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학 - 악에 대한 의식에 관한 에세이 동문선 현대신서 40
알랭 바디우 지음, 이종영 옮김 / 동문선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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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4. 진리들의 윤리학 

(...) 이 말의 뜻은 그의 존재의 모든 것, 그의 몸, 그의 능력들이 어떤 주어진 시점에서 진리가 자신의 길을 펼치는 데 사용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때 인간 동물은 불사적 존재가 되도록 독촉을 받는다. 그러한 ‘정황들’이란 어떠한 것인가? 진리의 정황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무슨 뜻인가? 지금 주어진 것(다양성들, 무한한 차이들, ‘객관적’ 상황들: 예컨대 사랑의 만남 이전의 타인과의 관계에서의 평범한 상태)으로는 그러한 정황을 규정할 수 없다는 점은 명백하다. 그러한 객관성의 유형 속에서 동물은 보편적으로 자기가 할 수 있는껏 헤쳐 나갈 뿐이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가정해야 한다. 주체를 구성하도록 소환하는 것은 잉여의 것이라는 것, 또는 상황에 도래하는 것이지만 그 상황이, 그리고 그 속에서의 일상적 행동 방식이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동물을 뛰어넘는(그렇지만 동물이 그 유일한 담지자인) 주체는 무엇인가가 일어났기를, ‘이미 주어진 것’ 속의 그 일상적 기입으로는 환원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일어났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 잉여적 부가물을 사건이라고 부르자. 그리고 진리가 문제삼아지지 않는(오로지 의견만이 문제삼아지는) 다양태적 존재를 사건과 구분하자. 사건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존재 방식을 결정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건들은 명백히 입증되는 것이다. 

충실성 (...) 그렇다면 진리의 과정은 어떤 ‘결정’으로부터 유래하는가? 이제부터 사건적인 잉여적 부가물의 관점에서 상황에 관계하려는 결정으로부터이다. 이를 충실성이라고 부르자. 사건에 충실하다는 것은, 이 사건이 잉여적으로 부가되는 상황 속에서 움직이면서 사건‘에 따라’ 상황을 사고한다는 것이다. [사건 그 자체의 정언명령(계속하라!)하에서 상황에 대한 지속적 탐구] 물론 이것은 상황 속에서의 새로운 존재 방식과 행동 방식을 발명하도록 구속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사건은 상황의 모든 정규적 법칙들 밖에 위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사건적 충실성은 사건이 발생한 고유한 질서(정치적, 사랑의, 예술적, 과학적) 속에서의 (사고되고 실천되는) 실질적인 단절이다. 

진리 우리는 한 사건에 대한 충실성의 실재적 과정을 ‘진리’(하나의 진리)라고 부른다. 그 충실성이 상황 속에서 생산되는 것이 바로 진리이다. (...) 근본적으로 하나의 진리란, 사건적 잉여 부가가 상황 속에서 긋는 물질적 궤적이다. 따라서 진리는 내재적 단절이다. ‘내재적’이라는 것은, 하나의 진리는 결코 다른 어떤 곳이 아니라 상황 속에서 전개되기 때문이다. (...) 진리에 충실한 과정들은 매번 새롭게 발명되는 내재적 단절들이다. (...) 하나의 진리는 지식들[선재하는 상황 속에서 순환하는 지식들]에 구멍을 낸다. 진리는 지식들에 대해 이질적이다. 그러나 진리는 또한 새로운 지식들의 유일한 원천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는 진리가 [새로운] 지식을 촉성한다고 말할 수 있다. (...) 진리의 힘은 단절의 힘이므로 진리는 기존의 유통되는 지식들에 폭력을 가하면서 상황의 직접성으로 회귀하고, 의견과 의사 소통과 사회성에 자원을 공급하는 그러한 일종의 휴대용 백과사전을 재편한다는 것이다. (...) [진리의 효과는] 지식의 촉성, 의사 소통 코드들의 확장된 수정.

주체 우리는 충실성의 담지자, 즉 진리의 과정의 담지자를 ‘주체’라고 부른다. 따라서 주체는 결코 과정에 앞서 존재하지 않는다. 주체는 사건이 생기기 ‘이전의’ 상황 속에서는 절대적으로 부재한다. 우리는 진리의 과정이 주체를 도출시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우리가 말하는 주체는 어떠한 ‘자연적’ 선재성도 갖지 않는다. (...) 주체들은 진리의 과정의 국지적인 지점이며, [진리의 과정에서 생성되는] 특수하고 비교 불가능한 도출물이다.  

(...) 진리의 과정에 담지자적 지점으로서 속한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것 속에 포착된 ‘어떤 자’는 그 자신, 다른 어떤 것도 아닌 다양태적 개별성이면서, 동시에 그 자신에 대한 초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충실성의 우발적 궤적은 그를 거쳐 지나가고, 그의 개별적 몸을 통과하며, 그를 시간의 내부에서부터 영원성의 순간에 기입시키기 때문이다. (...) 이 모든 것은 진리의 과정의 내재적 단절 속에 포획된다. 그리하여 자기의 고유한 상황(정치적, 과학적, 예술적, 애정적)과 생성하는 진리에 동시에 속하는 ‘어떤 자’는, 그 자신이기도 한 이 알려진 다양성을 관통하여 ‘통과하는’ 이 진리에 의해 내적으로-그러나 알아차리지 못한 채- 단절되거나 구멍난다. 

사건 상황, 의견 및 제도화된 지식과는 '다른 것'을 도래시키는 것이다. 우연적이며 예측 불가능하고 나타나자마자 사라지는 잉여적 부가물이다. (...) 사건들이란 환원 불가능한 개별성들이며, 상황들의 ‘법에 대한 외재성’이다. (...) 사건은 상황[=기존의 지식들의 순환에 의해 구성되는 선재하는 상황]에 의해 알려지지 않은 것을 명명하면서 공백을 명명한다.  

진리의 윤리학 분열을 피한다고 주장하는 합의적 윤리와는 달리 진리의 윤리학은 항상 어느 정도 투쟁적, 전투적이다. 왜냐하면 의견들과 기존 지식들에 대한 그 이질성은 중단, 부패, 인간 동물의 직접적 이해 관심으로의 회귀, 주체에게 도래하는 불사의 존재에 대한 억압 등을 위한 모든 종류의 시도들에 대항하는 투쟁 속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 진정한 주체적 충실성의 적은 바로 닫혀진 집합, 실체, 공동체이다. 우리가 진리와 그 보편적 호소의 우연한 궤적을 부각시켜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러한 관성에 대항해서이다.  

 

5. 악의 문제 

(...) '선'이라는 말로 어떤 자가 진리의 주체의 구성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면, 선이란 바로 삶의 계속되는 교란의 내적 규범이다. (...) [관건은, 진리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로잡힘의 유쾌하고 열광적인 자명성을 뛰어넘어, 과연 그리고 어떻게 내가 그처럼 일차적으로 교란된 것[구멍의 발견, 사건]에 이차적인 역설적 질서[스스로를 알고 있는 어떤 자의 법칙, 자신의 끈질김을 그 끈질김을 파괴하고 교란시키는 것 속에 개입시키는 방식]를 부여하면서, 즉 우리가 '윤리적 일관성'이라고 명명한 것을 부여하면서 삶의 교란의 길을 계속 걸어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다.  

(...) 악은 선과의 만남에 의해서 열려지는 [=선이 전개되는 한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즉 진리 과정 속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다. (...) [진리의 발생 과정에서 일어나는 세 가지 악의 가능성으로는]  

(1)사건이 공백을 호출하는 것이 아니라 선행적 상황의 충만성을 호출하는 경우 ['진리의 실재적 과정'으로부터 도용된 이름들이 '사라진 사건과 관련한 흔적'을 호명하는 것이 아니라, 선재하는 상황의 충만성을 호명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상황의 재편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상황의 강화를 몰고 오는 경우. 이 경우에는 공백을 추방해버리는 부작용, 즉 상황의 '주위'에 공백을 만들어 버리는 부작용(?)이 발생한다. 그러나 추방된 공백은 회귀한다. 억압된 욕망이 반드시 돌아오는 것처럼.]  

(2) 충실성이 쇠퇴하는 경우 [진리의 과정은 내재적 단절의 과정이다. 이러한 단절과 다시 단절하게 되는 것(충실성의 쇠퇴, 주체성의 배반)은 기존의 상황과 의견들의 연속성을 위해서이다. 그런데 이러한 '단절과의 단절' 이후 '계속하시오!'라는 정언명령의 수행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사건에의 충실성'을 '기존의 상황과 의견들의 연속성'을 위해 '양보'해버린다면, 이 또한 '용기 없음'에서 비롯하는 '악'이다.]   

(3) 하나의 진리를 전능한 힘으로 간주할 경우 [진리의 과정은 모든 지식을 관통하듯 기존의 상황과 의견들의 언어를 관통한다. 그런데 진리에 절대적 권한을 부여해서 기존의 의견을 변형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의견들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것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경우, 그리하여 의견들이 진리에 의해 완전히 대체되는 상황을 전망할 경우, 그 결과는 언제나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진리는 자신이 도출시키는 주체들의 구성 속에 '어떤 자'의 지속성을, 진리에 포획된 인간 동물의 이중적인 활동(단절과 지속)을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전제 없이, 진리들의 전능한 힘을 설정해버리면, 그 진리들을 담지하는 공간(?)은 황폐화되고 만다.]  

(...) 진리가 전능한 힘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이 종국적으로 뜻하는 바는, 진리 과정의 생산물인 주체적 언어가 상황의 모든 요소들을 명명할 수 있는 권력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리적 명명이 행해질 수 없는 적어도 하나의 실제적 요소가, 상황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다양성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한 요소는 오직 의견에만, 상황의 언어에만 주어져 있는 것이다. 진리가 촉성할 수 없는 지점이 그곳이다.

나에게도 ‘도래하는 사건’이랄 만한 게 있다면, 현재로서는 그나마 독서의 체험만이 유일한 듯하다. 드물게 만나는, 나를 교란시키는 책들만이 나를 사건의 주체로 만들어주는 유일한 장소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렇게 적고 나면 퍽 우스워지는데, 나의 독서 활동이란 건 냉정히 말해서, 정신적으로 말라비틀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는 종류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윤리적 일관성'이 없다. 아무래도 나는 그다지 사건에 충실한 주체는 못 되는 모양이다. 열량이 높은 이런 책을 읽으면, 마치 거대한 한 자락의 파도에 온몸이 잠시 들려 올려졌다가 내려오는 기분이다. 해표면을 부유하는 작고 가벼운 티끌의 운동처럼. 그러니까 나라는 것은, 사유의 여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 그런 미미한 현상의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 이 책은 시집만큼 얇다. 마음에 드는 챕터는 전문을 베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시를 베끼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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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생크 탈출 - The Shawshank Redemption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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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생물학적 수명에 있어서나 사유의 지평에 있어서나 유한성을 자각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감옥을 체험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감옥은 본질적으로는 거대한 슬픔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감옥 안에서 생각보다 많은 일을 저지를(!) 수 있다. 고은 시인은 장장 30권 분량의 대서사시 '만인보'의 첫 구상을 감옥에서 시작했다고 밝힌 바 있다. 

"몇번의 군법회의 검찰심문이나 재판을 위해 상피고인 문익환과 한 소송차에 실려 가면서도 대화가 금지되었다. 이런 사정이므로 감방의 시간은 훨씬 더 주관적이었다. 길고 길었다. 만인보는 그 긴 시간 속에서 태어난 뜻밖의 훨훨 나는 나비떼였다. 그 나비들은 내 기억의 용량을 확대시켰으며 기억의 이면인 상상의 고도도 섶에 불닿듯이 겁없이 높여주기 시작했다."  -고은, 만물 혹은 만인, 창비 148호, p.315 

이 영화 중반부에서 주인공은 감옥 방송실을 무단점거하고 모차르트 오페라를 내보냈다가 2주간 독방 신세를 지고 나온다. 2주간 견딜 만 했느냐는 동료의 물음에 그는 모차르트가 친구가 되어주었다고 말한다. 독방에 있는 내내 (마음 속으로) 모차르트를 들었다는 것이다. "마음속의 그 어떤 건 아무도 빼앗지 못하고 손댈 수도 없지. 자신만의 것이라고." 이 영화는 교훈적이고도 실용적이다. 감옥에서의 삶의 바람직한 표본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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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사유와 인간 - 푸코의 웃음, 푸코의 신념, 푸코의 역사! 산책자 에쎄 시리즈 4
폴 벤느 지음, 이상길 옮김 / 산책자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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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미학화는 어떤 욕구에 부응하지 않으며(그보다 그것은 욕구를 창출한다), 특정한 목적을 겨냥하지도 않는다. (...) 미학화의 에너지는 설득력 있는 그 어떤 교리에서 나오기보다는, 자유로부터, 자아의 충동으로부터, 신비하고 내밀한 ‘블랙박스’로부터 나온다.” -p.182 

우리가 신뢰하는 모든 절대적인 것들이(심지어는 우리 자신까지도) 계보학적 관점에서는 언제나 임의적이고 우연적이고 돌발적인 탄생 비화를 갖는다는 것. 따라서 우리는 그 어떤 것에도 짓눌릴 필요가 없으며, 반드시 이렇게 살아야 할 당위성도 필연성도 없다는 것. 우리는 우리가 자각하기도 전부터 이미 자유롭다는 것. '미학화'의 에너지는 바로 이 자유로부터 나오는 것이겠다. 아래는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담론’과 ‘장치’ 개념을 요약한 것. 

담론 
-담론은 테마의 변이형이자 특이성이 갖는 형식이다. 담론은 매번 특이적으로, 자의적으로 변전한다. 변전은 우연적이고, 교차하는 인과성들의 복잡한 연쇄로부터 생겨난다.
-담론은 보이지 않는 부분이며, 생각되지 않은 생각이다. 그것은 너무나도 익숙한 투명성이다. 우리는 어떤 시기의 담론의 경계 안에서만 생각한다. 우리가 안다고 믿는 모든 것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제한된다. 우리는 그 한계를 보지 않으면, 그런 것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저자는 담론을 투명한 어항에 비유하고 있다.) 
-각 역사적 구성물, 각 학문 분야, 각 실천의 궁극적인 차이인 이 담론은 한 시대 전체에 공통된 사유 스타일이나 시대정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이데올로기도 아니고 하부구조도 아니고 물적 토대도 아니고 세기의 정신도 아니다.
-담론은 매 시대에 사람들이 모든 것을 지각하고 사유하고 그에 작용하는 안경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은 피지배자들이나 지배자들 모두에게 부과된다.
-담론이라는 말은 하나의 층위가 아니라 일종의 추상, 즉 사건이 특이하다는 사실을 지칭한다. 모터의 작동이 그것의 부속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듯이, 그것은 모터가 작동한다는 추상적 관념인 것.
-담론은 특이성, 시대의 기이성, 장치의 국지적 색깔을 만들어낸다. 
-담론들은 변증법의 논리에 따라 이어지지 않으며, 훌륭한 이유로 인해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대체되지도 않고, 초월적인 법정에 의해 그들 간에 서로 평가받지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담론들 사이에는 사실적인 관계만 있고 당위적인 관계는 없다. 그것들은 서로를 대체하며, 그들의 관계는 이방인, 경쟁자의 관계다. 이성이 아니라 바로 전투가 사유의 핵심적인 관계를 이룬다.

장치
-장치란 담론, 제도, 건축적 설비, 규제결정, 법률, 행정조치, 과학적 언표, 철학적, 도덕적 박애주의적 제안을 포함한다. 간단히 말해, 말해진 것과 말해지지 않은 것의 총체. 과학이든 병원이든 성애든 혹은 군대든 어떤 역사적 구성물을 이루는 법령, 기록, 말 또는 실천들. 관념, 사법, 의학, 치안, 병원제도, 가족적 또는 직업적 규범 등등.  
-장치는 담론을 사회 속에 구현한다. 담론은 장치의 작동 속에서 형성된다. 담론은 그 자체로 장치에 내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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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버는 ‘실물재산’(real property)이나 ‘부동산’(real estate)이라는 말에서의 ‘실’(real)이 라틴어 res, 즉 ‘사물’로부터 유래한 것이 아니라, 스페인어의 real, 즉 ‘왕실의(royal), 왕에 속하는’을 의미하는 말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한다. real의 어원으로 보자면, 소유물이 real한 까닭은 그것이 궁극적으로 국가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소유물이 언제든지 국가의 강제력에 의해 빼앗기거나 파괴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명백한 폭력이다. 그러나 국가가 개인에게 행사하는 폭력은 쉽사리 가시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신체적 상해를 야기할 수 있는 능력에서 어느 한 편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권력의 위치에 있으면 대개는 강제나 요구, 협박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구조적 불평등 관계에서 비롯한 구조적 폭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치우친 상상의 구조’를 만들어 낸다. 

치우친 상상의 구조란 무엇인가. 여기서 그레이버는 ‘상상력’이라는 개념을 두 가지 범주로 구분한다. 첫째는 ‘현실과 이성 사이의 통로’로서의 상상력으로, 이것은 데카르트 이후 상상이 환상이나 공상으로 추락하기 이전, 고대와 중세에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던 상상의 개념이다. 이런 종류의 상상력은 “정적이거나 독립된 것이 절대 아니며, 물리적 세계에서 현실적 효과를 발휘하려는 목적을 지닌 행동의 프로젝트 속에 있고, 그런 까닭으로 인해 언제나 변화하며 적응해 간다.” 

두 번째는 ‘해석 노동’으로서의 상상력이다. 이것은 권력이 작용하는 곳에서 일어나는 ‘상상적 동일시’의 작업이다. 가령, 직원은 자신과 상사와의 관계가 불화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상사의 눈치를 보고, 배려하고, 상사의 속마음은 어떤 상태인지 신경을 쓴다. 이런 종류의 상상을 ‘해석 노동’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말한 '치우친 상상의 구조'란, 불평등과 지배의 구조 속에서 소수의 엘리트만이 전자, 즉 창조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노동에 종사하고, 노동자는 해석 노동에 해당하는 상상력만을 발휘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재밌는 것은, 그레이버가 ‘상상적 동일시에 의한 해석 노동’을 노동의 일차적 형태로 보면서, 맑스가 말한 노동 소외의 개념을 바로 이 해석노동에 의해 발생하는 소외로 본다는 것이다.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본질의 존재 자체를 회의하면서, '소외' 역시 인간의 본질이 있다는 가정에서 비롯한 허구적 개념이라고 말한다. 소외라는 것은 인간이 비본질화된다는 것인데, 만약 인간에게 어떤 항구적인 본성, 본질이 부재하다면 소외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소외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상상적 개념일 뿐이다.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의 이같은 반론에 대해 그레이버는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실제로 있는 것은 무한하게 복합적인 존재들이지만 그런 존재들을 생산해 내기 위해서는 자신과 타인을 통합된 주체로 상상해야 하며, 실제로 있는 것은 사회관계들이 이루는 혼란스럽고 경계가 없는 네트워크지만 그런 사회관계를 생산해 내기 위해서는 통합적이고 경계가 있는 사회를 상상해야 한다. (...) 나는 이것이(소외의 경험이) 구조적 폭력의 필연적 결과로 상상력이 뒤틀리고 파괴되는 결과라고 주장한다.”  

데이비드 그레이버를 비롯한 아나키스트 운동가들은 시위나 퍼포먼스 같은 직접행동 전략을 통해 국가 권력에 반격을 가한다. 그들은 직접행동이 ‘창조적 전복 행위의 상황’들을 창조하고, 행위자들로 하여금 일시적으로나마 자신의 상상의 역량을 되찾을 수 있도록 만든다고 말한다. 아나키스트 선동가 집단 크라임씽크의 선언은 인상적이다. “우리는 현실이라는 직물에 구멍을 내고 우리를 형성할 새로운 현실을 일궈 나가며 우리의 자유를 만들어야 한다. 계속해서 새로운 상황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습관, 관습, 법, 또는 편견의 관성에 방해받지 않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들의 창출은 전적으로 스스로의 몫이다.”   

광우병 파동 때 광화문 촛불 집회에 몇 번 참여한 적이 있다. 사실 나를 집회로 이끈 것은 광우병 걸린 소보다도 광화문 현장의 무정부적 상황이 전해주는 난장의 매력 때문이었던 것 같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건대 당시 광화문에는 별의 별 집단이 다 있었다. 뉴라이트 할아버지, 해병대 아저씨, 극좌파 선동조직, 북치고 춤추는 청년들, 예수천국 불신지옥 팻말 든 아줌마, 붉은 악마, 걸인 등등. 시민이라기엔 너무나 야생적이고, 폭도라기엔 너무나 평화로웠던 사람들.  

내가 진정 놀랐던 것은, 현실이라는 직물에 구멍이 뚫렸을 때 그 구멍으로부터 감당할 수 없이 쏟아져 나오는, 그래서 도무지 수습이 안 되는, 인간들의 엄청난 에너지였다. 분출하는 힘! 탈주하는 힘, 힘들! 우리는 다 함께 정치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불렀지만, 어쩌면 그것은 우리 자신을 이성과 합리로 설명하기 위한 의식적인 명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레이버의 표현을 빌면) 국가권력에 의한 불평등 구조가 낳은 모든 규율과 조직과 체제로부터의 일탈과 해방- 무의식의 심층에서 우리가 열망했던 것은 그런 게 아니었을까. 바로 그러한 염원이 촛불이라는 하나의 즐거운 축제로 승화되었던 게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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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면에 존재하는 것들은 책임을 지지 않는다. 책임은 인간이 지지만, 책임은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책임의 범주를 벗어난 것들, 파시즘이나 자본권력이나 그런 것들은 그저 도저하게 '작용'할 뿐이다.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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