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트레버는 단편소설을 "순간을 포착하는 예술"이라고 정의했단다. 

이 정의에 딱 맞는 작가가 바로 그 자신이 아닐까?


살다보면 뭔가 쨍하고 깨달음이 오는 순간이 있다. 요새는 그걸 현타왔다라고 우스개소리로 얘기 하던데 뭔가 비슷한 맥락일듯도하다.

내 삶에서 그런 순간들은 주로 '아 내가 호구였구나, 이 구역에 호구가 누구인지 모르면 그게 바로 나라더니..... ' 뭐 이런 느낌일 경우가 많아 내 삶의 경험은 농담거리가 될지언정 이야기가 되지는 못하는 바이다.

그렇다고 해서 호구인 내 삶이 딱히 달라지냐 하면 그렇지도 못하다.

깨달음은 깨달음이고 삶은 그냥 계속된다.


얼마전에는 내게 그런 깨달음의 순간이 있었다.

아마도 그날 직장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었던거 같은데 딱히 좋은 일은 아니었다.

자기 책임은 안하려고 요리저리 빠지면서 나이 대접 안해준다고 목소리 높이는 그런 사람때문이었던듯한데 평소 그이를 보면서 드는 감정은 "아 진짜 왜 저렇게 살까" 하는 마음 반, "아 진짜 저렇게도 살아지네, 저렇게 자기만 생각하고 챙길거 다 챙기면서 아니 챙기지 말아야할 것도 다 챙기면서 사는 사람도 있는데 난 도대체 호구야 뭐야" 뭐 이런 마음 반.

하여튼 그럼에도 결국 원하는 바를 챙겨가는 모습에 짜증이 좀 많이 났었다. 

내것도 제대로 못챙기는 나는 등신이야 뭐야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냥 그날 저녁 다음주 스케쥴을 챙기면서 모임 하나가 보이는거다.

직장에서 만났는데  많게는 나보다 열 몇살이나 어린 사람들이 거리낌없이 나랑 놀아주고 있다.

이들을 만난건 돌아보니 내가 가장 힘들때였구나.

그 힘들었던 날들을 이들이 있어서 버텼었구나.

힘들때마다 함께 으샤으샤하면서 버텼던 그날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어쩌면 지금 그냥 이 직업을 때려쳤을지도 모르겠구나.

앞에 있던 딸에게

"딸아 엄마가 참 바보같이 산다 싶다가도 말이야. 내 주변에 사람들을 둘러보면 바보같이 산게 아닌거 같아. 내가 남들보다 더 일하고 평소에 손해보고 사는거 같은데 막상 주변을 둘러보니까 엄마 주변에 정말 친한 사람들은 진짜 좋은 사람들만 있는거있지. 그래서 갑자기 좀 행복해지는거 같아" 이런 얘기를 주책맞게 하기도 했다.

그 순간의 깨달음이 내 생활을 딱히 바꾼건 아니지만 내가 내 삶을 미워하지 않게, 소중하게 생각하는 힘을 준다.


이 책의 순간들이 모두 그러하다.

소설 속 인물들은 쨍하는 순간을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겉보기에 그들의 삶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첫 번째 단편인 <피아노 선생님의 제자>에서는 이 짧은 단편의 모든 문장이 공감이 갔었다.

피아노 교사가 천재적인 제자를 가르치고 그의 연주를 들으면서 느끼는 행복

그 제자가 올 때마다 집안의 작은 물건들이 하나씩 사라진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당혹감

그 작은 행위가 반복되면서 제자의 기만이 아버지의 기만으로, 그리고 전 연인의 기만으로 이어지고 결국 내 인생 전체가 호구가 아니었나 싶은 자괴감.

그러나 돌아온 제자가 다시 연주를 시작했을 때 그녀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천재적인 제자의 피아노 연주 그 자체였음을, 그것을 듣는 순간이었음이 깨달아지는 그런 순간, 그래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 깨달음으로 그녀의 삶이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타인을 의심하며 자신의 삶을 갉어먹는 자괴감과는 안녕을 고할 것이다. 그럼 충분하지.... 당연히 충분하다.


<장애인>속 마티나의 일상은 쳇바퀴 돌듯 똑같은 일상의 반복이지만 그녀에게는 그 일상이 바로 지켜야 할 삶이다.

우리가 일상을 무시하고 벗어나고 싶어하지만 사실은 그 일상이 깨지는 것은 보통 재앙에 다름 아니다.

그녀의 일상에 어설픈 페인트공이 등장하지만 그녀도 페인트공도 자신의 삶의 영역들 - 되풀이 되는 그 일상을 지킬 뿐, 그리고 여자는 페인트칠 값을 치르고, 페인트공들은 다시 떠돌이의 삶으로 돌아가면 그 뿐.... 

그 사이에 사라진 사람은 미스테리가 되지만, 사실상 우리 삶에 분명한 것이 얼마나 되겠는가?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다는 말도 그래서 생겼을 테다.

또한 그 심증이 맞으리라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여자들>에서 서실리아를 찾아오는 두 여성 중 한명이 정말 어릴 때 그녀를 버리고 집을 나간 생모인지는 끝까지 명확하지 않다. 그런데 그래서 어쩌라고?

자신을 생모라고 주장하는 여인이 나타났다 해서 아버지와 평범하고 온전한 삶을 꾸려오던 서실리아의 삶이 흔들려야 하나?

비록 서실이라의 마음에 의혹이 깃든다해도 그건 또 그것대로 삶이 일부분이 될 것이다.

그 모든 것을 껴안고 살아가는 것이 결국 삶일 뿐이다.


<겨울의 목가>는 누군가 다른 사람이 썼다면 장편 소설 하나는 쓰고도 남았을 것 같은, 그런데 또 생각하면 매우 진부한 이야기가 되었을 듯한 이야기를 트레버의 손에서는 순간 순간 포착되는 감정의 빛으로 탄생시킨 작품이다.

어릴 적 첫사랑이 돌아왔을 때 메리 밸리는 당연히 그가 돌아올 곳에 돌아왔듯 담담하게 맞이하지만 그것이 그녀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또한 그들이 어릴 적의 그 집에서 같이 살기로 했을 때 따라오는 남자의 아내와 자식의 고통 역시 진부하지만 존재하는 것이다.

아버지에게 느닷없이 버림받은 아이의 고통 역시 고통스럽다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느껴지며, 결국 자신의 아이에게  돌아가는 결정을 하는 남자의 결정 역시 고통스럽지만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메리 밸리의 삶이 파괴되었는가?

아니 메리 밸리의 일상과 삶은 여전히 계속된다.

트레버가 말하는 순간의 포착은 그의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어떤 전환점을 맞는 순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그들이 자신의 삶을 계속하기로 결정하는 순간, 일상을 유지하기로 결정하는 어떤 순간 그 순간이 아니었을까?

변화가 아니라 지속의 순간과 과정에 우리 삶이 빛나는 모든 순간이 들어있을지도 모르겠다..


바로 거기에 살아간다는 것의 질기고도 질긴 힘이 있는게 아닐까?

우리 모두는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나의 친척 중 한분은 "인생은 한방이야"라고 젊었을 때부터 외쳤었는데 내가 본 30년 동안 그 한방은 아직도 오고 있지 않다. 

우리 모두 뭔가 대단한 순간을 역전의 순간을 바라지만 그 순간이 온다고 해서 또 삶이 극적으로 달라지느냐 하면 또 그렇지도 않은.....

그렇게 우리는 살아간다. 



트레버의 책을 딱 3권 읽었다.

읽은 모든 책이 아름답고도 마음에 쨍하는 순간을 선사한다.


















앞으로 남은 트레버 아저씨의 책들 - 아마 다 읽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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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과함께 2023-08-13 16: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트레버 한 권도 안읽은 저는 기대되네요~!

바람돌이 2023-08-13 17:25   좋아요 3 | URL
트레버 한 권도 안 읽은 햇살과 함께님 부럽습니다. 앞으로 읽을 트레버가 저보다 많이 남았잖아요. ^^

거리의화가 2023-08-13 17: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트레버 책 아직 단 한권도 읽어보질 못했는데 아름답고도 쨍한 순간이 담겨 있다니 참 좋네요.
나눠주신 이야기도 참 인상깊습니다. 저는 갈수록 제 마음이 각박해진다 싶을 때가 많아요. 이제는 부대끼는 게 싫을 때가 많은 거죠. 사람들과 부딪치는 것 자체를 기피하게 된달까. 사람에게서 상처를 받지만 또 사람에게서 기쁨과 위로를 얻을 수 있구나 싶어서 여러 생각이 듭니다.

바람돌이 2023-08-13 18:00   좋아요 3 | URL
삶의 미묘한 한 순간을 낚아채는 솜씨가 정말 멋진 작가입니다. 그러면서도 식상하지 않은 전개가 더 돋보이는요. 늘 사람에게서 상처받지만 그래도 나를 버티게 해주는건 사람이더라구요. 그리고 이제는 상처를 주는 사람도 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에 대한 경계를 너무 잘 세워서 정말 좋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너무 잘 구별한달까요? ㅎㅎ

blanca 2023-08-14 08: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부럽습니다. 트레버의 여정에 오르셔서. 앞으로 더 많은 찡함을 경험하게 되실 겁니다.

바람돌이 2023-08-14 09:04   좋아요 1 | URL
먼저 다 읽은 자의 안타까움이 느껴집니다. ㅎㅎ 남은 책이 더 좋다는 말씀이죠? ^^

blanca 2023-08-14 09:06   좋아요 1 | URL
좋다마다요. 저는 작가 사생활까지 팠네요. 너무 좋아서요. 그런데 소설에서의 시선과 작가의 삶이 일치해서 놀랐어요. 평화롭고 성실하고....조각 전공했는데 소설가 된 것도 드라마틱하고, 아들 직업까지 검색했어요. ^^;;;

바람돌이 2023-08-14 09:10   좋아요 0 | URL
작가의 삶도 마음에 드는 드문 경우군요. 트레버 작품속에 느껴지는 연민과 따뜻함이 작가의 마음 자체일듯하여 더 좋아집니다. ^^

감은빛 2023-08-14 17: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때론 속이 뻔히 다 보이는데도 일부러 속아주기도 하고,
어쩔 때는 좀 손해 보는 것 같아도 그냥 조금 더 일하기도 하구요.
이렇게 살다 보면 남들도 다 같이 보거든요.
저 사람, 알게 모르게 남들 하기 싫어하는 일들을 다 하더라.
저는 그냥 제가 할 수 있는 상황이면 일부러 해주는 편입니다.
나중에 그게 어떤 방식으로든 저에게 도움이 되긴 하더라구요.

바람돌이 2023-08-14 23:22   좋아요 0 | URL
그쵸. 내가 생각하는걸 남이 생각 못하는거 아닌데 그걸 잘 모르는 사람이 많더라구요.
그리고 어쩔 땐 감은빛님 말씀처럼 내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아서 놀라기도 하구요. ㅎㅎ 저는 어쨌든 좋은 사람들과 계속 사귀기 위해서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계속 노력하려고 합니다. ^^

희선 2023-08-16 0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 님 둘레에 좋은 사람이 많은 건 바람돌이 님이 그렇다는 거기도 하겠습니다 남한테 해를 끼치는 것보다 손해 보는 게 더 마음 편할지도 모르죠 무슨 일이 일어나거나 무언가를 안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겠습니다


희선

바람돌이 2023-08-16 11:10   좋아요 1 | URL
앗 희선님 저에게 필요한 칭찬을 이렇게 딱 해주시다니.... 저는 좋은 사람이라고 막 주장하고싶은데 말이죠. ㅎㅎ 감사합니다. ^^

은오 2023-08-16 04: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 이 리뷰 읽으니까 저 진짜 트레버 읽어야겠어요....!!!! 이런 단편을 쓰는 작가군요!!

바람돌이 2023-08-16 11:11   좋아요 0 | URL
단편의 대가 트레버, 단편들도 좋지만 저는 장편도 좋았습니다. 펠리시아의 여정요.
지금은 또 다른 장편 루시골트 이야기 읽으려고 준비중입니다. 은오님도 올해 전에 트레버 영접하시길....
그런데 단편집은 이번 마지막 이야기들 보다는 저는 밀회가 더 좋았습니다. ^^

- 2023-08-20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의 작품들을 읽을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일 것으로 생각하며 아쉬움이 가득한 채 마무리 되었고 그의 작품들 속 그들을 일상

- 2023-08-20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서 계속 생각하게 된다. 꽤 오랜 시간 트레버와 함께 하였고 그와 그의 작품 속 인물들로 인해 많은 위안을 받았다. 많이 감사하고 이번에도 트레버를 읽을수 있는 마지막이 아니었으면 바래본다. 마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