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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부르크, 막이 오른다
김주연 지음, 김병진 그림 / 파롤앤(PAROLE&) / 2021년 2월
평점 :
18세기 유럽을 향한 창을 내세우면서 표트르 대제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이 도시는 처음부터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설계되었다. 궁전과 성당, 건물과 운하에 이르기까지 이 도시의 건축 지향점은 오직 하나, 유럽적인 것이었다. 덕분에 온갖 유럽적인 풍경이 도시의 외관을 수놓게 되었지만, 실제로 이곳은 유럽이 아닌 러시아다. 러시아 작가 게르첸은 "페테르부르크는 유럽의 다른 모든 도시들과 유사하기 때문에 그 모든 도시들과 다르다"라고 썼다. 바로 이 간극에서 오는 묘한 부조화와 이중적인 정체성이 도시를 하나의 거대한 무대처럼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6쪽
표트르의 도시 페테르부르크는 이후 성곽을 뜻하는 독일어인 부르크를 대신해 슬라브어의 마을, 도시를 뜻하는 그라드를 붙여 페트로그라드로, 소비에트 혁명 이후에는 이 도시에서 시작된 혁명을 기려 레닌그라드로, 그리고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다시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이 도시. 이름만으로도 역사책 1권쯤은 가뿐히 써낼 것 같은 러시아의 이 도시를 규정짓기에는 아마도 저자의 말처럼 수많은 무대를 포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무대가 되는 도시라는 말이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린스키 극장의 발레,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니의 러시아 음악, 말리의 드라마극장의 연극들, 에르타미주를 비롯한 미술관들.
이름만 들어도 아 하게 되는 수많은 예술가들과 작품들을 배출한 도시.
하지만 이런 것 정도야 유럽의 다른 도시들도 꽤 있고, 정작 명성으로 따지자면 파리를 따라가긴 힘들것이다.
그러므로 페테르부르크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저 유럽적이면서도 유럽이 될 수 없는 수많은 운하의 안개속에 신기루처럼 떠있는 도시 그 자체일것이다.
푸시킨, 고골, 투르게네프,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에 이르기까지,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금자탑을 쌓아올린 작가들의 소설 대부분은 이곳 페테르부르크를 배경으로 펼쳐지거나 이곳을 스쳐 지나간다.
그런데 대부분의 러시아 소설에서 이곳 페테르부르크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이 펼쳐지는 현실적인 도시가 아니라, 굉장히 그로테스크하거나 매우 환상적이고 신화적인, 비일상적인 공간으로 그려져 있다는 점이다. -93~94쪽
도스토옙스키의 책을 들고 이 도시를 탐험하고 싶은 것은 나만의 꿈이 아니리라.
무엇보다 이 책에서 인상적인 것은 격동의 역사의 무대가 된 이 도시 자체의 역사이다.
그 중에서도 2차대전중 레닌그라드 봉쇄기간중 이곳을 살아냈던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는 그저 이야기를 듣는것만으로도 장엄한 인간의 힘과 숭고함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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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2일간의 봉쇄기간동안 레닌그라드의 사람들은 굶어죽고 얼어죽어갔다.
길거리에서 시신을 보는건 일상이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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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여전히 도시의 도서관은 문을 열었고, 사람들은 열람실에서 책을 펴놓은 채 굶어죽었다.
도시 내의 바빌로스 식물산업연구소의 연구원드은 대부분이 굶어죽었지만 누구도 종자 표본을 건드리지 않았다.
극장은 여전히 문을 열었고, 최선을 다한 음악회와 연극은 여전히 공연되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바치는 진혼곡이자 인간의 존엄에 대한 경배가 어쩌면 쇼스타고비치의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렇게 끝까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고자 했던 도시의 후예들이 오늘날 우크라이나 침략자가 된 것은 유감이다.
하지만 그 러시아인들이 자신들의 휴머니티의 뿌리가 되는 그 기억들을 잊지 않는다면 지금의 자신의 폭력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도 있찌 않을까라는 것은 또한 지나친 낙관인걸까?
세상을 사는 일도, 폭력에 대해 어떻게 저항할 수 있을까 하는 것도 어느 하나 쉬운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