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성은 하나의 시대에 다양한 현상들이 공존하는 것을 지칭하는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시대를 달리하면서도 공통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현상을 가리킨다. 셰익스피어가 창조한 언어, 인물, 기법 등은 이후의 작가들에게만 지대한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다. 영어권 사람들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지도 모른 채 셰익스피어의 말과 표현법들을 일상적으로 사용한다. 이를테면, 우리가 흔히 쓰는 "허공으로 사라져버렸다 melted intothin air"는 『폭풍』에서 프로스페로가 처음 한 말이다. 이아고, 에드먼드, 리처드 3세와 같은 악당들이 없었더라면 결코 존재할 수 없었을 근대소설의 주인공들도 부지기수이다. 쥘리앵 소렐, 라스콜리니코프, 스타브로긴 등이 그런 인물들이다. 작품 속 인물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헤겔,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 데리다 등을 읽을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셰익스피어와 마주치게 된다. 이런 점에서셰익스피어와 동시대인이 되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선택 사항이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문학에는 예술성과 대중성이 분리할수 없을 만큼 자연스럽게 융화되어 있고, 근대문학이 삭제해버린인간의 세속적 욕망과 본성이 풍부하게 녹아들어 있다. 그래서 그의 문학은 "한 시대가 아니라 모든 시대를 위해 존재"(벤 존슨)하게된 것이다.
- P15

스트랫퍼드를 떠나는 순간부터 이시골 청년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미래로부터오는 빛이 희미할수록 더 치열하게 걸었으리라. 그렇게 온몸으로맞닥뜨린 세계의 단면들이 그의 신체 속으로 침투하여 새로운 정신을 빚어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에게 스트랫퍼드와 런던사이의 거리는 공간적 개념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게 아닐 것이다.
그것은 ‘윌리엄‘과 ‘셰익스피어‘ 사이의 거리, 스트랫퍼드가 빚어낸 청년과 세계적인 극작가 사이의 거리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미지의 8년간은, 그가 어디서 무엇을 했든, 자신의 존재를 새롭게벼려내려는 의지가 들끓었던 용광로 같은 것이었으리라.
- P56

학교 가기 싫어서책가방을 메며 징징거리는 학생달팽이처럼 기어가는 빛나는 아침 얼굴.
『뜻대로 하세요』, 2.7.144-146 - P62

이 작품에서 리어의 부조리한 언어와 글로스터의 조리있는 언어는 대비적 관계 속에서 서로를 보완한다. 셰익스피어는 이처럼이질적 성격을 지닌 인물들을 병렬함으로써 노년 문제를 바라보는 시야를 넓혀놓았고, 모든 노인은 리어와 글로스터 사이에 놓일수 있게 되었다.
- P91

유럽의 석조 건축물들은 밀도가 높은 물질적 시간성을 간직하고 있지만, 나는 그 웅장하고 정교한 건축물들에 다소 물려 있었다. 왕궁과 성을 우러러보기도 했지만, 그와 동시에 알 수 없는 위화감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석조 건물 특유의 견고함이 안과 밖을완전히 단절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안에 있는 사람과밖에 있는 사람 간의 상대에 대한 이미지는 시선의 방향만큼이나 정반대였을 것이다.  - P138

당신들이 그들을 샀으니까요. 제가 한 말씀 드리지요,
‘그들을 놓아주시오, 그들을 당신네 상속자들과 결혼시키시오.
왜 그들이 짐을 지고 땀을 흘립니까? 그들의 침대를당신네 침대처럼 푹신하게 해주시오, 그리고 그들의 입맛도마찬가지 음식으로 맞춰주시오.‘ 당신들은 이렇게 말할 거요.
"노예들은 우리 거야. 저도 당신들에게 그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그에게 요구하는 살 1파운드는비싸게 산 것이오.. 그건 내 것이니, 내가 가질 거요.
당신들이 거절한다면, 당신네 법은 엉터리요!
4.1.90-100 - P218

그 복원‘
이 오래 흘러온 시간의 흔적들을 지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게오.
르크 지멜Georg Simmel은 폐허, 하나의 미학적 시론」에서 폐허의 매력‘은 인간이 만든 것을 자연물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라고 썼다.
- P280

 순결한 사람이 자신의 순결을 증명해야 하고 죄 없는 사람이 자신의 무죄를 증명해야 하는 사회는 불행한 사회라는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런 불행은 죽은 자를 살려내는 마법으로 위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비극이든 희극이든질투의 뒤끝은 언제나 씁쓸하다.
- P270

‘대중성이 풍부하다‘는 말은 일차적으로 당대의 대중적 현실과일상적 생활감각이 풍부하게 녹아들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예술성을 담보하지 못한 대중성은 문학작품을 통속적 수준에 머물게 한다. 대중성과 예술성은 하나가 결핍되면 다른 쪽도상처를 입게 되는 그런 관계 속에서 작동한다. 셰익스피어가 빚어낸 대중성과 예술성 사이의 상호작용은 세계문학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진폭이 크다. 그래서 그의 작품세계는 당시 대중의 환호와 지금 비평가의 탄성이 동시에 터져나오는 시공간이 된다! 이것은 결코 나 하나만의 상상이 아니다.
- P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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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가 잠시 주춤했던 지난 8월 1일
코로나 유행 이후 처음으로 친구들과 1박2일 여행을 갔었다.

많이 돌아다니지 말고 그냥 오랫만에 얼굴보고 수다떨고
애들 없이 우리끼리 하룻밤 쉬다오자고.
산청의 한옥을 예약했다.
hnine님 글을 보니 그날 한옥의 여유가 문득 그리워졌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그 넓은 부지에 손님이라곤 우리밖에 없었다. 다른 곳은 바글바글하던데....
주인조차도 얼굴한번 안 보여주고 다음날 그냥 알아서 나가면 된다고 전화만..... ㅎㅎ

낮까지만 해도 미칠듯이 뜨겁던 날씨가 오후에 잠시 비를 긋더니 바람이 살랑살랑, 한없이 정겹고 소담한 시간이다.


모쪼록 이 사태가 하루라도 빨리 끝나기를....
일상의 소중함이 더없이 크게 다가오는 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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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0-09-06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가 오던 날이었나봐요 사진만 보아도 고즈넉한 운치가 좋네요.... 아무쪼록 이 사태가 빨리 끝나기를 기다립니다....

바람돌이 2020-09-06 15:31   좋아요 1 | URL
오후에 잠시 비가 왔어요. 그래서 날은 선선하고 모기는 없고 이게 무슨 행운인가싶게 모든게 좋았던 날입니다.

막시무스 2020-09-06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네요! 한옥의 처마와 담장, 그리고 담장 너머의 나무와 하늘이 하나의 풍경으로 묶여있는게 너무 좋습니다!ㅎ 즐건 주일되십시요!

바람돌이 2020-09-06 15:34   좋아요 1 | URL
한옥의 멋이죠. ㅎㅎ 하지만 전 저런집을 가지고싶진 않아요. 저게 내 집이 되는순간 끊임없는 청소의 노동에 짓눌릴거니까요. ㅎㅎ그냥 하루 이틀 빌려서 노는게 최고예요. ^^

초딩 2020-09-06 1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아아 너무 좋아요
너무~!
저기서 시간 가는 줄 세상 돌가는 줄 모르고 있고 싶어요

바람돌이 2020-09-06 19:14   좋아요 1 | URL
사진에 안나왔는데 대청마루가 정말 좋습니다. 밤늦게까지 달빛을 받으며 음주를.... ㅎㅎ

hnine 2020-09-06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청 어딘가요? 사진도 모두 잘 찍으셨네요!

바람돌이 2020-09-06 19:16   좋아요 0 | URL
산청 선비문화원이라는 곳입니다. 혹시 가시려면 꼭 한옥에 묵고싶다고 확인해야 합니다. 잘못하면 학교아이들 수련원에 묵을수도 있어요. ㅎㅎ 아 저기 묵으니까 선물로 부채랑 책을 주더라구요. 남명조식.... 책은 음 재미가 없었습니다.ㅎㅎ

다락방 2020-09-07 0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너무 좋으네요. 저도 코로나가 좀 안정되면 한 번 가봐야겠어요. 겨울에 가도 좋을 것 같아요. 가만 앉아서 눈이 오는 걸 봐도 무척 고요하고 좋을듯요!

바람돌이 2020-09-07 15:54   좋아요 0 | URL
음 산청은 겨울에 눈이 거의 안옵니다. 춥기만 하죠... ㅠ.ㅠ

북극곰 2020-09-07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아요 . 언니가 산청에서 일을 하고 있어서 이번에도 잠시 내려갔었는게 저렇게 좋은 곳이 있는 줄 몰랐어요! 여랭가서 눈에 담는 저런 풍경 너무 그립습니다

바람돌이 2020-09-07 23:06   좋아요 0 | URL
저도 빨리 자유롭게 여행다닐수 있는 날들이 정말 그립네요. 산청은 어찌보면 참 메마른 동네다 싶다가도 의외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더라고요
 

이렇게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거나움직일 때,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생각하지 않을 때, 나는죽음을 느껴요. 매우 정지된 지금을요. 너무 정지되어서,
지금 바로 뒤를 나는 상상할 수 없고요 궁금하지도 않아요. 지금이라는 것은 이미 여기 와 있잖아요. 그냥 슥..… - P113

죽음과는 얇은 금속판 한겹만을 남겨둔 채 체공하고 있었지만 그는 분명히 환멸의 반대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었어요. 그는 그것을 가지게 된 거죠. 탈출의 경험을내게는 그것이 없어.
나는 내 환멸로부터 탈출하여 향해 갈 곳도 없는데요.
- P114

....dd가 살았다면, 그래서 그들 공동의 삶이계속되었더라면, 자신과 dd도 마침내 이런 광경에 도달하게 되었을지를 생각해보았다. 잔혹한 광경이었다. 보잘것없고 혐오스러웠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얼마나 아름다울까. dd와 더불어 삶에 권태롭게 되는 것. 두 사람 각자와 공동의 사물에 둘러싸인 채 조금씩 닳아 사라져가는것, 삶이 없고, 닳아 없어질 물리적 형태도 없으므로 dd에게는 내내 도래하지 않을 광경이었다. - P138

차벽은 말이지 차벽은......벽으로써 시위 관리에 동원되지만 시위대가 그것에 손을 대고흔들기 시작하는 순간 그것은 더는 벽이 아니고 재산이되잖아. 국가의 재산, 시위대의 움직임은 가로막힌 길을뚫는 돌파 행위가 아니고 재산 손괴 행위가 된다. 관리자들이 행복해진다. 관리가 쉬워지니까. 더는 움직이지못하도록 막아둔 뒤, 시위대가 다녀간 자리에 남은 것들을 텔레비전이나 사진으로 대중에게 보여주면 되는 것이다. 파손된 차벽과 도로에 널린 깨진 유리조각들을 부서진 재물, 재산을, 운동이 아닌 관리자의 방향으로 대중의 공감이나 이입이 이루어지도록, 그렇게 되도록 하는데에 재산 손괴, 만큼 효과적인 광경도 없을 거라고 서수경은 말했다.  - P189

.....좋은 이야기를 읽고 자랐으면 좋겠어. 왜냐하면독서의 경험이란 앞선 삶의 문장을, 즉 앞선 세대의 삶 형태들을 양손에 받아드는 경험이기도 하니까. 이 생각과유사한 문장을 나는 최근 어떤 책에서 보았고 그 책의 저자는 아마도 롤랑 바르뜨였을 것이다. "산다는 것은 (…)우리보다 먼저 존재했던 문장들로부터 삶의 형태들을 받는 것"......(『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민음사 2015) - P211

하지만 ‘나를 목격하고 있는 이 사람이 빨리 내 눈앞에서사라졌으면 좋겠다‘, 어른이 되는 계기라는 것을 그런 감정과 우연한 경험의 조합으로 받곤 하는 삶에 나타나는어른이란 어떤 인간일까를 생각하느라고 나는 잠을이룰 수가 아니야 실은 하필 그런 일을 겪고 어른이 되어버린 사람이 김소리, 내 동생이었다는 점이 속상해 나는그 선생을 도저히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고,
- P242

20년을 함께 살아왔지만 유사시, 우리에게는 서로의 유사가 전달되지 않는다. 서수경에게 위급한 일이 생기면 그연락은 서수경의 가족에게 갈 것이다. 내게 위급한 일이생기면 김소리나 내 부모에게 갈 것이다.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하더라도 서수경과 내가 조금 더 염두에 두는 가능성은 서로에게 연락이 오지 않을 경우이고 우리는 그 가능성과 살아가며 끊임없이 서로의 죽음을, 혹은죽음에 이르는 순간을 가정한다. 조금씩 독을 삼키듯 상실을 경험한다. 일상에서 내 기도의 내용은 서수경의 귀가이다. 서수경이 매일 집으로 돌아온다. 그는 저 바깥에서, 매일의 죽음에서 돌아온다.
- P257

한 사람이 말하는 상식이란 그의 생각하는 면보다는 그가 생각하지 않는 면을 더 자주 보여주며, 그의 생각하지 않는 면은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비교적 적나라하게 보여주는데 당신은 방금 너무 적나라했다고 말해주고 싶다고, 그렇지. 적나라赤裸裸. 그 광경은 마치 투명한 창을 통해 보이는 남의집 베란다처럼…… 우리는 왜 때때로 베란다를 청소하듯그것을 점검해보지 않는 것일까.  - P266

묵자의 상태가 상식이라서 그걸 부를 필요도 없어, 그것이 너무 당연해 우리는 그것을 지칭조차 하지 않는다..........토요일 오전 열한시라는 묵자의 세계를 사는 사람은 묵자를 읽지 못하는 누군가가 용산역 1번 플랫폼에도 있을 수있으며 그가 동행인 없이 홀로 서서 열차를 기다릴 수도있는 상황을 가정하지 않는다. 보는 이는 보지 못하는 이를 보지 못한다. 보지 못하는 이가 왜 거기 있는가? 그는고려되지 않는다. 용산역 1번 플랫폼의 상식에 그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는 거기 없다…… 나는 아직 그것을 볼 수있었으므로 거기 있었지만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상식의세계라는 묵자의 플랫폼에서, 다시 한번,
- P275

누군가 그에게,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그들이, 그러니까이스라엘 사람들이 팔레스타인을 대하는 태도를 우리가어떻게 생각하면 좋은가,라고 울적하게 묻자 도슨트는 완고하고도 묵직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위 캔트, 저지 뎀We can‘t judge them,
그 말은 내게 주문처럼 들렸다.
아마도 그는 그 장소에서 그 대답을 반복해왔을 거라고서수경은 말했다. 사람들이 자꾸 물을 테니까. 거길 방문하는 세계인들이, 그렇겠지. 그러니까 그렇게 즉시 대답할 수 있었겠지. 우리는 그들을 재단할 수 없어. 우리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어. 몇번이고 반복된 질문에 훈련되고준비된 표정과 어조, 그런데 그것은 그 자체로 이미 상투어가 아닐까? 2013년의 비르케나우에서 우리가 들은 대답은 한나 아렌트가 "두려운 교훈" 이라고 한 그것, 말과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상투성과 어느 정도의 거리를두었을까… - P282

서수경과 나는 그 침묵 속에서 함께 침묵하는 동안 평화적 시위를 원하는 사람들의 갈망에서 상처를 보았다. 누군가 다치는 광경을 우리는 너무 보았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 누구도 다치게 하지 말라.
우리는 이미 너무 겪었다고,
- P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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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미적지근한 온기를 참을 수 없어 d는 사물과의 접촉을 줄였다. 모든 것이 이렇게 될 수는 없으니 변한 것은 내 쪽이라고 d는 생각했다.
내가 차가워졌다,라고.
- P11

dd를 만난 이후로는 dd가 d의 신성한 것이 되었다. dd는d에게 계속되어야 하는 말, 처음 만난 상태 그대로, 온전해야 하는 몸이었다. d는 dd를 만나 자신의 노동이 신성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랑을 가진 인간이 아름다.
울 수 있으며,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아름답다고 여길수 있는 마음으로도 인간은 서글퍼지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 P18

그 좋은 것은 언제든 전쟁 한번으로, 하루 혹은 반나절도되지 않는 폭격으로 아무것도 아닌 것, 잿더미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지……… 젊은 양반은 그것을 아는가우리는 사무치게 그것을 알아…… 젊었을 때 첫번째 전쟁을 겪은 그녀들은 자신들의 인생 중에 언제고 두번째 전쟁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생각이라기보다는 거의 무의식적인 확신과 예감을 지닌 채 살아왔기 때문에, 부지불식그와 같은 방식으로 과거의 여전한 현재를 이따금 확인하게 되며, 그런 것을 보면 자신들의 내적 삶에서 …… 그러니까 그 맴속에서…전쟁은 완전하게 중단된 적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 P28

대낮에 내가 너무 야속하고 부끄러워서 눈물이났어. 그때 내가 매우 놀라며 깨달았지. 내가 우는구나 부끄러운 것을 다 느끼는구나 살아서 이렇게 있구나. 그러자 이번엔 그게 기쁘고 막막해 눈물이 났다. 내가 살아야겠다 이왕에 여기까지 살았으니 끝내 살아보자는 뚜렷한맴이 들었어.…… 그 확고하고도 뚜렷한 맴을 먹게 된 것이 부끄럼 덕이었으니 그것이 나를 살렸지.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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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존과 함께 보냈던 길고 긴 나날을 돌이켜보았다. 그런데 기억에 남은 날들은 너무도 적었다. 끝없는 시간을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기에 결국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선택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삶을 낭비했다. 그래서 기꺼이내 삶에 플라스티네이션 처리를 했다. 고치 속에 숨은 누에처럼.
세계 곳곳에서 삶이 영원히 이어졌지만, 사람들은 전보다 더 행복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함께 나이 들지 않았다. 함께 성숙하지도않았다. 아내와 남편은 결혼식 때 한 선서를 지키지 않았고, 이제 그들을 갈라놓는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권태였다.
- P59

우리는 매듭 덕분에 선조들의 지혜와 목소리를 고스란히 살려 대대로 전해 왔다. 기다란 삼줄, 부드럽고 탄력 있는 삼으로 만든 줄을길게 펴서 고아 놓으면 적당한 탄력이 생겨서 똬리를 튼다. 그 줄을묶어서 모양이 제각각이 되도록 만든 서른한 가지 매듭은 저마다입술과 혀의 모양에 대응하여 각기 다른 음절을 표시한다. 불교 승려의 염주처럼 둥글게 묶은 삼줄의 매듭은 단어와 문장, 이야기를형성한다. 그리하여 말은 실체와 형상을 부여받는다. 줄을 더듬어내려가다 보면 매듭을 묶은 이의 생각이 손끝에 느껴지고 그 사람의 목소리가 뼛속에 전해진다.
- P116

"그런데 당신도 우리 매듭 책에 담긴 말을 배웠잖아. 우리 난족의매듭 묶기에서 우러난 지혜를, 그렇다면 당신도 우리한테 해마다.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건가?"
토무는 껄껄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보아하니 마음이 편치는않은 모양이었다.
"아뇨,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제가 촌장님한테 배운 것들은.…오래됐으니까요. 보호받는 대상이 아니에요. 저작권으로도, 특허권으로도"
- P132

늙어 가다 보면 사람은 점점 파충류와 비슷해진다. 아침에 햇볕을 흠뻑 쬐지 않으면 돌아다니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다음번에 베스가 들를 때 인공 태양등을 사다 달라고 부탁해야겠다. 겨울 아침에는 볕을 쬐기가 힘드니까.
- P171

홍옥을 먹을 때면 내가 정말로 살아 있는 느낌이 난다. 세포 하나하나가 내게 이렇게 말한다.
"그래, 아아, 이거야, 더 줘, 부탁이야.‘
내 생각에 몸은 저 나름의 지능이 있다. 정신은 결코 하지 못할 방식으로,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말할 줄 아니까.
- P178

엄마는 내가 태어나고 얼마 안 돼서 밀물에 휩쓸려 돌아가셨다.
아빠가 탑을 세우기로 마음먹은 자리 근처에서,
"밤에 바닷물 속에서 해파리의 빛이 깜박거릴 때면, 네 엄마의 반짝이던 눈이 보여, 파도가 우리 탑에 부딪혀 부서질 때면 네 엄마가부엌에서 냄비를 덜그럭거리던 소리가 들리고, 그런데 내가 어떻게떠나겠니? 네 엄마가 저 바다의 일부가 돼 버렸는데."
사랑이 아빠를 묶어 놓았다. 엄마에게, 저 끈질긴 밀물에게.
- P199

"안 돼. 그 사람들은 죽음을 피해 달아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거야. 하지만 현실 세계를 포기하고 시뮬레이션이 되기를 선택하는 순간, 그 사람들은 죽어. 죄악이 존재하는 한 죽음도 존재해야 해. 삶이 의미를 얻는 수단이 바로 죽음이니까."
-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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