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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 - 개정판
양귀자 지음 / 쓰다 / 2013년 4월
평점 :
1998년에 출간된 이 소설을 지금에서야 읽어면서 아 이 책을 지금 읽어서 참 다행이다라고 생각한다. 20대나 30대에 이 책을 읽었다면 나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말로는 세상 사는게 쉽지 않다고 했지만 사실 맘속으로는 세상 모두가 만만하던 그 시절, 세상이 내 맘먹기에 달린 듯 보이는 대책없이 낙관적이고 대책없이 오만하던 그 시절에 이 책을 읽었다면 아마 나는 이 책에 혹평을 쏟아부었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자신의 인생에 대해 스스로 서기보다는 어머니와 이모가 살아왔던 삶을 비교하며 결국 결혼으로 탈출구를 만들려는 주인공의 무기력함에 실망과 함께 뭔가 그럴듯한 충고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여성이 한 명의 인간으로 올곧고 당당하게 서기 힘들었던 당대 사회에 결국 어정쩡하게 합류하는 주인공에 실망했을 수도 있고.... 또 어쩌면 내 어머니가 살아왔던 생을 생각하며 울화통을 터뜨렸을지도 모르고.... 그럼에도 그 시절의 내가 이 책을 좋아하지 않았을거라고 하는건 역시 주인공의 선택을 이해하고 싶지 않아서가 가장 클것이다. 이해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절절하게 이해되서 이해하고 싶지 않은 마음말이다. 더 나은 세상으로 바꾸어야 하고 바뀔 수 있다고 믿고, 문학이 그 역할의 한 부분이라도 당연히 담당해야 한다고 믿던 그 때의 오만함은 그렇게 이 책을 읽고 어느 한 구석에 처박아 뒀을 것이고 그리고 다시는 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세상을 좀 더 오래 살았다고 딱히 지혜로워지지도 않은 내가 이 책을 단숨에 읽으면서 그 모든 마음에 들지 않는 서사를 뛰어넘어 깊은 감동과 위로를 받은 건 어떤 지점이었을까? 그것은 문장들이었다. 서사를 뛰어넘는 삶의 통찰을 보여주는 빛나는 문장들. 단순히 스토리라인이 어떻게 흘러가는가가 아니라 삶에 대해, 인간들간의 관계에 대해 묘사하는 문장들이 너무 마음 깊이 들어왔다.
우리들은 남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기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납득할 수 없어 한다. .... 나의 인생에 있어 '나'는 당연히 행복해야 할 존재였다. 나라는 개체는 이다지도 나에게 소중한 것이었다. -22쪽
이다지도 나에게 소중한 내가 행복하지 않다니, 당연히 나는 나의 행복을 위해 전 생애를 걸고라도 탐구하고 싶은 마음을 먹는 대목이다. 여성의 행복은 가정의 행복과 직결되고,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는 말이 아직도 남아있던 시절에 이렇게 다른 마음을 먹는 여자 아이들이 나오고 있었다. 가난과 기댈 데 하나 없는 가족사 속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할 수 있는 선택은 사실상 얼마 없었고, 그러나 그 얼마 되지 않는 선택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삶은 눈물겹다. 어느샌가 나는 '그래 아무것도 보지마. 너만 생각해'라며 도덕과 당위가 아니라 그저 주인공의 마음을 위로하고 함께 하고 응원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아버지의 삶은 아버지의 것이었고 어머니의 삶은 어머니의 것이었다. 나는 한 번도 어머니에게 왜 이렇게 사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것은 아무리 어머니라 해도 예의에 벗어나는 질문이었다. 누군가 내게 그런 실례의 발언을 하는 것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사람과는 두 번 다시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다. 상처받은 내 자존심이 용서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51쪽
가족의 일원으로서만 존재하는 개인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굴레에서 정서적 독립을 선언하는 진진. 이것은 비단 주인공 진진만의 독립이 아니라 가족으로서의 아버지 어머니가 아니라 독립된 각각의 개인으로서의 그들의 삶을 존중하고자 하는 새로운 가족상의 제시이다.(물론 이것은 오늘날에 있어서는 당연시 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일부만 그러하다. 저 문장의 묘미는 아버지, 어머니라는 단어를 아들 딸이라는 단어로 대체하면 지금의 가족의 문제로 치환되어 진다. 자식의 독립된 삶을 인정하지 않는, 그래서 자식의 인생이 내 인생인 줄 아는 부모들이 넘쳐나는 시대가 지금이다. )
사람들은 작은 상처는 오래 간직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버린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는 꼭 돌려주지 않아도 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장부책 계산을 그렇게 한다. - 127쪽
그럼에도 가족은 함께 사는 존재이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받고 산다. 책 속에서 이모부가 내 집의 가난과 곤란을 구하기 위해 큰 돈을 선뜻 내준 은혜는, 두 집의 자식들이 함께 앉은 식탁에서 자기 자식에게만 생선을 얹어주는 이모부의 사소한 이기적 행위에 의해 잊혀지고 원망으로 덮여버린다. 가족의 일상이란 그러하다. 가족 서로가 일상적으로 서로에게 행하는 희생은 작은 섭섭함에 의해 늘 묻힌다. 좀 더 나가면 다른 관계라고 해서 딱히 다르지 않다. 큰 도움을 받고도 상대가 한 작은 타박에 상처받고 미움을 기른다. 사실 그것은 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였던 사람의 마지막 자존심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자기 자식에게만 생선을 얹어주는 행위를 웃어넘길 수 있으려면 생선 따위가 우스워야 한다. 내가 언제나 생선 정도는 식탁위에 올릴 수 있어야 그것을 해프닝으로 지나칠 수 있다. 그러나 생선 한마리 식탁에 올리는 것이 버거운 사람은 그 장면에서 자존감이 무너지고, 내 자식이 무시받았다 여겨지는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을 붙잡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사실은 고맙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식에게 생선따위로 주눅들게 해야 하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 상대를 원망하게 하는 것이다. 나를 죽일 수 없으니 타인을 죽이는 것이다. 식탁의 생선 반찬 하나로 인간이 가진 이 지독한 에고와 인간관계의 본질을 보여주는 이 문장을 어찌할까. 그저 감탄하는 것이 독자인 나의 마음일 뿐이다.
불행의 과장법, 그것이 어머니와 내가 다른 점이었다. 내가 어머니에게 진저리를 치는 부분도 여기에 있었다. 그렇지만 어머니를 비난할 수는 없었다. 과장법가지 동원해서 강조하고 또 강조해야 하는 것이 기껏해야 불행뿐인 삶이라면 그것을 비난할 자격을 가진 사람은 없다. 몸서리를 칠 수는 있지만. -153쪽
그건 옳지 못한 거야, 라는 주리의 관용구. 주리는 바로 그 관용구 밑에 숨어서 더 이상은 세상 속으로 나오지 않을 모양이었다. 주리는 내 아버지를 킹콩으로 비유했던 그 어린 시절에서 한 발자국도 더 성장하지 않은 것이었다. - 178쪽
책 속에서 극명하게 대비되는 삶은 쌍둥이였던 어머니와 이모의 삶이다. 가난과 잇달아 닥치는 불행속에서 악다구니를 쓰며 살아남아야 하는 어머니와 우아한 사모님으로 그림같은 삶을 사는 이모. 언제나 강조할 것이 불행한 삶밖에 없는 어머니. 삶의 풍파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도 되는 철저히 보호받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선하고 착하고 우아한 이모와 그 딸. 이모의 딸이자 사촌인 주리에 대해 하는 이야기지만 결국 소설의 마지막에 가면 저 세상 속으로 나오지 않은 삶은 이모의 삶이기도 했다.소설은 이 대비되는 삶을 계속 비교하고 보여준다. 그러나 똑같은 삶에 대해서도 주인공은 이모에 대해서는 동경하고 저 사람이 내 엄마였다면이라고 끊임없이 바라지만, 이모의 딸이 이모와 똑같은 모습을 보여줄 때는 삶에 대한 무지를 비웃는다. 이것은 명백히 이율배반이지만, 주인공은 그 이율배반을 깨닫지 못한다. 나를 아껴주고 보살펴주는 이모의 새장 속 삶은 우아함이지만, 나의 경쟁자인 사촌 주리의 새장 속 삶은 무지가 되는 것이다. 이것 역시 인간이 자신의 자존을 지키는 한 방법이기도 하다. 저 이율배반을 인정해버리는 순간 나는 삶의 든든한 기둥을 잃어야 하기에 나를 보호하기 위해 나는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나도 세월을 따라 살아갔다. 살아봐야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아직 나는 그 모순을 이해할 수 없지만 받아들일 수는 있다. 삶과 죽음은 결국 한통속이다. 속지 말아야 한다. -291쪽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ㅇ로 들을 수 없다. 뜨거운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우이독경, 사람들은 모두 소의 귀를 가졌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일 년쯤 전, 내가 한 말을 수정한다.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296쪽
책의 마지막에 이르면 주인공의 선택이 납득된다. 내 앞에 펼쳐진 삶의 길 2가지가 하나는 내가 살아본 삶의 반복이 될 가능성이 뻔히 보이는 길이고, 나머지 하나의 길은 살아보지 않은 길이지만 그것이 결코 행복은 아니었던 것처럼 보인다면 인간은 무엇을 선택할까? 둘 다 불행이라고 이미 살아본 불행을 다시 선택하지는 않을테다. 내가 살아보지 않은 길이 타인에게는 죽음에 이르는 길이었을지라도 결국 그것은 타인의 삶이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우리는 그렇게 뭔가 다른 삶을 꿈꾸는 것이다. 인생은 결국 내가 살아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타인의 삶에 대해서 함부로 평가하지 않을 일이다. 그 오만을 버리는 것이 결국 나이를 먹는 자의 당연한 의무이다. 인생의 경구로 가득찬 이 소설을 보면서 결국 깨닫는 것은 나의 삶, 타인의 삶에 대한 오만함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20대, 30대 그 때는 몰랐고, 지금은 알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