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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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이 책에서 무엇을 봐야 하고, 무엇을 알아야 하나?

저자가 말하듯이

나는 거대한 역사를 인간이 가 닿을 수 있는 작은 역사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야 뭐라도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할 말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 268쪽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거대악인 전쟁을 잘게 잘게 쪼개 이해할 수 있는 그 무언가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에게 이 여성들의 증언이 필요한걸까?

증언을 읽어가는 과정은 고통스럽다.

모르긴 해도 이 증언을 청취하고 다시 쓴 작가의 고통은 이루 말하기도 어려웠을것이다.

듣고 쓰는 그 모든 과정은 결국 전쟁을 다시 체험하는 과정이기도 하니까?

그러니까 그런 고통스런 과정을 거쳐 이 증언을 썼고, 독자인 나 역시 고통을 참으며 이것을 읽어냈다면 그에 대한 응당한 무언가의 대답을 얻어야 하지 않을까싶은거다. 


전쟁이라는 단어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당사자 또는 주체로서의 여자, 여성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 전쟁이라는 단어는 남성적인 단어로, 전쟁터를 떠올릴 때는 참호와 그 참호속에서 총을 든 남자들의 이미지를 떠올리는게 일반적이기도 하다.

전쟁에서 여자의 이미지는 전쟁 피해자를 떠올릴 때 간신히 떠오르는 그런 것이다.


그런데 여기 여자들이 있다.

전쟁의 피해자가 아니라 조국수호전쟁이라고 불리운 전쟁에 대부분 자신의 조국을 또는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와 대의를 지키기 위해 전쟁터로 나갔던 여성들이.....

그들의 나이는 천차만별이지만 대부분은 이제 사춘기를 막 지나고 성인이 되기 전의 문턱에 도달했는 어린 소녀들이었다.

그들은 왜 전쟁터로 달려갔을까?

그것도 어리다고 안된다고 하는 것을 무릅쓰고 고집을 피우고, 온갖 청원을 해대면서까지....

그런데 이런 질문은 사실상 무의미하다.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전쟁터로 달려갔을지 너무 짐작이 잘 되니까 말이다.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다.

이 시기까지 소련은 세계 유일의 사회주의 국가로 스탈린의 만행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사회주의조국에 대한 애국심과 자부심으로 넘쳐나는 국민을 가진 그런 나라다.

물론 당연히 그에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국가의 모든 능력을 동원한 국가주의 교육가 세뇌였을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마르케스의 표현대로 1950년대까지 마릴린 먼로가 누군지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폐쇄적인 환경 때문이기도 했을 테고......

저 상황에서 자란 어린 청소년 아이들이 어떤 마음일지는 눈에 훤하다.

내가 바로 그런 교육의 시대를 거쳐왔기 때문이니 말이다.

유신시대 시골마을에서 자란 나는 아침이면 새마을 노래에 잠이 깨고, 동네 공터에 모여 6학년 오빠가 든 깃발을 따라 줄서서 학교가던 시절을 거쳤으며, 대통령이 오후에 우리 마을을 자동차로 지나간다고 아침부터 전교생이 찻길에 나와 태극기 흔드는 연습을 하던 그런 시절을 살았다. 

웅변잘하는 친구가 토해내던 때려잡자 박살내자 공산당에 열렬히 박수를 치고 감탄하던 반공키즈, 그게 나였다.

아마도 내가 열 몇살의 사춘기 시절에 북한과 남한이 전쟁을 다시 벌였다면 나 역시 전쟁터에 지원해서 나가지 않았을까?

아 어쩌면 이 비유는 적절하지 못하기도 한것 같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소녀들이 조국수호전쟁에 나간건 마음으로 치면 일제시대 독립운동하러 간 것과 비교되는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그들의 마음으로는 그러할테다.

그 이념이 숭고한 사회주의 체제 보호였든, 독재정권의 국가주의 보호였든 독립운동이든 이념과 집단세뇌는 엄청나게 힘이 세다. 우리의 상상보다 훨씬 더..... 특히나 어린 청소년에게는 더더욱.(그 극단의 예가 중국 문화혁명기의 홍위병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용감한 사회주의의 병사들이 악의 무리 독일군을 무찌르고 세계를 평정한다는 환상은 현실의 전장에서는 설 자리가 없다. 

그 아이들, 그 여자 아이들은 전장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아니다 질문이 잘못되었다. 그들의 증언은 무엇을 본 것인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기억하느냐에 대한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30여년이 지나서야 나오는 증언은 바로 기억에 관한 것이다.

그 기억의 지점이 남자들과 여자들의 증언이 다르다.


내겐 전쟁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이 많은 반면, 집사람에겐 전쟁에 대한 감정이 더 많아요 하지만 언제나 감정이 사실보다 더 분명하고 강력한 법이지. - 198쪽


남녀의 차이를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남자들은 전쟁의 기억에서 전투의 상황, 어떻게 돌격했는지, 아니면 어떻게 기습을 받았는지, 그리고 자신이 그 전쟁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이런 것들이 주를 이룬다. 그래서 많은 전쟁체험담들이 이런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럼 여자들은? 피해자가 아닌 군인으로서 참여한 여성들의 목소리를 독자적으로 담은 책은 내가 알기로 이 책이 유일하다.

그녀들은 어떤 것들을 기억할까? 부부가 모두 참전했던 저 인용문의 남편은 아내의 기억은 감정에 대한 것이라고, 강렬했던 감정에 대한 것이라고 얘기한다.


전쟁터에서 많은 여성들이 느꼈던 그 강렬했던 감정들을 가만히 따라가본다.


전쟁의 소리를 기억하는 이, 으르렁 쾅쾅 쨍쨍.... 그 소리들은 참전소녀들의 젊음이 끝나는 소리에 다름아니라고 느낀다. 전쟁을 겪고 난 이후에는 다시는 천진난만했던 그 젊음의 시절로 돌아갈 수 없을 테니. 전쟁의 소리를 자신의 청춘의 장송곡으로 느껴야 하는 어린 소녀들에게는 어쩌면 삶이 끝나는 순간이 아니었을까?

아름다운 것이 있을리 없다고 여겨지는 전쟁터에서 죽은 동료의 시체가 너무 아름다워 더 슬퍼지는 이들이 여성이기도 하다.

친구가 죽었는데 야 임마 너는 죽었는데 왜 이렇게 잘생겼냐라고 하는 남자병사는 상상이 안가는데, 너는 죽었는데 어쩜 이렇게 예쁘니라며 오열하는 여자병사는 쉽게 상상이 간다. 그들은 전쟁에서 결국 아름다움의 생각을 잃어가리라 생각하니 더더욱 처연해진다.

더 이상 하이네의 시를 읽지 못할거같다는 소녀는 어떠한가?

전쟁이 끝나고 남자들이 전쟁의 영웅으로 대접받는 상황에서 오히려 전선에서 남자병사들을 꼬셨다는 터무니없는 비난에 상처받는 여성들

전선에서는 전우였고 동지였지만 전쟁이 끝나자 그 끔찍했던 기억들을 공유하고 싶지 않은, 그래서 연애나 결혼상대로 고려되지 않는 참전 여성들.(이들은 아직도 낭만적인 사랑을 꿈꿀 수 있는 어린 소녀들이고, 또한 이 시대는 여전히 결혼이 여성의 당연한 삶의 종착역이라는 관념이 일반적인 시대이니 이런 상황이 얼마나 억울했을까 짐작이 된다.)


전쟁의 기억을 안고 산다는 것은 여성에게 어쩌면 "두개의 세상, 두개의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되는 것"(133쪽)을 의미한다는 말이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평생동안 계속되는 전쟁의 기억과 그것을 잊은척 모르는 척 살아가는 그런 두개의 삶.

이런 두개의 삶이 한 인간의 내부에서 통합되지 못하고 영원히 분열된 채 살아간다는 것의 고통.

내가 나일 수 없는 삶의 고통이 그들의 기억 전체에 각인되어 있었으리라.....


작가가 말한 거대한 역사를 작은 역사로 쪼갠다는 것의 의미가 어느정도 이해가 간다.

개별화된 고통, 개별화된 기억, 개별화된 상처를 외면하지 않는 것에 역사의 의미가 있다.

개별화된 것들 자체가 역사의 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는 없지만 어쨋든 시작지점은 바로 그곳이다.

인간의 고통에 공감하지 않는, 다양한 고통을 모두 같은 고통으로 아파하지 않는 역사서술을 어디에 갖다 쓰겠는가?

역사서술이 무엇에 기반해야 하는지, 우리가 누구의 말을 더 들어야 하는지, 역사의 그 거대한 파도앞에 소외되는 사람이 왜 없어야 하는지 그렇게 생각이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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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08-10 13:1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고통의 모습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그 기억들을 한데 그러모으고 목소리를 청취했다는 것에 의의가 있는 것 같아요. 전쟁터에서의 기억은 몇십년이 지난다고 해서 사라질 것 같지도 않고 꿈으로든 현실의 어떤 순간이든 나타날테죠. 그 기억들을 끌어안고 산다는 게 어떤건지... 바람돌이님 리뷰 잘 읽었습니다^^*

바람돌이 2022-08-11 14:58   좋아요 0 | URL
증언의 의미는 시간이ㅠ너무 지나버리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거겠지요. 늦지 않게 전쟁에 대한 또 하나의 중요한 목소리를 청취할 수 있었다는 것. 그래서 우리가 전쟁의 결을 더 섬세하게 체험하고 전쟁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는데 이 책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많은 분들이 또 힘들지만 이 책을 읽었다는 생각도 들구요. 어쩌면 당사자에게는 아픈 그 순간을 한번 더 사는 고통을 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안타깝기도 합니다.

책읽는나무 2022-08-10 14: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절절하게 읽힙니다.
힘겹게 읽었던 지난 달의 시간들이 다시 떠오르는 듯 합니다.
전쟁 중일 때는 누이~누이 하면서 아껴주던 상황들이 전쟁이 끝나고 나니 전쟁에 참여했기 때문에 더 이상 여자가 아니라고 내처졌다는 증언들은 그동안 무엇을 위해 살아왔던 것이고, 또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었네요.

바람돌이 2022-08-11 15:04   좋아요 1 | URL
읽기는 지난달 말에 겨우 읽고 리뷰는 이제야 썼네요. 글을 잘 쓰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이 책에서 느낀 감정이나 이런 것들을 좀 추스릴 시간이 필요했던거같아요.
나무님 저도 이 에피소드 읽으면서 많이 가슴아팠어요. 하지만 또 한편으로 인간이란게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본능이 누구나 있다는걸 생각하면 한편으로 이해가 가기도 하더라구요. 고통을 극복하는 방법은 결국 둘 중에 하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고통을 같 겪었던 사람과 함께 연대해서 그 고통을 같이 이겨나가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아예 외면하고 피하는 것 그러니까 그 순간을 기억나게 하는 사람이나 상황을 피해버리는것요. 무엇을 선택할지 쉽지는 않을거 같아요. 단순히 개인의 성향뿐만 아니라 내가 격은 기억이 얼마나 강렬한가에 다른 트라우마의 크기도 선택에 많은 영향을 끼칠거같구요

mini74 2022-08-10 16: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서인지 이 책 읽고나니 인터뷰에 응해준 여성분들께 제가 다 정말 감사하더라고요. 전쟁을 말하고 기억하는 건 바람돌이님 말씀처럼 다시 체험하는 ㅠㅠㅠ 복기한다고 해서 그 고통이나 두려움 아픔이 옅어지진 않을거 같더라고요. 바람돌이님 이 리뷰 넘 좋습니다 ㅠㅠ

바람돌이 2022-08-11 15:12   좋아요 1 | URL
하하 감사합니다. 예전에 제가 급하게 자동차 문 열다가 뒷차가 와서 제 차 문짝을 들이받은적이 있거든요. 당연히 제 잘못이고 들이받은 분이 많이 안 다쳐서 다행이긴 했는데 신기한건 그 이후로 아주 오랫동안 자동차 문 열때마다 자동으로 그 때 생각이 떠오르더라구요. 그러면서 한번 더 차문 뒤쪽을 보고 문을 열게 된다는... 트라우마라는게 이런거겠죠. 기억하고 싶지 않아도 온몸이 기억하며 고통을 되새기는.... 그런 분들의 증언이기에 더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분들로서는 기억해내고싶지 않고 말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얘기해준 분들이 더 많을것 같기에요.

희선 2022-08-11 02: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쟁이 일어나고 나라를 지키려고 갔지만, 돌아온 뒤 다시는 예전처럼 살기 어렵겠습니다 이건 남성이나 여성이나 다르지 않겠지만, 여성은 더 힘들겠지요 이런 건 거의 알기 어렵기도 하죠 작가가 여성을 만나고 쓰는 게 힘들었겠지만, 써서 다행이기도 해요


희선

바람돌이 2022-08-11 15:14   좋아요 2 | URL
작가 역시 이런 증언을 다 듣고 정리하고 다듬는 과정이 그 고통을 자신이 다시 체험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리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 책뿐만 아니라 체르노빌이나 아프간전쟁 소년병들의 목소리를 남기는 작업싸지 참 대단한 작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새파랑 2022-08-11 12: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승자만의 기록이 크게 언급되지만 이런 소외받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발굴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더 실질적인 삶의 이야기니까요~!!

바람돌이 2022-08-11 15:17   좋아요 2 | URL
이런 소수자나 약자들은 목소리 자체를 내기가 어려울듯해요. 그걸 들어주겠다는 사람도 얼마없을테고.... 이렇게 묻힌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그래서 이 작가처럼 묻혀버릴 이야기들을 끈질기게 듣고 기록하는 사람들이 더 소중하기도 하네요.

희선 2022-09-08 02: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 님 또 축하합니다 힘이 없는 사람 이야기는 쉽게 잊히지만 그걸 기억하려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희선

바람돌이 2022-09-08 22:12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희선님도 마이리뷰 당선 축하드려요.

mini74 2022-09-08 08: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 축하드려요 ~ 벌써부터 무슨 책 사실지 궁금한 ㅎㅎ

바람돌이 2022-09-08 22:15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미니님 알라디너 tv까지 2관왕 축하드려요.
들어온 적립금은 어제 다 쓰고 추가까지 해서 다 쓰고 이젠 하나도 없네요. ㅎㅎ 다른 분들 책탑이 워낙에 거대하다 보니 저의 소소한 책탑은 요즘 좀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

거리의화가 2022-09-08 09: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 이달의당선 축하드립니다!^^* 이 책으로 당선되셔서 저도 기쁘네요~

바람돌이 2022-09-08 22:17   좋아요 2 | URL
화가님도 다이브 리뷰 당선 축하드려요. 이 책은 또 지난달 여성주의 책 같이 읽기여서 저도 더 기쁘네요.

새파랑 2022-09-08 16: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바람
돌이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 또 책구매 하시겠네요~!!

바람돌이 2022-09-08 22:18   좋아요 2 | URL
글쎄말예요. 벌써 다 썼고, 두 박스 책 주문햇는데 한박스는 오늘 왔다는...... ^^
새파랑님도 아르망스 리뷰 당선 축하드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