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것은 무엇을 남길까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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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앞에 장사 없다더니 이제는 박완서 선생님 글도 뭔가 예스럽게 느껴진다. 어투도 그렇고 등장하는 물건들과 생활상이 까마득하다. 물론 나에게는 여전히 한국어 글쓰기에 있어서의 부동의 전범이자 교본이며 그 사실은 앞으로도 변함없을 테지만.

대학 시절 이 분이 한 번 우리 학교에 오셨었다. 실제 모습을 뵌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무슨 강연이었던가는 기억 안 난다. 지나치게 수줍어하며 시종 몸 둘 바를 몰라 하시던 모습만 선명하다. 서늘하리만치 날카롭고 깐깐하던 글 속의 인상은 온데간데없이. 다른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돌이켜보면 선생님은 그날 대중 앞에 서게 된 상황이 못내 부담스럽고 불편하셨던 것이다. 미처 거기까진 헤아리지 못하고 그때는 그저 어쩌다 우연히 마스크 벗은 이웃의 낯선 모습을 봤을 때처럼 뜨악하기만 했었다. 글 속의 인물이 글 밖으로 걸어 나왔을 때 얼마나 생경해질 수 있는가에 대한 최초의 아연한 체험이었달까.

그 후로도 운 좋게 몇 번 그런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될 기회가 있었는데, 역시 글 속의 인물은 글 속에서만 만나는 게 좋겠다는 결론이다. 글이라는 것은 어떤 매체보다도 완결된 형태다. 관념 속에서 제멋대로 확고하게 완결이 되어버리는 그런 종류의 것이라서, 글 속의 위인을 글 밖에서 재차 만난다고 해서 딱히 무슨 생산적인 효과가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자칫하면 그저 대상에 대한 인식을 재조정해야 하는 구차스런 일만 생긴다.

다른 차원으로 옮기지 말아야 되는 게 있다. 함부로 손 뻗지 말고 그 자리에 그대로 놔둔 채로 바라보는 편이 더 나은 그런 경우. 글이든 사람이든 무엇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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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스타샤
조지수 지음 / 지혜정원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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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권의 소설로 엮어질 만한 지난날을 보냈다고 누구나들 얘기하지만, 정말 우리에게 소설을 쓸 수 있는 역량이 주어진다면, 그렇다면 단 한 편의 소설로 충분하다고, 아니 단 한 편의 소설을 써야 한다고, 그 단 한 편의 소설을 바로 이렇게 써야 한다고, 표본을 제시하고 있는 것만 같은 소설이랄까. 이 표본에 자전적 요소와 허구의 배합이 어느 정도인지, 이 작가의 또 다른 소설이 있는지는 문제될 것도 없다. 이것은 이미 이 자체로 단 한 편의 결정적 소설이므로.

먹먹한 여운이 며칠은 갈 것 같다. 소설 속 화자는 간결하고 담백한 영국 음악이 좋고 감정 과잉의 슬라브 작곡가들은 싫다 했지만 정작 이 소설은 자칫 신파극으로 치닫기 일보직전으로 흐드러지게 비극적이고 낭만적이다. 과잉으로 따질 것 같으면 차이코프스키를 넘어서 바그너 급이다. 덕분에 신나게 울었다. 소설을 동틀녘이 오도록 울면서 읽어본 게 얼마 만인지. 그것도 자 대고 밑줄 그어가면서. 나에게 아직도 이런 소녀적인 열정(?)이 남아있었나. 새로운 발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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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22 14: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6-23 2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6-24 11: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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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동 사람들
정아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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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인의 말처럼 가난하다고 사랑을 모르겠는가. 가난하다고 해서 폄하되거나 부정당해야 할 삶이란 어디에도 없다. 지금 내 앞에 꽂혀있는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와 <무진기행>이 비교될 수 없는 것처럼. 그러나 아이 낳고 나서 비로소 맨발로 땅 밟고 주위를 둘러보니 현실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가 9800원이고 <무진기행>은 11000원이더라.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가 <무진기행>보다 정확히 1200원 저렴하더라. 일상의 생활을 원활하고 편리하게 운영해 나가려면 부단하고도 치밀한 계산이 필수적이므로 잠정적이든 대대적이든 구체적인 가격이 부득이하게 책정될 밖에. 책에도, 집에도, 동네에도, 나에게도, 너에게도- 즉각적이고 본능적으로 이루어지는 세밀한 가치 측정. 습관적으로 뒤집어보는 너와 나의 가격표. 그런데 이 값이라는 것, 얼마짜리라는 것은 대체 무슨 근거로 어떻게 책정되는 걸까? 참 이런 게 아직도 궁금하다, 아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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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강신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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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에 도취되어 있는 글보다는 김수영에 도취될 수 있게 이끌어주는 글을 기대했건만 과욕이었나. 그럼에도 어쨌든 김수영을 위하여. 단독성=스스로 도는 힘=자유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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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일의 기쁨과 슬픔
장류진 지음 / 창비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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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아이는 마치 그랜드 피아노와 같은 것이었다. 평생 들어본 적 없는 아주 고귀한 소리가 날 것이다. 그 소리를 한번 들어보면 특유의 아름다움에 매혹될 것이다. 너무 매혹된 나머지 그 소리를 알기 이전의 내가 가엾다는 착각까지 하게 될지 모른다. 당연히,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책임감 있는 어른, 합리적인 인간이라면 그걸 놓을 충분한 공간이 주어져 있는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집 안에 거대한 그랜드 피아노를 들이기 전에 그것을 놓을 각이 나오는지를 먼저 판단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부족해도 어떻게든 욱여넣고 살면 살아진다는 것도 알고 있다. 물론 살 수는 있을 것이다. 집이 아니라 피아노 보관소 같은 느낌으로 살면 될 것이다. 그랜드 피아노가 거실 대부분을 차지하게 될 테고 패브릭 소파와 소파스툴, 원목 거실장과 몬스테라 화분은 둘 엄두도 못 낼 것이다. 거실을 통해 부엌으로 가려면 한가운데로 가로지르지 못하고 발뒤꿈치를 들고 피아노의 뒷면과 벽 사이로 겨우 지나가거나, 기어서 피아노 밑을 통과해야 할 것이다. 우리 부부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192~193 /326)

 

아이를 덩치 큰 애장품에 빗댈 수야 없지. 비유가 아주 적절하다곤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눈물의 핵공감이- 내게도 자식은 분명 인생 최고의 사치 맞다. 내 주제에 말도 안되는 그런 사치. 근데 우여곡절 끝에 어찌저찌 그랜드피아노 우겨넣고 살아보니 또 어떻게든 살아지고 소파스툴이랑 몬스테라는 생각도 안남. 희한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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