한하게 많은 것들이 존재하며, 또한 우리들의 표상이 약하므로 표상을 혼란시키는 많은 것이 존재한다. 이렇게 보면 사실상 대중이 자연(세계)을 설명하려고 사용하는 모든 개념은 오직 표상의 양식일 뿐이고, 사물의 본성을 표시하지는 않는다. 개념은 단지 표상의 상태를 표시한 것일 뿐이다. (이성의 유가 아니라 표상의 유?) 따라서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 그 각각의 완전성은 오로지 “그 사물의 본성과 능력에 의해서만” 평가되어야 한다.  

양태, 실체, 속성 등 스피노자의 주요 개념을 이해되는 선에서 정리해보면,  

양태: 외부의 원인에 의해 존재하고, 자기 원인에 의해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자기 원인에 의해 존재하는 것은 실체). 양태는 규정되고 강제된다. 타동적이고 부자유함. 양태는 우주의 표정 같은 거다. 얼굴 가죽 위의 점 같은 거. 얼굴 표정이 변할 때 얼굴 가죽 위에 점의 위치가 변화하는 것처럼. 아니면 얼굴 표정 변하면서 동그랬던 점이 길죽해진다든가 하는 변화. 얼굴 표정 변화에 따른 얼굴 가죽 위에 있는 것들의 변화. 이 변화를 변용이라고 함. 양태는 변용됨. 한마디로 양태는 ‘모드’라고 보면 된다. 표정 변화할 때마다 바뀌는 새로운 모드. 그게 양태. 모든 양태는 신의 속성을 분유하고 있음. ex. 의지, 지성, 운동, 정지, 빠름, 느림...  

실체: 본질이 실존을 포함하는 것, 자기 원인에 의해서 설명되는 것, 자기 안에서만 설명되는 것. 다른 속성끼리는, 즉 다른 실체끼리는 서로 제한하거나 간섭할 수 없음. 실체는 오로지 실체 안에서만 서로 제한이나 간섭이 가능. 예를 들면 사유는 사유 안에서만 서로 간섭 가능. (처음 정의 부분에서는 아직 속성과 실체가 구분되지 않고 있다. 정의 부분에서는 속성=실체, 무수한 속성=무수한 실체, 무수한 실체였던 것들이 나중에 정리9에 이르면 하나의 실체로 전화하게 됨) 양태가 규정되고 강제되고 타동적이라면 실체는 action. 자기본성으로부터 나오는 action. 실체는 자유로움. 행동하는 것이 자기원인적임. 

속성: 실체의 본성은 속성들로 이루어짐. 무한히 많은 속성들로 신의 본성이 구성됨. 우리는 속성을 사유와 연장 두 가지만 알고 있지만, 사실 우리가 모르는 속성들도 엄청 많음. 무한함. 

신: 우주의 무한한 움직임. 우리가 모르는 것들의 무한성. 질적 다양체.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 비유했을 때 ‘원’이 소산적 자연이라면 원의 회전으로 생겨나는 ‘구’는 능산적 자연이다. 원의 현상이 구이고, 구의 실체가 원이니까 사실 원이나 구나 같은 거. 즉 “능산적=소산적 자연” 그리고 우주의 이런 모든 작동 시스템이 다 ‘필연성’에 의한 것. 

things: 1장 신에 대하여는 “사물의 본성”에 대한 설명이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모든 사물, 즉 만물이란 rerum natura =모든 “things”. thing들의 전체. thing이란 한국말로 하면 ‘것’, 단순히 물건 같은 게 아니라 추상적인 ‘것’까지도 다 포함. 이‘것’ 저‘것’ 좋은 ‘것’ 행복한 ‘것’ 딱딱한 ‘것’ 등등. 

 

2부 

정신: 인간의 정신은 사유의 속성을 지니는 양태이다. 

정신의 자율성에 대한 언급: 사유라는 속성 안에서 정신은 자율적으로 작동한다. 즉 사유라는 속성 안에서 관념이 관념을 낳는 식으로. 이런 식의 인과작용으로. 

정신의 능력에 대한 언급: 사유 역시 신의 다른 속성들과 마찬가지로 능력을 표현한다. 사유에서 일어나는 작용(정신의 자율성을 낳는)은 곧 신의 능력에 대한 표현이다. 그리고 이때 인식능력=생산능력. 신은 자신이 인식한 대로 생산한다. 또한 인식능력=활동능력. 알면 이미 그 앎에 따라 활동하고 있다는 거임. 안다는 것은 이미 공통개념이라는 하나의 리듬을 타고 있다는 뜻임. 공통개념은 뒤에 나옴.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식능력=실존능력. 우리가 인식하는 것 그대로가 곧 실존하는 실체임. 

관념: 정신이 형성하는 정신의 개념. 관념은 사유 속성 안에서 자기 질서에 따라 생산되는 내생적인 것임. 이때 "참된 관념"과 "적합한(타당한)관념" 구별의 필요성. 전자는 데카르트가 말하는 대상과 일치하는 관념. 후자는 스피노자가 제기한 것으로 데카르트가 말하는 ‘참된 관념’을 부정하면서 그 대신으로 끌어온 용어. 적합한 관념이란, 사유라는 속성을 지니는 하나의 양태로서의 정신, 정신이 형성하는 정신의 개념으로서의 관념. 이러한 관념은 “대상(의 일치 여부)과 관계없이 그 자체로 인식되는 한에서 참된 관념의 모든 특질들이나 내생적(관념이 관념을 낳으므로) 명칭들을 갖는 관념이다.” 사실상 스피노자가 보기에 참되다고 하는 용어는 (대상-관념의 일치를 고려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불성설인 셈. 그냥 대상과 관념 사이에 자연스레 적합하고 타당한 관계가 있을 뿐인 거임. 

관념 자체의 실재성: 관념이 대상과 관련해서 갖는 실재성이 아니라, 관념 그 자체인 한에서 갖는 실재성. 원이라는 관념은 둥글지 않다. 개라는 관념은 짓지 않는다. 원이라는 관념, 개라는 관념- 이것들은 다른 관념들과의 사이에서 내생적으로 도출될 뿐. 그리고 그렇게 생긴 관념은 대상과 별개로 사유라는 속성 안에서 그 관념 자체로 실재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대상과 관념은 대응관계 이루어 일치하는 게 아니다. 다만 “관념의 질서와 연결”이 “사물들의 질서와 연결”과 동일할 뿐이다.

속성과 속성 사이의 계열적 일치 같은 것은 없음. 다만 각각의 속성 안에서 그 표현의 산출방식이 동일할 뿐이다. 관념이 관념을 낳는 산출방식. 연장이 연장을 낳는 산출 방식. 이것이 서로 동일하다는 것. “어떤 속성에서 생각하든 간에 우리는 동일한 질서, 원인들의 동일한 연결을 발견할 것이다” 이를 그림으로 예를 들어보면 아래와 같다. 



만약 위의 프랙탈 이미지들이 속성을 은유하는 이미지라 해보자. 이미지<1>이 (은유적으로) 사유를 의미하고 이미지<2>가 (역시 은유적으로) 연장을 의미한다면, 그림에서 보이는 바처럼 <1>의 ①과 <2>의 ①의 관계는 ‘일치’라는 개념으로 설명되기보다 ‘적합’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되는 것이 옳다. 사실상 <1>의 ①과 <2>의 ①은 굳이 일치하고 말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1>이라는 하나의 이미지 안에서 ①과 ②가 관계 맺는 방식은(다른 말로 ①에서 ②가 산출되는 방식은), <2>라는 하나의 이미지 안에서 ①과 ②가 관계 맺는 방식(다른 말로 ①에서 ②가 산출되는 방식)과 동일하다. (이 그림에서 예로 들자면) <1>과 <2> 모두 ‘프랙탈’이라고 하는 동일한 ‘질서’를 갖는 서로 다른 그림인 것. 

만약 <1>의 ②가 “d-o-g”라고 하자. 그렇다면 <2>의 ②는 “옆집 발발이” 정도 되는 게 ‘적합’(또는 ‘타당’)할 것이다. 하나의 속성에서 파악된 사물은 다른 속성에서도 대응물을 가져야 한다는 평행론에 근거해서. 즉, 그것(thing)은 "d-o-g"임과 동시에 “옆집 발발이”다. 7. 평행론: 이처럼 “사유하는 실체와 연장된 실체는 동일한 실체이며 그것은 때로는 이런 속성으로 그리고 때로는 저런 속성으로 파악된다. 또한 연장의 양태와 사유의 양태는 동일한 것(thing)이며, 그것은 단지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을 뿐이다.”, “어떤 속성에서 생각하든 간에 우리는 동일한 질서, 원인들의 동일한 연결을 발견할 것이다.” 속성은 달라도 각 속성의 질서와 연결이 같기 때문에, 즉 그 산출방식이 같기 때문에 신체의 양상을 보면서 정신의 양상 또한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는 이런 말도 성립된다. “어떤 신체가 동시에 많은 작용을 하거나 많은 작용을 받는 데 다른 신체보다 더 유능하면 할수록 그 정신도 많은 것을 동시에 지각하는 데 다른 정신보다 더 유능하다.”, 이런 생각을 갖고, 스피노자는 정신의 본성을 연구하기 위해 신체 연구로 들어간 것. 

속성들 간의 자율성: 속성들은 서로에 대해 완전히 자율적. <1>과 <2>는 섞일 수도 없고 상호작용할 수도 없다. 각각의 이미지는 오로지 그 안에서 능산적으로 thing들을 산출해낼 뿐.  

프랙탈 말고도: 각각의 사물들이 저마다의 속성 안에서 서로 연결을 맺는 방식, 질서를 이루는 방식이 동일하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 비단 프랙탈 도형만 있는 것은 아닐 것 같다. 또 다른 예를 얼마든지 들 수 있지 않을까. 예를 들면 에셔의 그림은 어떤가. (이건 나중에 따로 정리해보자) 

사물들, things, rerum: 정리 7에서 말하는 사물들(res, rerum)은 단지 연장의 속성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냥 모든 속성의 양태 일반을 다 지칭하는 것. “하나의 속성에 따라 파악된 모든 것은 다른 모든 속성들에 따라 파악된 것들과 동일하다.” 

사유의 특권 논쟁
Q. 사유는 심지어 연장에 대한 관념까지도 갖고 있지 않은가? 다시 말해 사유 속성은 다른 속성들의 양태를 재현하는 관념도 갖지 않는가? 또한 관념은 관념에 대한 관념도 갖지 않는가? 그런 점에서 사유는 연장보다 뛰어난 속성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속성 중에서도 최고 속성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A. 그거는 사유라는 속성이 갖는 ‘능력’일 뿐이다. 능력의 문제와 속성의 문제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사유 속성이 사유 능력과 맺는 관계는 다른 속성이 그 속성의 능력과 맺는 관계와 같다. (이 부분은 잘 이해가 안 된다. 그렇다면 연장의 속성 안에서는 우리가 모르는 연장만의 능력이 사유 능력처럼 존재한다는 얘긴가? 단지 우리가 그것을 사유하지 못한다는 얘긴가? 사유는 이미 연장과는 다른 속성이기 때문에, 당연히 사유의 속성 안에서 사유하는 우리로서는 연장의 능력을 도저히 사유하지 못한다는 그런 얘긴가?) 

정리 13에 대한 설명
-“가장 단순한 신체들”: 아직 실질적인 개체를 이루지 못한 것. 실질적인 개체란 그 자체로 어떤 복합체인데, 여기서 말하는 ‘가장 단순한 신체’라는 것은 미분에서의 ‘dx’처럼 그저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개체임. 실존하지 않고 원리만 있는 개체. 'res'야말로 ‘가장 단순한 신체들’의 개념에 부합하는 용어가 아닐까. ‘가장 단순한 신체들’은 오로지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에 의해서만 구분된다. 즉 그 자체로 ‘운동’인 어떤 것. 마치 소립자처럼.
-“조성체들”: 일정한 방식, 일정한 관계를 표현. 개체는 조성체들로서 실존한다. 개체들의 개체인 조성체. 조성체의 개체인 조성체. 즉 조성체는 더 큰 조성체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된다.
-어떤 물체들이 합일되어 있다는 것은: 크기가 같거나 다른 다수의 물체가 다른 여러 물체들의 압력을 받아서, 즉 외적 강제에 의해서 서로 접합하거나, 아니면 같은 속도로 혹은 다른 속도로 움직일 경우 (그래서 마치 한 덩어리나 마찬가지로 행동할 경우), 그리하여 자신의 운동을 ‘일정한 방식’으로 전달할 경우, 우리는 이 물체들이 합일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개체들이 더 큰 개체를 조성했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면 3이라는 개체와 4라는 개체가 외적 강제에 의해 3/4이라는 방식으로 접합했다고 하자. 3이라는 개체와 4라는 개체가 관계 맺은 방식인 3/4는 그 자체로 하나의 복합개체다. 이 복합개체는 자신의 운동을(자신의 관계맺음방식을, 자신의 운동의 일정한 방식을) 아래와 같이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3/4 = 6/8 = 9/12 …
-이렇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라는 기호로 연결되는 더 큰 복합체가 탄생한다. 그리고 이때 전체 형상의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다면 각각의 개체들은 본성이 동일한 다른 개체에 의해 대체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게 가능하다.
3/4 = 육/8 =9/12 …  
-개체의 정의를 분수가 아니라 파도타기에 빗대볼 수도 있지 않을까. ‘술을 마시는 행위’를 ‘운동의 일정한 방식’이라 할 때, 화살표 방향을 따라 운동이 일정한 방식으로 전달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개체들 사이에 하나의 거대한 파도의 흐름이 일어나고, 하나의 운동 방식으로 거대한 파도의 흐름을 낳는 이 모든 개체들은 합일되어 있는 셈. 이때 술을 마시는 행위만 연출할 수 있다면 그 술이 맥주가 되었든 소주가 되었든 상관은 없다. 중요한 것은 술의 성분이 아니라 술을 마시는 행위니까. 술을 마시는 행위는 어쩌면 ‘유전자’ 같은 것인지도.    
-우리는 위와 같은 사유를 통해 이러한 사실을 도출해낼 수 있다. “개체란 하위 개체들이 서로 계속해서 ‘운동을 전달’하는 동적인 관계이며, 개체의 외부에 교란이 가해지지 않는다면 개체는 일정한 닫힌 순환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때 개체들은 변이를 겪을 수 있다. 예를 들면 ‘파도타기’라는, 하나의 거대한 개체의 양상에 변이가 일어날 수 있다. 파도 속도가 점차 빨라진다거나 혹은 파도의 부침이 점차 거칠게 일어난다거나. 우리는 이를 ‘변용’이라 부른다. 

이미지와 상상: 우리가 지각하는 관념은 우리 신체의 관념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리 정신의 본성을 구성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본성을 구성하는 진짜 관념은 무엇에 대한 관념이란 말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 신체에서 생산된 “변용”의 관념’이다. 관념이라는 것은 ‘사물에 대한 관념’이 아니라 ‘사물이 우리 신체에 가한 변용’에 대한 관념이다. 그렇다면 개체들의 고유한(?) 관념은 어디에? 그것은 인간 정신이 아니라 신 안에 주어져 있음. 

따라서 인간의 인식이 부적합하게 일어나는 까닭은, 데카르트 말처럼 참된 인식이라면 자고로 부적합할 수가 없는데 다만 ’의지‘의 방해 때문에 그것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고 그런 게 아니라, 애초에 우리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들을 우리가 갖지 못하기 때문에, 즉 우리는 다만 사물에 대한 관념을 갖는 게 아니라 사물이 우리 신체에 가한 변용에 대한 관념만을 인식하기에 애초에 부적합할 수밖에 없는 것임. 애초에 우리는 사물이 우리 신체에 가한 변용에 대한 관념이라는, 아주 아주 주관적이고 편파적이고 불완전한 관념만을 갖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인식은 언제나 부적합할 수밖에 없음. “우리 정신은 신체에 직간접적으로 작용을 가해오는 많은 것들을 지각하지만 그런 지각이 그런 작용을 가한 물체들의 참된 구조를 알려주는 건 아니다. 오히려 변용들이 지시해주는 것은 대상들의 실재적 특징보다는 오히려 우리 자신의 신체 상태다.” 즉, 인식은 참될 수 없다. 그것은 언제나 부적합하다. 다만 그러한 인식을 통해서 그렇게 인식하는 우리 자신의 상태를 파악할 수는 있다. 

사지 절단된 사람이 느끼는 환상고통 같은 것을 한 번 예로 들어보자. 마치 사지가 존재하는 듯이 고통스러워하는 그의 인식(사지가 존재한다는 인식)은 부적합하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인식하고 있는 걸 보면서 우리는 그가 아직도 자신의 사지에 미련을 못 버렸다고 판단해볼 수 있다. 그런 식으로 그의 상태를 파악해볼 수 있다. 

스피노자는 변용을 ‘이미지’라 부르며 이 변용에 대해 우리 정신이 갖는 의식을 ‘상상’이라 부른다. 그러니까 우주삼라만상이 사실은 모두 내 안에서 내가 만들어낸 이미지인 것. 우리의 정신이라는 것은 그러한 이미지에 대한 상상인 것.  

 

3부 

관념과 정서의 구분(p.83):
관념- 사물(things)에 대한 것, 표상적이고 재현적인 사유 양태(정서에 선행함)
정서- 비표상적인 사유 양태 

이러한 구분은 좀 애매해서 어떨 때는 정서가 관념의 일종으로 묶이기도 함. 그러나 관념과 정서가 결정적으로 차이나는 점은, 전자가 정태적이라면 후자는 동태적이라는 것이다. 관념이나 정서나 다 양태고 변용이지만, 정확히 말하면 관념은 외부 신체와 우리 신체가 만나서 혼합된 ‘정태적인 상태’이고, 정서는 능력(신체활동능력, 정신사유능력)의 증가와 감소라는 이행, 이동. 능력의 끊임없는 변이, 동적인 이행(한 완전성의 정도에서 다른 완전성의 정도로 이행). 실존력의 연속적 변화, 변화하는 선율. 정서 없이도 관념은 있을 수 있지만 대개 관념은 정서를 수반함.     

신체활동능력의 증감에 관계하는 정서(평행론): 정서의 변화는 신체활동능력의 증감과 관계된다. 평행론(신체나 정서나 동일한 것의 상이한 표현)에 의거해서 정서를 컨트롤함으로써 신체의 활동 능력을 조절할 수 있는데, 이때 정서를 컨트롤하는 거는 이성이 아니다. 이성이 광포하게 날뛰는 정서를 제어하고 그러는 건 웃기는 얘기. 사실상 정서를 컨트롤하는 것은 더 큰, 더 강력한 정서다. 이성은 무력하다. 

코나투스: 모든 사물은 스스로 파괴할 수 있는 그 어떤 내적 모순도 안고 있지 않음. 오히려 각각의 사물은 자기 안에 존재하는 한에서 자기 존재에 머무르려고 노력함. 그 노력이 바로 코나투스. 코나투스는 곧 사물의 현행적 본질. 코나투스는 실존하는 것들에만 있음. 상상적인 것, 비실존하는 것에는 코나투스 없음. 모든 사물은 ‘활동’한다. 활동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 사물을 사물이라고 인식 가능한 것이다. 즉, 실존하는 사물=현상하는 사물=활동하는 사물. 활동한다는 것은 곧 저항성을 갖고 있다는 의미나 다름없다. (ex. 회전하는 구, 돌아가는 선풍기) 코나투스=저항성=머무르려고 하는 성질=노력=능력. 실존의 사라짐은 곧 코나투스의 사라짐임. 

스피노자의 코나투스와 홉스의 코나투스: 이 둘은 의미가 좀 다름. 전자는 ‘개체성을 정의하는 운동과 정지의 관계’를 지키려는 노력. 후자는 생물학적 이기주의, 전체에서 분리된 한 개체의 추상적 생명운동, 자기보존본능. (자살에 대해: 온갖 혼동과 탈선, 슬픔 속에서도 개체한테는 언제나 자기의 본질을 최대한 현실화하려는 노력이 존속되고 있음. 그렇다면 자살하는 개체는? 그 개체는 제 정신이 아닌 거다. 자기 정신이 아닌 다른 정신에 영향 받고 있는 것, 종속되어 있는 거다.) 

욕망: 욕망은 자기 본질에 머무르려는 개체의 노력, 즉 코나투스가 사유의 속성으로 표현된 것.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욕망은 정신분석학에서의 그것처럼 결핍에서 비롯하는 게 아님. 스피노자의 욕망은 부정 없는 긍정. 그의 욕망은 욕망하는 대상과의 관계 이전에 존재한다. 욕망의 선차성. 우리에게 욕망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능력의 증감을 경험하고 이것이 곧 기쁨과 슬픔으로 지각되는 것. 모든 정서는 신체가 복합적인 개체들로 이루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복합적임. 그것은 우리 신체에 전면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부분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음. 양가적일 수도 있음. 

각종 정서 분석
미래나 과거의 사물의 이미지에서 생겨나는 정서: 희망, 공포
사물의 정서에 동일시됨으로써 생겨나는 정서: 연민, 호의, 분개, 질투
사물의 정서에 반동일시됨으로써 생겨나는 정서: 질투
기타 등등. 

감응, 정서모방: 우리와 유사한 외부 신체에 어떤 정서가 촉발되면 우리 신체 안에서도 그런 작용이 실행된다. 신체적으로 유사한 개체끼리는 정서적으로도 서로 감응하는 것. 서로 영향 받는 것. 한 곳에서 촉발된 정서가 유사한 신체들 사이에서 서서히 번져나가는 것, 단풍처럼 물들어 가는 것. 이것이 바로 정서적 모방. 정서적 모방은 신체 구조의 유사성, 신체적 변용의 유사성에서 나오므로 신체 구조가 다른 신체에 대해서는 일어나지 않음. 신체 구조의 유사성의 한도는 정서모방이 이루어지고 나서야 사후적으로 알 수 있을 뿐.   타르드는 사회의 토대를 정서 모방에서 찾음. 계약 이전에 존재하는 모방. 전자가 강제적이라면 후자는 자발적. 파동, 흐름으로서의 모방. 정서모방, 즉 ‘따라하기’는 이기적이거나 이타적으로 분류되기 이전의 어떤 원초적, 시원적 행동양식. 그들이 나에게 보여주는 사랑을 통해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 

한편, 마트롱은 사회의 토대를 명예욕에서 찾음. 다른 사람 맘에 들려는 노력.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기. 근데 이건 지배욕으로 변질되기 쉬움. 즉, 자기가 기뻐하는 거를 대중에게 강제하면서 너도 기뻐하라고 윽박지르는 걸로 변질될 가능성. 

수동적 정서와 능동적 정서: 감정의 원인을 모를 때는 그것이 기쁨일지라도 수동적 정서임. 적합한 원인을 알면(인식을 하면) 그것이 슬픔일지라도 능동적 정서임. 정신이 자기 활동능력만을 고찰할 경우, 질투나 슬픔이 없고 대신 욕망과 기쁨이 존재한다. 이때의 정신은 자기 본성에서 생기는 기쁨을 알고 있는 것. 

 

4부 

 

5부  

정리 10. 우리는 우리의 본성과 대립되는 정서에 압도당하지 않는 동안에는 지성에 일치하는 질서에 따라서 신체의 변용에 질서를 부여하고 그것을 연결하는 힘을 가진다.
:자유인은 지성에 부합하는 질서와 연결을 갖는다. 그의 신체적 변용, 정신적 변용, 정서의 양상(?)... 즉 ‘그’라고 하는 한 개체의 다양한 속성, 속성으로 표현되는 양태, 그 양태의 변용은 그의 지성(이성)에 부합하여 이루어진다. (그가 진정한 자유인이라면)
 
정리 10 주석 요약
:자유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이성에 기반하여, 이성의 관점에서, 이성에 기초하여) 올바른 생활방식이나 특정한 생활 규칙을 정립하고 그것을 기억에 남겨서 삶에서 흔히 발생하는 개별적인 경우에 계속해서 그것을 적용해야 한다. 이성적으로 너 자신을 인식하고 그것을 토대로 이성적으로, 이성에 일치하는 질서에 따르는 너만의 생활규칙, 맞춤형 생활규칙(?)을 정립하라. 마치 정신분석자가 환자 심리를 철저하게 분석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렇게 하여 신경증에 걸린 환자의 현재 상태를 환자 자신에게 통렬하게 인식시키는 것처럼.  

현자(자유인, 이성으로 사유하는 사람)가 보여주는 행동 양식: p.343
(...)그러므로 자신의 정서와 충동을 오로지 자유에 대한 사람으로 지배하고자 하는 사람은, 가능한 덕과 함께 덕의 원인을 인식하고 덕의 참다운 인식에서 생기는 환희로 영혼을 충만하게 하려고 할 것이다. (p.343) 

정서에 대한 정신의 능력:
정신은 정서를 인식할 수 있고, 외적 원인의 사유로부터 정서를 분리시킬 수 있다. 즉 정서를 객관화하여 고찰할 수 있다. (이것이 제 2의 인식. 그렇다면 제 1인식은? 정념에 매몰되어 외적원인의 사유와 결부된 정서만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 정신(이성, 지성)에 기반하여 적합하게 정서를 인식함으로써 비롯하는 이 정서(제 2의 인식에서 비롯하는 정서)는 외적원인의 사유와 결합된, 정념에 휩싸인 상태에서 비롯하는 정서(제 1의 인식에서 비롯하는 정서)보다 우위를 점한다. 결국 정신은 정서의 질서와 연결을 재구축, 재편할 수 있는 힘을 갖는다. (정리 10에서 말한 바처럼)

제 3인식=직관지:
이것은 신의 인식 자체를 기초로 삼는 명석판명한 인식(p.349). 이 인식은 수동적인 한에서의 정서들을 절대적으로 소멸시키지 않아도 적어도 그 정서들로 하여금 정신의 가장 작은 부분을 구성하게끔 한다. 또한 명석판명한 인식은 불변하며 영원한 것에 대한, 즉 우리들이 진실로 소유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사랑을 생기게 한다. (p.350 1~5줄) 

인간의 정신은 신체와 함께 완전히 파괴될 수 없고 그 가운데 영원한 어떤 것이 남는다(정리 23). 그리고 이러한 ‘영원한 어떤 것’은 인간 정신의 본질에 속하며, 우리는 이것을 영원한 필연성에 의해 파악할 수 있다. 이것은 곧, ‘영원한 필연성’에 의해 신체의 본질을 파악하는 일이다. 이러한 활동은 ‘정신의 본성’이며, 이러한 활동으로 생겨난 관념은 필연적으로 영원한, 특정한 사유양태(p.352 1줄)이다. 바로 이것이 직관지. 제 3인식을 통해 얻어진 관념은 신의 영원하고도 무한한 본질을 포함하는 관념이다. 

이러한 관념 속에서 우리는 우리들이 영원하다는 것을 느끼며 경험한다. 비록 우리들이 신체에 앞서서 존재했다는 것을 상기하지 않을지라도,(“우리들은 원래 신체에 앞서서 존재했다”고 적고 있는 스피노자의 표현이 흥미롭다. 특히 스피노자가 정신의 본질을 하나의 문장으로서 표현할 때 선택한 어휘, ‘앞서서’라고 하는 바로 이 어휘가 흥미롭다. 이 한 문장만 보면 참으로 시적이다. 마치 어떤 잠언처럼 느껴진다.) 우리들의 정신은 영원하다는 것 그리고 정신의 이 존재는 시간으로 정의하거나 지속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느낀다. (p.352) 

정신의 최고의 노력과 최고의 덕은 세 번째 종류의 인식에 따라서 사물을 인식하는 것이다.(정리 25) 그리고 이러한 인식에서 최고의 정신의 만족이 생겨난다.(정리 27) 그런데 이때 세 번째 종류의 인식에 따라서 사물을 인식하려는 경향이나 욕망은 첫 번째 종류의 인식(정념에 휩싸여 외부요인과 결부된 정서만을 인식하는 단계)에서는 생길 수 없지만, 두 번째 종류의 인식(자기 객관화 시켜서 외부원인과 정서를 분리시키고 지성에 기반하여 정서를 고찰하는 단계)에서는 생길 수 있다.(정리 28) 

정리 34. 정신은 신체가 지속하는 동안이 아니면 수동에 속하는 정서에 종속되지 않는다.
: 이것을 다른 말로 바꿔보면, 우리가 수동에 속하는 정서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까닭은 우리가 우리의 신체 속에서 지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신체 속에서 지속하는 한 종속은 불가피하다. 숙명이다. 
 
정리 36. (...) 신에 대한 정신의 지적 사랑은 신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무한한 사랑의 일부이다.
: 제 3인식 활동은 원인으로서의 신의 관념을 동반하면서(즉 공통개념을 원인으로 하면서, 공통개념에 기반하면서, 공통개념과 더불어서) 정신이 자기 자신을 고찰하는 활동이다. (정리 36 증명에서 스피노자는 직관지가 공통개념과 더불어서 이루어진다고 여러 번 강조하고 있다.)

죽음에 관하여:
정신의 명석 판명한 인식이 크면 클수록, 정신이 신을 사랑하면 할수록 그만큼 죽음은 덜 해롭다.(p.362 4줄) p.351 정리 23에서 스피노자가 말했던 걸 기억하자. 신체가 파괴된 이후에도 남아있는 영원한 어떤 것이 있다고. 신체가 파괴된 이후에도 남아있는 영원한 어떤 것, 정신의 본질! 이것에 비하면, 신체의 죽음 같은 것은 별로 대수롭지도 않는 것이다.  

자유인의 능력(p.362 정리 39의 증명 부분):
여러 가지 활동에 적합한 신체를 가진 사람은 나쁜 정서에 거의 사로잡히지 않는다. 그는 신체의 변용을 지성에 일치하는 질서에 따라서 질서 잡고 연결하는 힘을, 따라서 신체의 모든 변용을 신의 관념에 관계시키는 힘을 소유한다. (...) 그는 그 가장 큰 부분이 영원한 정신을 소유한다.

우리의 정신은 인식하는 한에서 사유의 영원한 양태이고, 이것은 사유의 또 다른 영원한 양태에 의해서 결정되며 그것은 다시금 다른 것에 의해서 결정되고, 이처럼 무한히 계속되어 모든 양태는 동시에 신의 영원하고 무한한 지성을 이룬다.(p.364 밑에서 6째 줄)
: 이것은 사물 질서와 연결의 방식에 대해 말했던 2부 정리 7과 그 맥락을 같이 하는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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