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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한국전쟁’들 - 평화를 위한 비주얼 히스토리
푸른역사 / 2021년 6월
평점 :

(출처 - 작은 한국전쟁들 26페이지)
이 소년들은 누구일까? 동그라미 안의 소년은 왜 저렇게 괴로워 보이고, 오른쪽 끝의 소년은 무언가 눈치를 보는 것 같은 눈빛으로 무엇을 응시하고 있는걸까? 모든 소년이 하나같이 지치고 힘들어 보이는건 왜일까?
제주도의 양일화 할아버지는 1948년 11월 20일(16세 때) 제주읍 친척집으로 가다가 대한청년단에게 잡혀, 제주 4.3무장대를 도왔다는 혐의를 억울하게 뒤집어쓰고 끔찍한 고문을 받은 후 재판에서 5년형을 선고받고 인천소년형무소로 보내졌다.
인천소년형무소로 보내진 소년범들은 166명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1950년 6월 29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인천소년형무소에서 후방의 대전형무소로 이감중이던 소년들이었던걸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들이 정말로 이감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한국전쟁에서 이른바 사상범으로 분류된 이들 대부분은 흔적도 못 남긴 채 사라졌다.
이곳에 있었던 양일화 할아버지처럼 살아남은 이는 극소수다.
한국전쟁에서 몇명이 어떤 이유로 죽었다는 통계속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이런 구체적인 얼굴들이다.
통계숫자를 대할 때와 달리 사진속 저 소년의 눈빛과 절망어린 몸짓을 대하는 순간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가 되고, 이들의 고통과 억울함이 가슴을 때린다.

(출처 - 작은 한국전쟁들 183페이지)
상의를 탈의한 저 청년들은 누구인가?
전쟁포로 교환을 통해 귀환한 국군 포로들이다.
판문점을 통과해 고향으로 돌아온 이들은 북한인민군 복장의 포로복 상의와 바지를 다 벗어버린 채 팬티만 입고 태극기를 흔들며 애국가를 부르고 있다.
죽음으로 애국을 입증하지 못하고 살아 귀환한 포로에 대한 이중적 시선을 직감해서인지 이들은 필사적이다.
그러나 그 필사적인 입증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간 곳은 거제도 근처 작은 섬 용초도라는 곳에 있는 포로수용소였다.
포로 교환 이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따로 고위급 또는 열성분자 포로들을 수감했던 곳이다.
이들은 이곳에서 자신의 사상의 건전성(?)을 또다시 입증해야 했다
그것을 입증하지 못한 이들은 즉결처형됐다.
이 책의 대부분의 내용이 어느 정도는 알고 있던 사실이었는데, 고향으로 돌아온 포로들의 이야기는 정말로 처음 들었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 사회에 강요되고 있는 사상검증, 시도때도 없이 소환되는 좌경용공의 마타도어는 결국 한국전쟁의 결과이다.
사진은 때로 백마디의 말보다 더 빠르게 진실을 전한다.
물론 사진은 그렇게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저자가 모은 사진들은 대부분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발굴한 사진들이다.
이 사진들은 대부분 미군의 홍보전을 위해서 찍힌 사진들이다.
당연히 사진들은 원래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것이 찍힌 맥락을 읽어내야 한다.
저자는 각각의 사진들의 맥락을 찾아가면서 잘 못 기록된 것은 무엇인지를 꼼꼼하게 찾아 한국전쟁의 진실을 알려주고자 한다.
무엇을 위해서?
결론은 용산전쟁기념관에 이른다.
한국전쟁은 용산전쟁기념관에서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곳은 아직도 내 생명 영원한 조국을 위해라고 외치면서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끝없이 상기시키는 공간이다.
그 속에서 일제의 군국주의적 자살특공을 살신보국의 애국주의 이념으로 탈바꿈시키면서 전쟁영웅을 찬미하고 있다.
전쟁이 끝난지 곧 70년이다.
우리는 여전히 전쟁이 시작된 날 6월 25일을 기념하는 나라에 살고 있다.
그날 새벽 물밀듯이 남으로 내려오던 북한군을 상기하면서 언제나 경계하고 아직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고, 언제든 다시 시작될 수 있으니 경계를 늦추지 말 것이며, 우리 사회내에서 북한을 이롭게 하는 좌경용공분자들을 경계하고 타도해야 한다는 나라에 여전히 살고 있다.
한국전쟁은 1953년 7월 27일에 끝났다.
2차대전을 겪은 여러나라가 각각 자국의 종전일을 기념하듯이, 우리 역시 전쟁 시작일이 아니라 전쟁이 끝난 날을 기념하는 것은 언제쯤 될 수 있을까?
전쟁이 아닌 평화를 위해서 -용산 전쟁기념관이 평화박물관이 되고, 상기하자 6.25가 아니라 평화를 기억하는 7.27이 되는 날을 위해서 역사학자들이 여전히 이런 책을 쓰고 있다.
그냥 기억하라가 아니라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되새기는 책읽기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