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역국에 흰쌀밥이랑 삼색나물 차려놓고 우리 아기 아프지 말고 건강히 자라게 해달라고 빌었다. 전통풍습을 착실히 따라서 꼭두새벽부터 신령님께 정화수 떠놓고 빌어보긴 난생처음인 일인데 그만큼 내 마음이 절박했던 까닭이다. 요즘은 아프다고 옛날처럼 쉽게 죽지는 않는다. 다만 다같이 망할 뿐. 한 달 벌어 한 달 사는 한달살이 가정에 아픈 이가 생기면 그 날로 그 가정은 모래성처럼 붕괴되고 만다는 두려움에 정말로 간절히 빌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아이 낳고 나니 유방이 터질 듯이 부풀고 거기서 따스하고 말간 젖이 흘러나오고 그것을 내 아기가 쪽쪽 빨아먹으며 하루가 다르게 토실토실 커간다. 그러니까 서른여섯 해 만에 내 유방의 진짜 용도를 발견한 것이다. 유방은, 혹은 가슴은 외설인가? 부끄러운 것인가? 금기인가? 희롱의 대상인가? 희롱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할 대상인가? 그전에, 찧고 빻는 말들의 세계 속으로 호출되기 전에, 가슴에 관한 각종 사회문화적이고 타자적인 언설들을 걷어내면- 유방은 그저 생명을 살찌우는 지극히 실제적인 쓸모를 지닌 하나의 무구한 신체기관에 다름 아니었더라. 말간 젖이 흘러나오는 내 부푼 유방을 보면서, 이것을 아들에게 빨리면서, 이 신체 부위를 둘러싼 그 모든 시끄러운 말들을 읍소하는 유방의 육중한 실제성을 실감한다. 가슴과 유방과 젖꼭지를 생각하면 살기 위해 치열하게 젖 빠는 세상 모든 솜털 보송보송한 어린 것들이 떠오르고 그러면 문득 목울대가 저리다. 젖 줘본 사람은 안다. 유방은 그런 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아무래도 아기가 귀엽다느니 사랑스럽다느니 하는 찬사는 아기한테 퍽이나 무례한 표현 같다. 실제로 보니까 아기는 충격적일 정도로 용맹스럽다. 젖꼭지를 매서운 기세로 낚아챌 때 아기는 마치 설치류를 사냥하는 어린 맹수 같다. 침 묻은 젖꼭지가 미끄러워 생각대로 잘 안 물리면 성난 짐승이 따로 없다. 그때의 울음은 거의 포효에 가깝다. 그리고 젖빠는 아기 눈빛은... 아, 이 눈빛은 정녕코 사랑스러운 게 아니다. 이 눈빛! <여명의 눈동자>에서 목숨걸고 다급하게 도주하던 최대치가 습지에서 꿈틀대는 뱀을 산채로 건져올려 껍질을 벗겨먹을 때, 그 이글대던 눈빛과 똑같다. 줄거리도 가물가물한 수십 년 전 드라마의 한 장면이 난데없이 떠오를 정도로 꼭 닮았다. 아무튼 그렇게 한참을 열심히 빨다가 배가 불러오면 속도가 점차 느려지면서 눈에 힘이 풀리는데 이건 또 <동물의 왕국>에서 저멀리 지평선 노을을 응시하며 얼룩말 넓적다리를 잘근잘근 씹어먹는 아프리카 숫사자의 그 담담하고도 신산한 표정과 다를 게 뭔지? 최대치와 아프리카 숫사자를 감히 어찌 귀엽다고 할 수 있을까. 생에 대한 비장하고도 숭고한 열정 앞에서 그런 말은 차라리 모독인 것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살면서 또 한 번 누리기 어려운 각별한 경험을 했다. 두려움과 고통, 환희와 감사와 기쁨... 병원에 있는 내내 눈물로 뒤범벅된 수만 가지 격렬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아기의 탄생은 실로 벅찬 경이와 신비 그 자체였다. 크리스찬은 아니지만 아기를 보면 정말로 신이 여기에 우리와 함께 있다는 걸 알겠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눈부신 신성 속에 있음을, 작은 꽃잎 같은 아기 입에 젖물리며 깨닫는다. 아기는 신이 주신 귀한 선물이란 생각- 상투적인 비유가 아니라 뼛속깊이 사무치는 구체적인 실감으로서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 모두가 처음엔 이처럼 여리고 무구한 아기였다는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또한 얼마나 큰 전율로 다가오는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hnine 2017-12-16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드디어 출산 하셨군요! 축하드립니다.
귀한 선물이라는 말씀이 저도 무슨 뜻인지 알아요. 그래서 제 아들 이름 지을때에도 귀한 선물이라는 뜻이 들어가게 지었지요.
몸조리 잘 하시고 앞으로도 아기랑 귀한 시간들 되시길 바랍니다.

수양 2017-12-16 18:46   좋아요 0 | URL
감사해요.. 겪어보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이 참 많은 거 같아요. 이젠 더 이상 심장이 두근거릴 만한 것도 전율할 만한 것도 그 어떤 새로운 것도 없으리란 그간의 염세적인 전망이 얼마나 치기어린 오만이었는지 깨달았던 며칠이었네요. 얼마나 더 겸허해져야 할런지... 갈 길이 머네요. 지금도 옆에서 자고 있는 아들 보면 눈물나요. 너무나 예쁘고 귀하고 감사해서... 기적 같아요.
 

내가 낳은 아기를 귀히 여기는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 인류를, 온생명을, 세계를 그와 똑같은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다정한 마음이 어떻게 그토록 놀라운 규모로 확장될 수 있을까. 역사에 남은 성인들은 그렇게 했다. 그들을 떠올리면 가없는 존경과 경외심으로 눈물이 날 것 같다.

오래 전에 딱 한 번 친구 따라 성당에 가본 일이 있다. 미사가 거의 끝날 즈음이었던가, 신부님의 제안으로 지구 저편에서 오늘도 기아로 고통받는 난민들을 위해 기도를 드렸었다. 남을 위해 기도해 본 적이 있었던가. 그때가 처음이었다. 기도란 절박한 일을 앞두고 나 잘되게 해달라고나 비는 건 줄 알았는데. 그때 받은 뜨거운 충격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나 자신도 그다지 썩 사랑하지 않는 내가 이제 곧 아기를 낳게 생겼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가 자문해보면 머리만 가렵다. 자신을 비하하고 조소하고 경멸한 적이 얼마나 많았나. 하지만 내 몸에서 나온 아기에 대해서 만큼은 절대적 긍정을, 무조건적 사랑을 퍼붓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마음은 어떻게 확장될 수 있을까. 여전히 알 수는 없지만, 출산이 하나의 작은 씨앗이 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해본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hnine 2017-09-09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가 출산예정일이신지 모르지만 건강한 아기 잘 출산하시기 바랍니다. 아기를 낳고 키우는 일은 축복임에 틀림없는 것 같아요 그만한 댓가를 치르고 받는 축복이기는 하지만요 ^^

수양 2017-09-09 19:34   좋아요 0 | URL
감사해요! 육아야말로 헬게이트라고들 하는데... 아직 겪어보질 못해서... 치러야 할 댓가가 얼만큼인지 상상조차 안 되고 있어요 (겪어봐야지만 비로소 알게 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요ㅠ_ㅠ) 지금은 다만 폭풍 전야의 이 호사스런 고요와 평화를 열심히 누리고 있을 뿐이네요ㅋ

빵가게재습격 2017-09-09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이쿠. 블로그에 낙서 저장하러 잠시 들렀다가 놀라운 소식을 보았네요. 건강한 아기 순산하세요.~~~~~

수양 2017-09-09 19:33   좋아요 1 | URL
재습격님 안녕하신가요^^ 감사해요~ 순산!! 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