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의 그림은 16세기~17세기에 활동했던 화가 소포니스바 안귀솔라의 <베르나르디노 캄피와 함께 있는 자화상>이다. 

베르나르디노 캄피는 당대 유명했던 화가로 안귀솔라의 그림스승이었다.

이 그림은 조금만 자세히 보면 굉장히 이상한 그림이다.

실제로 그림을 그리는 주체가 안귀솔라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화가가 아닌 모델로 설정하고 있다.

제목이 아니라면 우리는 이 그림이 여성화가의 자화상이 아니라 저기 안귀솔라의 스승인 남성화가의 자화상쯤으로 착각할만하다. 그림을 그리는 주체로서의 여성이 가려져 있고, 귀족이었던 안귀솔라는 귀족여성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왜 여성은 위대한 화가가 없느냐는 질문에 그래도 여기있다고 할만한 여성화가가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면서 굳이 자신의 화가로서의 정체성을 가리고 있는 것이다.


그에 반해 오른쪽 그림은 르느와르의 모델로 출발했지만 그 자신이 뛰어난 화가가 되었던 수잔 발라동의 1931년작 <자화상>이다. 이 때 화가의 나이 66세였다. 

이 시절 수많은 화가들에 의해서 여성 누드가 그려지지만 그것은 모두 젊고 아름다운 여성의 누드가 대상이다.

그런데 여기 이렇게 수잔 발라동이 노년의 자신을 그것도 누드로 그리고 있다.

어떤 의미일까?

그저 그림을 보기만 해도 느껴지는게 있지 않나?

이 누드 자화상에서는 관음의 시선이 없다.

그림에서도 사생활에서도 온갖 경계를 깨뜨리며 자신의 삶과 예술의 방식을 고수하고 살아왔던 한 인간이 형형한 눈빛으로 자신의 삶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모습이 나라는 인간의 삶의 궤적이라고 말이다.

이런걸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일게다.


위대한 여성화가가 있느냐는 질문은 틀린 질문이다.

여성화가가 위대해질 수 있는 동등한 기회가 주어졌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화가임에도 어정쩡하게 모델로서의 자신으로 숨을 수 밖에 없었던 안귀솔라가

노년의 누드를 나의 삶으로 당당히 내건 수잔 발라동에 이르기까지는 300년이 걸렸다. 




왼쪽은 장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터키탕>, 1862년작이다.

19세기 유럽의 남성들은 터키 술탄의 하렘의 환상에 설레었나보다.

하렘의 여성들을 오달리스크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나체로 그려대면서 여성의 관능미를 훔쳐보는 아니 대놓고 즐겼으니 말이다. 

유럽인들의 무식한 오리엔탈리즘으로 하렘은 발가벗은 여인들이 하루종일 유혹이나 해대는 곳으로 변질되고,

그 환상을 화가들이 충족시켜 줬으니 이 그림은 어쩌면 이 시대의 포르노그라피로 읽어도 되지 않을까?

과격한가?

글쎄 이런 그림을 보고 있으면 여성으로서도 비유럽인으로서도 불편하니 나는 편협한 인간인가 보다.


오른쪽은 실비아 슬레이의 <터키탕>, 1973년작이다. 

앵그르의 그림과 110년의 차이가 나는 작품으로 그냥 봐도 앵그르의 작품을 비틀었음을 알아볼 수 있다. 

이 그림은 여성을 남성으로 바꾸었고, 상상속의 인물들을 주변의 실제 인물로 바꾸었다. (화면의 앞에 길게 누운분은 무려 화가의 남편이라고 한다. 나머지 남자들도 모두 화가의 지인들.,,,,)

앵그르류의 오달리스크 그림은 너무 흔한 나머지 그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사실상 불편함 또는 불쾌함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많음이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나 많음으로 해서 무감각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성별 하나 바꾸었을 뿐인 그림앞에 서는 감상자들은 대번에 뭔가 불편한 느낌을 갖게 된다. 

여성을 성적 쾌락의 대상으로만 관음하는 그림들에게 실비아 슬레이는 그 그림들에서 여성들이 느낄 수밖에 없는 위화감을 상기시킨다. 



왼쪽은 페트르 파울 루벤스의 <거울을 보는 비너스>, 1615년작이다.

여성의 미모를 온갖 모습으로 그리며 찬양하고 관음하던 화가와 그의 작품 구매자들은 그러나 자신들의 정신의 고상함을 강조하고, 그것의 여성의 미에 대한 우위를 주장하는데도 게으르지 않았다.

수많은 그림 속 여성들은 거울과 함께 그려진다.

거울을 든 여성은 나이들면 덧없이 사라질 자신이 젊음과 아름다움에 취해 다가올 위기를 깨닫지 못하고, 허영과 어리석음에 빠져있는 상징으로 그려진다.

심지어 미의 여신이자 미 자체인 비너스조차도 이렇게 자신의 미모에만 홀딱 빠져있지 않은가?

거울이라는 그 작은 도구 하나로 정말로 오랜 시간동안 여성의 지적능력에 대한 살해가 진행되어 온 것이다.


오른 쪽 작품은 캐리 메이 윔스의 <거울아, 거울아>, 1987년작이다.

이 작품에는 텍스트가 함께 구성되어 있다.


<거울을 들여다보며 흑인 여성이 질문했다.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가장 훌륭하지?" 거울이 답한다. "백설공주지, 너 흑인년아, 그걸 잊지 마!">


캐리 메이 윔스는 누가 가장 예쁘지라고 묻지 않는다. 누가 가장 훌륭하지라고 묻는다.

거울 속 마녀는 백설공주처럼 백인이다. 

이 작품으로 거울은 악과 선, 추와 미의 대결이 아니라 흑인여성으로서의 삶을 반영한 흑과 백의 갈등으로 전복된다.

이 간단한 거울 속 대화에서 작가는 여성이면서 동시에 흑인으로 살아가는 삶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제 거울은 나의 삶을 규정짓고 문제가 무엇인가를 어떻게 사회적 억압에 대항해야 하는가를 자각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가끔 들리는 거울만 보는 골빈년이라는 비아냥에서 보듯이 여전히 오랜 관습을 벗지 못하고 있다. 

간단한 도구 하나의 의미를 전복하는데도 엄청난 시간이 필요하다. 

예술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이다.



왼쪽은 귀스타브 쿠르베의 <세계의 기원>. 1866년작이다.

"내가 천사를 그려야 한다면 천사를 내 눈 앞에 보여달라"고 했던 사실주의자 쿠르베의 적나라한 여성 누드이다.

과거든 현재든 그림만으로 본다면 음모를 그렸고, 성기를 적나라하게 그렸다는 점에서 음란물로 분류되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쿠르베 자신은 아니로 누가 붙였는지 모를 <세계의 기원>이라는 그럴듯한 제목으로 인해 뭔가 심오한 의미성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이 그림은 1866년에 그려졌음에도 몇명의 소장가를 거치다가 마지막으로는 철학자 자크 라깡이 소장했었고, 실제로 이 그림은 주변 사람들에게만 은밀히 감상되었다. 라깡도 이 그림 위에 다른 그림을 덮어 은밀하게 간직햇다는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라깡마저 그랬다는건 음...... 잘 납득이 안된다. 라캉정도면 그냥 당당하게 보지 말이야.....

어쨌든 라깡이 죽고 그의 부인이 오르세미술관에 기증하면서 1996년에 가서야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2013년에는 이 하반신 그림의 얼굴 그림을 찾았다는 가십성 기사까지 등장하는걸 보면 세계의 기원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지어놓고 실제로 이 육체와 상상속의 얼굴을 관음하는 습성은 참으로 질기게도 남아있다.

실제로 저런 모습으로 자는 여성이 있나? 

천사를 보여달라던 쿠르베는 연출이 아니라 실제 잠든 여성을 몰래 보고 그린 것일까?

혹시 모델의 동의는 구한 것일까?


오른쪽은 주디 시카고의 <붉은 깃발>, 1971년작이다.

언뜻 무슨 모습인지 구분하기가 힘든데 이 사진은 여성이 자신의 질에서 생리혈을 흡수한 탐폰을 꺼내는 모습이다.

쿠르베의 그림과 똑같이 여성의 성기와 음모를 보여주고, 심지어 생리혈까지 보여주는 적나라함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 사진을 쿠르베의 그림처럼 은밀하게 소장하고 싶은 남자들이 있을까?

주디 시카고는 여성의 경험을 그대로 드러내고 여성의 신체를 관음의 대상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복원하고, 그 속에서 여성의 삶을 복원하고자 한다. 

금기에 도전하고, 마땅하다고 여겨지는 질서에 도전하는 것이 예술의 힘이라는 것을 다시 자각하게 한다.




인류의 역사는 남성이라는 성이 여성이라는 성을 억압하는 온갖 도구들을 휘둘러왔던 역사다.

그러나 그것의 극복이 여성에 의한 남성의 억압이 될 수는 없다.

정정엽 화가의 <흙이 되는 자화상>을 보자.

남성이든 여성이든 아니면 그 사이에 있는 여러 성이든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은 삶과 죽음의 과정속에 존재한다.

자신의 자화상을 하필이면 왜 죽어 흙에 묻히는 순간으로 그렷을까?

나이들어 주름진 피부는 남녀의 구분조차 의미가 없다.

감은 눈으로도 오히려 또렷하게 보이는 표정은 이분의 삶이 편하지만도 않았지만, 행복한 순간도 있었을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게 한다.

우리네 삶이 모두 그러하듯이 말이다.

남녀의 화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그림이다.

너와 내가 모두 저 흙이 되는 자화상이라고....

나에 대한 너에 대한 우리 모두의 연민에서 공감과 연대의 세상을 꿈꾸는 것도 좋지 않을까?



요즘 여성화가들엑 대한 책들과 여성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미술에 대한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앞으로 챙겨볼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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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8-20 00:2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유리작가의 글 좋아해요

바람돌이 2022-08-20 09:46   좋아요 4 | URL
이유리 작가 오래전에 세상을 바꾼 예술작품들 하나 읽었네요. 그동안 꽤 책을 쓰셨는데 몰랐네요. 캔버스를 찢은 여자부터 차근차근 읽어보겠습니다

그레이스 2022-08-20 12:47   좋아요 2 | URL
전 이 분 칼럼이 도움이 많이 됐어요
그래서 책도 빌렸는데... 아무래도 구입해서 봐야할듯요 ㅋ

희선 2022-08-20 02:0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여성도 멋진 화가 음악가가 될 수 있었는데, 남성이 못하게 하기도 했네요 그렇게 했다 해도 아주 없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아는 사람이 많지는 않지만... 여성도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도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가 보다 하고 따르지 않았을지... 성이나 인종 여러 가지를 떠나 사람으로 생각하고 서로를 존중하면 좋겠네요


희선

바람돌이 2022-08-20 09:52   좋아요 3 | URL
여성이냐 남성이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화가라면 그저 작품으로 평가받는게 맞을텐데 그렇지 못했네요. 더구나 여성은 제대로 된 교육도 받기 힘들었으니 재능을 발견하기도 어려웠던게 우리의 오린 역사죠. 아직 갈길이 멀지만 그래도 조금씩 나아져서 다행입니다.

coolcat329 2022-08-20 08:3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제가 어제 앵그르의 ‘그랑 오달리스크‘를 책에서 보고 허리가 비정상으로 기네...뭐 이런 생각만하고 지나쳤는데 ‘터키탕‘은 동그란 그림이 구멍으로 몰래 훔쳐보는 느낌이 나서 더 남자들을 설레게 했을듯합니다. 🙁
여성들의 하얀 살이 저렇게 겹쳐 있으니 보기 불편하네요.

바람돌이 2022-08-20 09:55   좋아요 5 | URL
어쩌면 앵그르의 그림은 목적에 가장 충실한 그림일듯요. 그림의 내용과 훔쳐보는 구멍을 연상시키는 그림의 동그란 형식까지 관음증을 충족시키는 완벽한 그림요. ㅎㅎ 저기 하렘의 여성들이 실제 저 그림을 봤다면 얼마나 불쾌했을까 생각하니 저 그림이 더더욱 불편해졌습니다

mini74 2022-08-20 09: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예전 여성들의 그림에 여성은 없다는 말 맞는 듯 합니다. 수잔 발라동의 누드에는 관음대신 그녀의 삶이 있다는 말도... 바람돌이님 요즘 그림 이야기 올려주셔서 눈이 호강합니다.~

바람돌이 2022-08-20 10:02   좋아요 4 | URL
미니님 그림 이야기야말로 항상 제 눈과 마음을 풍성하게 합니다. ^^
나이 들어서 나를 저렇게 당당하게 내보일수 있는 힘을 닮고싶어요. 이것이 나고 나의 삶이다라는 느낌이랄까? 저는 수잔 발라동의 자화상이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미미 2022-08-20 12:5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거울로 지적능력을 살해해왔다는 표현이 인상적이예요!! 보통 드라마에서도 여성의 방에 책상은 없고 거의 다 화장대.... 자크 라깡 의외군요? 굳이 샀으면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둘 것이지ㅎㅎ

바람돌이 2022-08-20 16:52   좋아요 2 | URL
여러 분야의 문화들이 여성을 뇌가 없는 존재로 그려지는 그 다양한 방법들은 말해 뭣하겠습니까? 드라마는 더하죠 뭐.... ㅎㅎ 라깡은 저도 의외였어요. 당당하게 내놓을 줄 알았는데.... 역시 사람은 참 복잡합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