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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만나면 그곳이 특별해진다 - 도발하는 건축가 조진만의 생각노트
조진만 지음 / 쌤앤파커스 / 2021년 7월
평점 :
내 주변에는 유난히 퇴직후 시골에서의 삶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다.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런지, 아니면 내 주변이 특별히 많은지 그건 알 수 없는데, 어쨋든 그 지인들은 주말농장도 하고 나름 열심히 준비하는 사람들도 있고, 아니면 아직은 말뿐인 사람들도 있고....
그런데 나는 시골 섬마을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시골생활에 대한 로망이 일도 없다.
내 꿈은 차도녀! 현실은 찌질도시월급쟁이... ㅠ.ㅠ
어쨌든 공간에 있어 나의 주요 관심사는 도시와 도시를 이루는 건축물들이다.
도시를 걷고 아름답고 멋진 건물들을 보고 그 건물들의 역사를 생각하고 어쨌든 이런 것들이 참 좋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좋다. ^^
그래서 도시에 관한 책이나 건축에 관한 책들이 나오면 전문서적이 아닌 이상 손길이 가게 되는데, 그 선택의 결과를 성공과 실패로 본다면 보통 반반이다.
이 책은 성공작!
일단 저자의 시선이 참 좋다.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건축의 가장 중요한 가치가 '관계를 만들고 사회를 형성하는 틀'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와 남, 자연과 인간, 개인과 사회, 안과 밖 등 다양한 관계성을 통해 우리 문화와 사회는 발전했습니다. - 7쪽
여기서 저자의 관심이 건축물 자체가 아니라 건축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고 좀 더 나은 사회, 좀 더 나은 인간관계, 환경을 만드는데 일조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데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런 관점은 이후에도 반복 제시되어 지는데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다.
건축은 우리의 생활과 주변과의 관계, 나아가 생각하는 방식 전반을 바꾼다. 좋은 건축 속에서 살면 좋은 사람이 되기 마련이고좋은 도시공간에서 살면 보다 공감하며 소통하는 개방적 사회의 구성원이 되기 마련이다. -100쪽
저자 스스로가 던진 질문이 이 책에서 완전히 해소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고민을 따라가다보면 수긍할 수 있는 의견을 많이 만날 수 있다.
건축에서 특정한 기능을 가지지 않는 중정이나 넓은 복도와 같은 공용공간의 쓰임새를 저자는 옹호한다.
이런 공간은 아무것도 없는 무의 공간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개입과 아이디어에 의해 무한하게 가능성이 확장되는 시작이라고 얘기한다.
한옥에서 비워져 있는 마당이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고, 망중한의 사색의 공간이 되고 또는 사람들이 모여 잔치를 열고 교류하는 공간이 되기도 하는건 바로 그 비워져 있음으로 인해서이다.
서양의 옛 건물들을 보면 흔히 중정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 중정으로 인해 밖으로 폐쇄적으로 보이는 건물이 안으로 사람들을 품어내고 주택의 곳곳에 빛을 보내는 역할을 하며 공공의 장으로 활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 아이들이 어린 시절 때때로 생각했던게 아이들의 창의성이 가장 크게 발휘되는 것은 정말 어떤 장난감도 없을 때였다는거였다. 그럴 때 아이들은 결코 가만있지 않는다. 자기 주변의 뭐라도 찾아내서 새로운 놀이를 만드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그 놀이들은 매번 새로웠다.
건축과 공간 역시 이렇게 무엇으로도 변할 수 있는 정해져 있지 않은 어떤 공간, 여백을 품을 때 비로소 창의성이 샘솟고, 사람들의 의도하지 않은 만남이 이루어지면서 우리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것일테다.
한동안 지방자치단체들에 의해서 우리나라는 랜드마크 열풍에 휩싸였던 것 같다.
스페인의 쇠락한 탄광도시인 빌바오가 구겐하임 미술관 하나로 관광도시가 되는걸 보면서 유행처럼 번져나갔던 조류다.
그러나 랜드마크가 진정한 도시의 상징이 되기 위해서는 치열한 준비와 지역주민들의 공감과 그것이 가지는 주변과의 연계성과 도시구조의 개선에 들인 지속적인 노력까지 많은것들을 살펴봐야 한다고 정의한다.
이 대목에서 딱 서울의 동대문 야구장에 들어선 DDP를 둘러싼 논쟁들이 생각났다.
거대한 우주선 같은 DDP건물이 랜드마크로 기능할 수 있는가 없는가? 그것이 과연 동대문 지역의 주변환경에 걸맞는 건축인가 등등....
내가 본 DDP는 건물 자체만으로는 굉장히 훌륭하고 내부의 동선 구조도 효율적이면서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하지만 그것을 밖에 나와서 봤을 때 뭔가 홀로 동떨어져 있는 섬인듯하다는 생각도 했었다.
서울을 대표하는 랜드마크?
나홀로 외로이 동동 떠있는 DDP가 서울의 랜드마크가 될 수 있을까?
그냥 멋진 건물로 잠시 스쳐가는 관광코스였다는 느낌이 더 든다.
오히려 서울에서 더 기억에 남는 건물은 승효상씨가 설계한 대학로의 쇳대박물관이었다.
내가 여길 갔을 때는 이게 누구 작품인지도 몰랐다.
아니 여길 갈려고 갔던것도 아니고 대학로를 지나다가 우연히 들어갔던 건물이다.
쇳대박물관은 처음 지나갈때는 거기 있는지도 모르게 존재하나, 한 번 눈에 들어오면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다.
아! 저 건물 뭔가 심상치 않아하면서 들어갔던 기억이 난다.(이 곳의 기억이 너무 좋아서 나중에 집에 와서 누가 건축한건지 찾아봤었다.)
건축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정답은 없으나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삶의 공간으로서 주변환경, 사람들과 연결되는 공간을 좀 더 지향해야할 건축이라고 한다면 나는 DDP보다는 쇳대박물관에 손을 들어주겠다.
많은 건축가들이 지적하듯이 서양이 광장을 중심으로 도시가 이루어진다면 우리나라는 골목이 그 역할을 한다고 저자는 또한 얘기한다.
사람이 만나고 어울리고 다양한 생활공간들을 품고 있는 길들를 살릴 수 있는 건축물들의 관계를 통해 내 것과 모두의 것간의 경계가 모호하게 될 때 전체적인 도시공간이 풍성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현재의 아파트 중심의 주거공간은 최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점을 보완한다고 르 코르뷔지에가 그랬던 것처럼 도시 전체를 뒤집어 엎을 계획은 사실상 불가능하고, 그에 대한 대안으로 도시 내의 방치된 공간 유휴공간들을 활용할 방안을 제시하는 것도 새겨들을만하다.
동시에 어떤 공간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더 중요한 것은 그 공간을 채우고, 이용하고 소통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활동일 것이다.
도시에 생기를 불어넣고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좀 더 인간의 향기를 느끼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고민해야 할지 아직 명확하게 잡히지는 않지만 고민을 만들어 주고 원칙을 알려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