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브라는 말에서 먼저 떠오르는건 낯설다는 이미지다. 러시아의 민족 또는 1차대전의 한 계기가 되었던 발칸반도의 범게르만주의 범슬라브주의 할 때 그 슬라브?
실제로는 어마어마한 땅과 어마어마한 사람들을 통칭하는 말인데도 슬라브라는 저 말에서 러시아를 떠올리고 마는 것은 왜일까?
책을 읽으면서 곰곰 생각해보니 1국가 1민족체제에서 살아온 한국인인 나에게는 민족 하면 바로 국가와 연동시키는 자동메카니즘이 있었구나, 머리로는 실제 세계가 그렇지 않다는걸 알지만 오랜 인식습관은 자동인형처럼 그렇게 연결되는구나 싶다.

그러나 이 책을 읽다보면 슬라브가 생각보다 낯설지 않다. 귀에 익숙한 도시들, 알고있는 역사들, 또한 익숙한 예술가들과 작가들. 생각보다 슬라브인들의 삶의 궤적은 가까이 있었는데 다만 인지하지 못한 것이 더 큰 듯하다.
지도를 보면 슬라브 지역은 크게 3지역으로 나뉜다.
러시아를 포함하는 동슬라브 지역- 지금의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가 포함된다.
서슬라브지역은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남슬라브지역은 예전에 유고슬라비아 연방으로 묶여있던 지역들 -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코소보, 북마케도니아, 불가리아가 해당된다.

이 책은 이 지역들에 대한 여행기이자 문화 예술 역사에 대한 안내서이기도 하다. 또한 독일과 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다 오스만제국까지 엄청난 강대국들에 둘러싸인 사람들의 피와 눈물에 대한 기록이기도하다. 그래서 이들은 나라가 달.게 모두 흩어져있어도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할때 슬라브라는 말을 유난히 강조하는지도 모르겠다.
천만이 넘는 사람들이 굶어죽었건 우크라이나의 홀로도모르는 아직도 국제기구를 통해 공식적인 제노사이드로 인정받지 못했고, 체르노빌은 여전히 죽음의 땅이다. 그 땅은 지금은 러시아의 침공으로 전쟁 중이다.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는 이 땅의 사람들에게 평화는 언제쯤 찾아올까?
모두가 모른척했고 지금도 모른척하고 있는 이 땅의 비극을 기억하게 한 것은 예술의 힘이다. 우크라이나의 헐로도모르를 취재했던 영국기자 가레스 존스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아그네츠카 홀란드 감독의 영화 <미스터 존스>, 스탈린에 대한 우화로 읽을 수 있는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스베틀라나 알렉예비치의 작품 <체르노빌의 목소리>, 우크라이나의 바비 야르 지역에서 발생한 나치의 이 지역 유대인 학살은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오늘 이 지역의 비극은 또 누구에 의해서 기록될 것인가? 여태까지의 기록으로도 고통의 임계점을 이미 넘겨버렸을 이 땅의 사람들에게 부디 빨리 평화가 찾아오기를 기원한다.

서슬라브에서 귀에 가장 익은곳은 역시 체코의 프라하다. 프라하를 가로지르는 블타바강은 독일어로 몰다우다.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 중 두번째 작품이다. 체코 필하노닉의 연주를 듣고싶었지만 못찾고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로 음악을 들으면서 서슬라브지역을 읽는다. 이 책은 사실 굉장히 쉽고 책장이 잘 넘어가는데도 불구하고 읽는데 시간이 꽤 많이 걸린다. 그 이유가 바로 이런 것 - 곳곳의 장소마다 관련된 음악과 미술 영화 책을 소개하고 있어 도저히 찾아보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하는 힘이다. 작가님의 목적은 아마도 이 슬라브 지역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사람들에게 불러일으키고 싶은듯한데 정감있는 글쓰기랄까, 그런 마음이 글에 곳곳에서 배어나와 아 이책도 봐야지 이 영화도 봐야지 하면서 자꾸 다른 자료들을 찾게 한다.

프라하에 대한 글에서 인상적인 것은 작가이자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화를 이끌고 초대 대통령을 지낸 바츨라프 하벨에 대한 프라하사람들의 애정이다.
거창한 기념비가 아니라 프라하 국립극장 한 편에 저렇게
빨간 하트로 표현된 마음은 오히려 간절하여 이방인의 마음조차도 따뜻하게 만든다. 이 하트 하나를 보고싶어 짐을 챙겨 프라하로 가고싶다는 마음을 들게하는 것이다. 더구나 프라하는 카프카의 도시이고 카렐 차페크의 도시이며 자유를 향한 체코인들의 메시지를 담은 존 레논벽의 도시이기도 하니 이 도시 하나를 보는것만으로도 얼마나 벅찰까.

폴란드의 브로츠와프는 난쟁이의 도시이다. 1980년대 억압적이었던 이곳에서 이 도시 사람들은 정부의 공고문과 표어들 위에 난쟁이 그림을 덧붙임으로써 공개적으로 그들을 조롱했다. 공산주의가 무너진 뒤 폴란드인들은 도시 곳곳에 언갖 모습ㅇ 난쟁이 상들을 조각하여 이를 기념한다. 그런가하면 도심에 1980년대 계엄령 기간에 사망한 이들을 기념하는 슬픈 기념비도 존재한다. 혹독한 시절에 대한 기억을 유머로 승화시키는 한편 아픔을 진정한 아픔으로 표현할줄 아는 이들의 예술적 감수성에 놀라게 된다.

남슬라브는 정말로 낯설다 느꼈었는데 생각해보니 오래전 인상깊게 봤던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의 영화 <언더 그라운드>의 그곳이다. 모두가 죽고 영혼들이 흥겹게 떠들며 음악에 맞춰 춤추던 모습이 아릿하게 다가오던 영화였다. 그토록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춤추고 노래하던 이들의 땅. 그러나 20세기에 가장 극악한 비극을 겪은 이들은 지금도 그런 낙천성을 가지고 있을까? 사라예보를 가득 채운 묘지들은 모두 1992년에서 1995년 사이 보스니아 내전 기간에 죽은 이들이다. 이렇게 많은 묘지들을 안고 사는 이들의 땅에 대한 궁금증은 이보 안드리치의 <드리나 강의 다리>로 나를 이끈다. 보스니아에서 태어나 크로아티아 대학에서 공부하고 세르비아에서 집필활동을 했건 이보 안드리치는 지금은 없는 나라 유고슬라비아인이었다. <드리나강의 다리>를 주문하면서 어쩌면 그토록 오랫동안 고통의 역사를 겪은 이곳 사람들의 마음 한자락을 느껴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갇을 해보기도 한다.


댓글(9) 먼댓글(1) 좋아요(3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2019년 10월 12일 프라하에서
    from 내 인생은 진행중 2022-05-05 05:33 
    오늘 아침 바람돌이님의 <슬라브 막이 오른다> 페이퍼를 보다가 책에 실렸다는 사진이 익숙하여 기억을 더듬더듬. 몇년 전 프라하 여행하면서 책에 실린 것과 똑같은 사진을 찍어놓은 것이 생각나서 지난 사진 앨범을 뒤적거리게 되었다. 프라하 국립극장 아래층 입구에 있던 하트.바츨라프 하벨을 기리는 마음을 나타낸 기념비 같은 것이다. 시내에는 바츨라프 광장이라는 곳도 있다. 관광객들이 결코 피해갈 수 없는 곳. 여기 바츨라프는 대통령 바츨라프 하벨이
 
 
희선 2022-05-05 0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슬라브는 어느 한나라가 아니군요 몰랐습니다 동서남으로 나뉘고... 슬라브 민족은 힘든 일을 많이 겪었지만, 문화 예술을 좋아하기도 했네요 그걸로 힘든 걸 넘었을 듯도 합니다 한국에서는 한이라고 하는... 그러고 보니 폴란드에도 한과 비슷한 말이 있다고 한 걸 봤는데, 그 말 잊어버렸네요 우크라이나에 평화가 찾아와야 할 텐데...


희선

바람돌이 2022-05-05 01:59   좋아요 1 | URL
맞아요. 희선님. 슬라브족들의 나라가 진짜 많죠. 또 그런데 이 지역에 사는게 또 슬라브족만은 아니라는.... 게르만족도 섞여 있고 유대인들도 많고... 거기다가 지역별로 종교도 다양하면서 갈등과 분쟁이 끊이지 않은 지역이기도 하구요. 참 여러가지 생각이 많아 드는 책이었습니다.

hnine 2022-05-05 05: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오늘 꼭두새벽부터 추억여행에 빠져보았습니다.
‘슬라브‘ 라는 단어는 낯설지 않지만 저는 슬라브 하면 우선 복잡한 역사, 지리, 정치, 이런 것들부터 연상되어요.
어떤 의미에서 막이 오른다고 했는지, 이 책 저도 읽으면서 더 알아보고 싶어졌어요. 그러다보면 러시아 역사, 문화에 대한 것도 흘끔거리게 되겠지요.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함께 올리신데는 다 이유가 있으실테니까.
음악 <슬라브 무곡>도 생각이 납니다. 저는 몰다우보다 좀 가벼운 슬라브 무곡부터 들으러 가봅니다~
좋은 책 소개 감사드려요.

바람돌이 2022-05-05 13:06   좋아요 1 | URL
러시아에 대한건 이 작가의 페테르부르크 막이 오른다라는 책이 있더라구요. 전 이 책도 보려구요. 동물농장은 우크라이나 이야기하면서 스탈린의 말도 안되는 강압정책으로 수많은 우크라이나인이 굶어죽었던 이야기와 연결되어요. 읽기 쉽지만 그렇다고 내용이나 관점이 가볍지 않아서 저는 이 책 좋았습니다

새파랑 2022-05-05 07: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체코 하면 카프카, 쿤데라 아닌가요 😆 저도 드리나강의 다리 사놓고 못읽고 있는데 바람돌이님 글 보니 5월에는 읽어야 겠어요 ^^

바람돌이 2022-05-05 13:11   좋아요 1 | URL
국제적인 명성에서야 당연히 쿤데라와 카프카지요. 하지만 이 책에서 체코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국민작가는 보후밀 흐라발을 얘기하더라구요. 너무 시끄러운 고독의 그 작가요. 암울한 시절에도 체코를 떠나지 않고 평생 체코어로만 글을 쓰면서 신간을 쓸때마다 금서로 지정되어 지하 출판으로만 읽을 수 있었다네요. 이 작가의 책도 제목만 보고 있었는데 빨리 읽어보고싶어졌어요. 제 드리나강의 다리는 지금 열심히 배송중이랍니다. ㅎㅎ

프레이야 2022-05-05 16: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슬라브족의 수난사. 광범위한데 전 남슬라브 발칸쪽이 가장 먼저 떠올라요. 기억에 강하게 남아 있다보니 그런 거 같아요. 드리나강의 다리 강추에요. 미스터 존스 영화 홀로도모르와 연관해 좋은 영화였어요. 무심히 흐르던 블타바강을 내려다보았던 기억도 떠올리며… 체르노빌의 목소리 아직 안 펼쳤네요. 예술가의 흔적과 함께 씹어먹기 좋은 책 같아 담아가요 ^^
표지그림도 참 좋습니다.
우크라이나에 어서 평화가 오길!

바람돌이 2022-05-05 17:45   좋아요 1 | URL
프레이야님이 강추하는 책과 영화 역시 기대만발입니다. 이 책 표지는 저도 참 마음에 들더라구요. 풍경그림도 좋고 뭔가 연극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달까요. ㅎㅎ 지금의 우크라이나 상황때문에 이 책을 읽는 것이 더 각별했던것 같습니다.

scott 2022-05-09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유럽 국가 중에
우크라이나 키예프만 못 가봤습니다(그루지아 몰도바는 가봤는데 ㅎㅎ)

가려고 계획 했던 시기에
코로나-전쟁 터져서 ㅠ.ㅠ

전쟁의 끝도 보이지 않고
전후 재건 과정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는 비극적인 현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