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로얄에서 다니엘 나쿠치오 y 크리스티나 소사 공연을 봤다. 독보적이었다. 올해 내가 본 마에스트로 커플 중에, 아니 내가 이제까지 본 남녀 이인무 중에 최고였다. 형언할 수 없는 감동. 탱고를 춘다는 것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된 공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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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롱가에 가서야 비로소 온전한 나로서 있을 수 있게 된다. 사회적 지위, 신분, 역할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고유한 나 자신으로. 이곳에서는 이름, 학력, 직업, 재산, 혼인여부, 자식유무 상관없이 오로지 얼굴과 몸뚱이로만 인식된다. 표정과 육체, 육체의 움직임과 촉감만으로 규정되고 평가된다. 밀롱가에 가서야 비로소 내가 제대로 된 한 마리 생물이 된 거 같은 기분이 든다. 내가 유일하게 나의 생물성을 자각할 수 있는 이 도시의 유일한 망명지 같은 곳이다 여기는 나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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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01 00: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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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02 08: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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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02 08: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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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잼'과 도연명(陶淵明)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어떤 사람들이 탱고를 출까. 탱고 추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이 시가 그 답이 될 수 있을까. 내가 이곳을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며 탱고는 그저 탱고일 뿐이라고 누군가로부터 충고를 얻어듣기도 했지만, 그래도 나는 어쩔 수 없이 이곳이 쓸쓸해 보인다. 이곳 특유의 과도한 화려함이 여기를 더욱 쓸쓸해 보이도록 만드는 것 같다. 내면의 한기(寒氣)와 결핍을 감추기 위한 가련한 위장술처럼 여겨져서. 가만보면 다들 외롭고 높고 쓸쓸한 사람들. 초생달 같고 바구지꽃 같은 사람들. (탱고 음악 때문에 더 이렇게 느껴지는 걸까. 다소 거창한 표현이지만 그래도 확실히 이 음악이 함축하는 어떤 세계관 같은 게 있는 것 같다. 흥겨운 비극성이라고 해야 할까. 이 음악이 갖는 정서와 세계관에 깊이 동조하는 이들만이 이 춤에 오래도록 머무는 것 같단 생각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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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6 1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16 11: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쓰는 패턴이 다채롭지 않아도 한 딴다 동안 깊은 대화를 나눴다는 생각이 드는 로들이 있다. 오초 히로 꾸니따 기본적인 동작들 무난하게 이거저거 다 하면서 췄는데도 추고 나서 마냥 피곤하기만 한 경우도 있고. 전자는 추고 나면 꼬르띠나 내내 여운이 남아서 그 사람에 대해 곱씹어보게 된다. 후자는 인간 자체가 시시하게 생각되어버린다. 이건 단순히 춤을 잘 추느냐 못 추느냐, 춤이 나랑 맞느냐 안 맞느냐 하고는 조금 다른 차원의 문제인 듯. 나이가 변수인가 싶기도 하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거 같고. 춤에 대한 주관적인 느낌만으로 상대방의 인성과 품격 그리고 삶을 살아가는 자세 따위를 속단해버린다는 게 편협한 일임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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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한 여자가 좋다. 야한 여자한테서는 활기와 건강함, 질긴 생명력이 느껴진다. 밀롱가엔 야한 여자들이 한둘이 아니고 심지어 그런 여자들이 얇은 저지 드레스 한 장만 걸치고 탐스런 엉덩이를 우아하게 휘두르며 춤까지 추는데, 그 광경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살아있음을, 막 잡은 황금빛 잉어처럼 팔닥팔닥 살아있음을 두 눈으로 확신하게 된다. 결혼을 했어도, 아이를 낳아도, 할머니가 되어서도 야하고 싶다 나도. 이 중에 하나로서. 육체와 정신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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