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6
프란츠 파농 지음, 남경태 옮김 / 그린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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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은 흔히 악으로 규정된다. 박애정신과 시민의식을 갖춘 사람들은 비폭력 평화주의만이 갈등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도라고 말한다. 이런 와중에 폭력을 선동하는 무리들은 언제나 극단주의자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경계와 비난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모든 도덕 판단이 그러하듯 폭력이 악이라는 테제 역시 특정한 계보 속에서 산출된 명제일 뿐이다. 그리고 이 계보는 지극히 '정치적'이다. 폭력의 종류에도 여러 가지가 있으며, 그중에는 분명 ‘옹호해야 할 폭력’이 있다. 폭력이 악이라는 테제는 이런 폭력의 가치마저 폄하하고 부정하게 만든다. 

옹호해야 할 폭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억압받는 소수자가 행하는 폭력이다. 소수자가 저지르는 폭력은 강자가 자기 보존과 확장을 위해 수행하는 폭력과는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강자의 폭력이 생명욕동에서 비롯하는 유기체적 성장의 수단이라면, 소수자의 그것은 온통 죽음욕동으로 들끓는 폭력이다. 소수자의 폭력은 목숨을 걸었으되 아무런 승산도 전망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폭력이다. 극한의 절망 속에서 분투하는, 처절한 자멸의 폭력인 것이다.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을 이끌었던 프란츠 파농은 착취당하는 원주민이 식민지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 극단적인 폭력투쟁 뿐이라고 강변한다. 그는 폭력의 행사가 다양한 부족의 원주민을 한 덩어리로 묶어주며, 각 개인의 의식에 공통의 대의와 민족의 운명, 집단의 역사 같은 관념들을 싹트게 한다고 말한다. 결집된 민중의 폭력을 식민지 해방을 위한 결정적 수단으로 여겼던 파농에게 비폭력 평화주의, 점진적 개혁, 지배국가와의 타협을 외치는 식민 치하의 민족주의 정당은 어디까지나 ‘자유를 누린다고 착각하는 노예계급’에 불과했다. 민족주의 정당은 겉으로는 평화를 부르짖으면서 실제로는 착취국의 정치 세력과 은밀하게 결탁하여 식민 체제를 영속화했기 때문이다. 

1961년 이 책의 서문을 쓴 사르트르는 알제리 독립전쟁 당시 알제리민족해방전선(FLN)을 지지했던 프랑스의 유일한 지식인이었다. 그는 식민 치하에서 착취당하는 소수자 계급의 극단적 폭력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을 재창조하는 과정이다. (...) 부드러움으로 폭력의 흔적을 지워버릴 수는 없다. 오직 폭력 자체만이 폭력을 부술 수 있는 것이다. 원주민은 무력으로 이주민을 몰아냄으로써 자신의 식민지 노이로제를 치료한다. 분노가 들끓을 때 그는 잃어버린 순수함을 되찾으며, 자기 자신으로 돌아와서 자신의 자아를 스스로 창조한다. (...) 반역의 무기는[즉, 폭력은] 그가 인간임을 증명하는 증거다. -p.36 <1961년판 서문 中에서>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알제리 원주민들이 보여준 극단적인 무력투쟁은 정당방위로서의 폭력도 아니고, 정당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폭력도 아니었다. 그들의 폭력은 도덕이나 정의의 범주를 초월한 영역에 있었다. 그들의 폭력은 ‘존재론적’이었다. 그들은 폭력을 통해 실존하는 인간이 되었던 것이다. 

인간은 궁지에 몰렸을 때 폭력적으로 돌변한다. 궁지에 몰린 인간이 보여주는 ‘너 죽고 나 죽자’ 식의 폭력, 그것은 일종의 자해다. 자해는 자기를 파괴하는 행동이지만, 한편으로는 죽음욕동의 분출 속에서 자기의 실존을 확인하는 행동이기도 하다. 인간을 인간으로서 실존하게 하는 폭력,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폭력, 자멸 속에서 생의 감각을 느끼는 데 소용되는 폭력. 과연 이러한 폭력을 ‘악’이라 규정할 수 있을까. 만약 이것이 '악'이라면, 자유와 평화와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이러한 '악'을 타도해야 한다고 호들갑을 떠는, 그럼으로써 자신들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교묘한 정치적 제스처는 어떠한가. 그것이야말로 더 끔찍한 ‘악'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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