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읽어가면 읽어갈수록 당황스러웠다. 그 이유가 말하기 좀 민망한데....
음 이 책은 장르로 구분하면 일단 기본적으로 로맨스인데, 원래 로맨스는 내가 여주에 감정이입을 하고 빙의를 하며 느끼는 짜릿함이 기본인데 말이다. 이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엄마 모드가 되는거다. 그러니까 얘들 연애하는걸 보는데 이건 무슨 내가 여주인공이 아니라 우리 딸 보듯이 얘들을 보고 있는거다. 그러니까 나에게는 로맨스가 아니라 성장 소설이 돼버린 느낌? 갑자기 내 나이가 너무 슬퍼졌다.
그러니까 이 글은 결국 라떼는으로 시작하는 글이 되어버릴 듯하다. 그놈의 라떼는의 꼰대력에 트라우마가 있으신 분들한테는 미리 사죄를 드린다. ㅠ.ㅠ
시작이다. 나 때는 결혼은 당연하지는 않지만, 그러니까 좋은 상대가 없으면 안할 수도 있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사귀면, 혹시 혼전 임신이라면 딱히 좋아하지 않더라도 당연히 결혼하는 시대였다. 결혼 자체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질 수 없었던 시대랄까? 그래서 여기 주인공들처럼 연애와 섹스와 결혼이 거의 동의어였던 때라고 하겠다. 이건 사실 인생을 운에 맡기는 것에 가까운데 젊은 시절 만난 이를 제대로 검증없이 결혼이라는 어마무시한 관계로 골인하게 함으로써 실패할 확률이 다분히 높은 상황이다. 남의 집 일을 다 모르니 확률적으로 얘기할 수 없지만 내 주변만 보더라도 남편과 제대로 교감을 나누고 잘 지내는 집이 딱히 많지 않다. 결혼을 그냥 했으니 사는 것도 그냥 사는거다. 그러다가 바람도 피고, 이혼도 하고 하지만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감당해야 할 문제가 너무 많으니 대부분은 그냥 산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속의 주인공들이 연애와 결혼에 대해 신중한건 긍정적이라 하겠다. 이건 딱히 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요즘 세대가 일반적으로 그런 듯하다. 우리집 딸래미들을 보더라도 연애가 결혼으로 반드시 간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이런 세태나 생각은 바람직하다. 세상사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게 어디 있겠는가? 책에서 아일린과 사이먼이 사랑을 느낀 어린 시절 미성년자를 벗어나자 마자 만약 결혼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확률 99.99%로 미친 듯이 싸우다가 이혼했다에 100원 건다. 애정에 목마르고 자존감 빵이면서 자기 감정에 솔직하지는 못한 아일린과 아빠가 딸을 보듯이 다 보듬어 안아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이먼이라면 아일린은 끊임없이 불안해하고, 그런 아일린을 안타깝게 바라만 보다가 지치는 사이먼 상상이 가지 않나?
그러니까 결혼이 신중해야 한다는 건 맞다. 그리고 반드시 결혼해야 사랑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도 맞다. 다만 연애는 사람을 지치게 하는 면이 있다. 상대의 마음을 확인하지 못한 상태에서의 연애는 처음에는 설레고 생각만 해도 입이 벌어지고(이것도 내가 다 경험해봤다.) 좋아 죽지만, 사람이 살다보면 상대에 대해서 불만이 생기는데 언제든 헤어질 수 있다는 전제가 있는 한 언제나 연애는 불안하다. 연애의 과정에서 소모되는 심력이 너무 어마어마하다. 오래된 연애가 헤어짐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은 것은 그래서다. 다들 지쳐서 헤어진다. 그래서 더 힘들고 지겨워지는 것이 괴로울 때 결혼이라는 다른 형식을 만든다.
주인공인 아일린, 앨리스, 사이먼, 그리고 펠릭스 이 모두는 마음과 자존감에 상처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다. 사실 결핍없이 성장하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부모가 어떻게 키워도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다들 결핍을 가지고 살아간다. 차이는 그것을 자기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정도인가 아닌가일 뿐이다. 그래서 이 결핍덩어리들의 좌충우돌에 마음이 짠해지고 마는 것이다.
앨리스는 데이팅앱을 통해 만난 전혀 모르는 남자와 사랑을 한다. 아일린은 그녀가 어릴 때부터 옆에 있었던 오래 된 친구와 사랑을 한다.우리가 사랑을 할 때 그 사람을 언제부터 알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얼마나 알았느냐에 상관없이 그저 사랑을 시작한 그 순간부터 불안은 시작된다. 그 불안은 상대에 대한 불안이 반이고 자기 마음에 대한 불안이 반이다.
그 또는 그녀는 나를 사랑하는걸까?
나는 그 또는 그녀를 사랑하는걸까?
내 마음이 의심스러운 만큼 상대의 마음도 의심스럽다. 결혼의 끝이 해피엔딩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이미 알고 있고, 동화속 오래오래 잘 살았습니다가 허구라는 것도 다들 알고 있기에 이 불안은 사랑하면 할수록 깊어질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모든 낭만적 사랑은 끝이 있기 때문이다. 낭만적 사랑의 끝은 생활이다. 관성이나 무덤덤한것과는 좀 다르다. 그런데 그 끝은 생각보다 빨리 온다. 남편을 보고 아직도 심장이 두근거리면 심장병이거나 울화병일 가능성이 많으니 빨리 병원 가보라는 농담이 농담이 아니다. 사랑의 끝이 이렇게 정해진거 같은데 사랑하는 동안은 누구도 그 결말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안전지대에 머물고 싶어히는지도 모르겠다. 헤어지면 아쉽겠지만 내 삶을 흔들 정도는 아닌 딱 그만큼의 거리(앨리스), 헤어질 일이 없는 오래된 우정의 관계(아일린)에 집착하는거다.
그러나 관계란건 변한다. 아무리 기를 쓰고 그 자리에 있으려해도 그런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일린은 연인은 끝이 있지만 친구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아니다. 언젠가 지친 사이먼이 마음을 다하는 다른 연인이 생기고, 그들 사이에 아이가 생기면 아일린이 생각하는 친구 관계와 사이먼이 생각하는 친구관계는 완전히 달라진다. 그리고 친구도 연인과 마찬가지로 어느 순간 마음이 상해서 더 이상 보지 않을 수 있다. 아일린과 앨리스가 그 위기까지 가는걸 보면 말이다. 둘 사이가 봉합되는건 펠릭스덕분이었다. 둘 만 있을 때 그렇게 부딪혔다면 이 둘은 아마도 이후 오랫동안 결별했을거다. 결국 연애든 친구관계를 유지하든 그 관계에 끝이 올 수 있다는 건 마찬가지다. 그래서 결국 아일린이 모르는 건 자기 마음이다. 내가 연인관계가 되어서 더 이상 사이먼에게 좋은 사람이 아니게 되면 어쩌지? 나의 안 좋은 모습을 더 많이 보여줘야 하는데 사이먼이 그걸 보고 나에게 실망하면 어쩌지? 결국 아일린의 망설임은 모두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 결여에서 기인한다. 그래서 아일린에게 아이고 아일린아 너 괜찮은 애야. 충분히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어. 네가 경쟁자로 여기는 캐롤라인인지 하는 어린여자하고 비교 안해도 돼라고 말해주고 싶은거다. 그리고 끝이 보이는 사랑이지만 그 끝에는 새로운 관계가 있다고 말해주고 싶은거다.
그럼 사이먼은 좋은 남자이기만 한걸까? 전형적인 욕구 억제형이다. 그냥 평범한 남자아이라면 이들은 미성년에서 벗어나자 마자 혼전임신하고 결혼했을거다. 그런 면에서 사이먼 이 녀석 참 괜찮네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이먼이 아일린에게 취하는 행동을 보면 이건 진짜 아빠같은 모습이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도 그런 모습에 대해 약간 자아도취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난 언제나 네편이야, 난 네가 원할 때는 항상 네 옆에 있어. 사이먼의 포지션은 항상 네가 원하면이다. 여기서 자신의 욕망이나 감정은 언제나 제2선으로 물러난다. 아 정말 좋은 사람일까? 인생은 내가 항상 우위에 서서 상대방을 보살필 수 있는 방향으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지금은 사이먼이 나이가 더 많고, 돈도 더 잘 벌고, 사회적 지위도 높고하지만 만약 어느 순간 그 관계가 역전된다면 저 사이먼은 땅굴파고 들어가서 안 나올 인간이다. 인간이 몰락하는거 그리 어렵지 않다. 사이먼이 정말로 제대로 사랑을 하려면 아일린을 보살펴주고 무조건 배려해줘야하고 모든걸 자신이 맞춰줘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마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연애든 결혼이든 타인이 같이 산다는건 어려운 일이다. 어렵지만 같이 동등한 입장에서 함께 헤쳐나가야 하는 거외에는 사실 방법이 없다. 여기서 중요한 건 함께라는거다. 그리고 함께라는 말에는 기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홀로 서는 사람이 강한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사실은 정말로 강한 사람이다.
그러면 연애든 결혼이든 그 끝에서 만나는 새로운 관계는 뭘까? 뭐라고 정의하긴 참 어렵다. 그리고 남들의 경우는 내가 알 수 없는거고 결국 내 얘기다. 나와 남편은 4년을 절친으로 지냈다. 대학시절이었으니 하루의 대부분을 붙어 있을 정도였고, 각자의 연애사도 이미 다 알고 있는 절친이었다. 어쩌다보니 결국 연인이 되었고 이후 6년을 더 연애를 했다. 그런데 연인이 되고 한 1년쯤은 정말 볼 때마다 좋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런 관계에 결국 끝은 왔다. 연인이 된 남자는 내가 원하던 남자가 아니었다. 만인에게 좋은 사람인 남자가 내 연인이 되었을 때 딱히 연인으로서는 좋지 않다.(지금도 나는 심술이 날 때는 연애할 때 나에게 섭섭했던 것들을 무기로 내밀어서 원하는걸 쟁취한다.) 하지만 나에게 좀 더 잘해줬으면 좋겠고, 나만 봐줬으면 좋겠는 그 마음을 나는 잘 표현하지 못했다. 당연히 없어보이니까... 연애감정에서 우위에 서야 하는데 사랑과 관심을 구걸하는건 너무 자존심 상하니까... 그 결과는 돌려서 말하거나 다른 트집을 잡거나 하는 행동으로 나타나는데 이 남자 진짜 눈치를 못채는거다. 니가 왜 화를 내는지 정말 모르겠다는거다. 남자들은 그런걸 모른다는걸 그 때는 몰랐다. 그래서 헤어지기도 하고... 그래도 오랜 시간의 힘으로 결국 결혼을 하기는 했다. 결혼에 이른 것은 서로가 아니 내가 내 감정이나 원하는걸 자존심 내려놓고 솔직히 얘기하는데서 시작되었다. 나 역시 아일린과 똑같은 감정을 느꼈고 그것이 관계의 파국으로까지 갈 뻔 했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그래서 결혼은 끝이었을까?: 아니다. 나는 무자비하게 솔직해졌고(솔직하고 날 것 그대로 말하지 않으면 못알아듣는 남자니까), 남편은 꽤나 당황했고 그런데 결혼했는데 물릴 수는 없고... 이렇게 말하면 결혼이란 제도는 진짜 아니다 싶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다. 결혼 이후 내가 느낀 희안한 감정이 진짜 말 그대로 안정감이었다. 영원한 내 편이 생겼구나, 혼자서 뭐든지 다 결정하지 않아도 되는구나라는 감정을 안정감이라고 표현했는데 이게 진짜 내게 편안함을 주었던 것 같다. 이래서 결혼을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던 듯.... 그 이후의 과정이 순조로운가 하면 당연히 아니다. 결혼은 내가 모르는 무수한 관계 특히 가족관계가 정말 무례하게 내 영역을 침범하고 들어오는 것이고, 아이가 생기면 육아노동이라는 엄청난 일이 기다리고 있어 아이 기를 때는 정말 남편에 대한 애정이고 내편이고 뭐고 결혼초에 느꼈던 감정? 안정감? 편안함이 뭐예요? 나는 죽을거 같은데? 그런데 적어도 이 시기를 같이 힘들었다면 또 다른 감정과 관계가 생긴다. 굳이 이름붙인다면 동지애라고 할까? 어려운 시기를 어쨌든 같이 헤쳐왔다는 느낌? 그런데 가슴은 두근거리지 않지만 이 동지애가 참 괜찮다. 지금은 우리가 서로에게 하는 가장 큰 소망은 먼저 죽지마, 나는 당신과 늙어가는 것도 같이 하고 싶어라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결혼이라는 제도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결혼은 선택이라는 말은 당연한 말이지만, 그 선택이 무조건 나쁘다고 할 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아일린과 사이먼아, 앞으로 너희들은 앞으로 무수히 내가 진짜 이 사람을 사랑하는게 맞나? 저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게 맞나? 아니면 저게 사람은 맞나라는 생각까지 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 아마 거의 그렇겠지만 - 그럼에도 오랜 시간 고민하고 자괴감의 늪에서 버텼던 시간만큼 더 버틸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얘기해주고 싶다. 그리고 그런 관계의 변화가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 아니 꽤 괜찮을수도 있다는 걸 말이다.
앨리스와 펠릭스의 관계, 앨리스와 아일린의 관계에 대해서도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글이 너무 길어지는 관계로 이만 총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