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버지니아 울프가 "여성이 픽션을 쓰려면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던가?
인생살이의 많은 것들이 대부분의 많은 남성들은 그저 주어지는 것일 때,
여성이 그것을 가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싸우고 쟁취해야 하는 것이 된다는 문제의식에서 페미니즘이 출발할지도 모른다.
만약에 우리가 다같이 가난하고, 다같이 자기만의 방이 없으나 다 같이 열심히 일한다면 세상을 향해 여자들이 이렇게 싸우지 않아도 될지도 모른다.
문제는 언제나 불평등이다.
하필이면 이 책이 "글쓰는 여자의 공간"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온 것도 이런 문제의식에서 기인할지도 모른다.
그 힘든 공간을 만들어내고 어쨌든 글을 썼던 여성 작가들의 이야기말이다.
이 책을 손에 든 것은 왠지 짜릿할 듯한 이 제목 때문이다.
어쩌면 내 안에 내재해 있는 훔쳐보기에 대한 은밀한 욕망의 발현일지도 모르겠다.
좀 더 순화해서 말하자면 궁금증, 호기심이겠지만 어차피 호기심이나 훔쳐보기나 오십보 백보다.
솔직히 책은 실망스러웠다.
제인 오스틴의 유러스러한 말로 시작할 때는 기대감을 잔뜩 갖게 했는데 말이지.
"홀 부인이 어제 아이를 유산했어. 출산 예정일을 몇 주밖에 안 남기고 말이야. 무슨 충격 때문이라는데 내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자기 남편 얼굴을 쳐다보고 그렇게 된 게 아닌가 싶어." ㅡ (32쪽)
시작부터 빵 터졌는데 문제는 이게 끝!!!!!
그저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얼굴과 그들의 공간, 그리고 그들이 한 말 중에서 인상적인 문장들을 뽑아놓은 장들이 이 책의 재미의 다였다.
사진만 봐도 별 문제 없을 듯한 책이다.
대부분 평범한 서재였지만 가끔은 특이한 곳들이 눈에 띈다.

거투르드 스타인은 글을 쓰기 전에 그림을 보는 습관이 있었다.
그래서 온 벽을 그림으로 장식해놓았고, 설사 피카소의 그림이라 할지라도 맘에 안 들면 글쓰기에 방해된다고 불평하며 입맛까지 달아난다고 했다니...
부러운 이다.
그림으로 가득찬 벽과 커다란 책상, 나의 로망을 다 실현한 이 분은 그런데 왜 저렇게 불편한 자세로 글을 썼을까?

클로딘 시리즈의 시도니가브리엘 콜레트는 말년에 고관절염으로 인해 침대에서 생활해야 했다고 한다.
침대에서 화장을 하고 손톱을 다듬고 사람들을 맞이하며 글을 썼다고 한다.
현대라면 완벽한 외출 또는 출근 복장인 그녀의 모습을 보면 글을 쓰기 위해서는 무언가 외적인 자세를 가다듬는 것이 글쓰기의 시작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아침먹고 치우고 나서 아이 학원을 보내고 잠옷차림(이라고 쓰고 추리닝)으로 식탁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는 나는 이렇게 잡글만 쓰고 있다.
어쩌면 제대로 된 글을 쓰려면 집에서도 출근하는 것처럼 화장을 하고 옷을 차려입고 하는 의식같은 경건함이 필요한 걸까?

이 책속 작가들 중에는 이렇게 아예 야외에서 글을 쓰는 작가도 있다.
그 충격적인 죽음으로 인해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실비아 플라스.
그녀는 어디서나 글을 썼단다.
집의 구석진 계단에서도 이렇게 야외에서도 타자기를 들고 다녔다는데....
이렇게 치열하게 썼는데도 글쓰기가 그녀 자신을 구원해주지 못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사진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 도리스 레싱이다.

노벨 문학상 수상 직후에 인터뷰를 하고 있는 노작가의 모습은 충격적이다.
주변의 흔한 동네 할머니처럼 집앞 계단에 걸터앉아 인터뷰를 하는 모습!
아 진짜 이 사진 너무 좋다.
어쩌면 이분은 자신의 사적인 공간에 취재진을 들이거나, 개인 공간을 공적인 공간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을 듯하다.
그녀가 허락한 공간은 딱 집앞까지...
너희들 "Stop!!!"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
이분의 이야기도 읽고 싶었는데 이 책속에는 사진만 있다.
어쩌면 작가도 도리스 레싱의 공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가 싶은데 그럼에도 이 사진을 앞쪽 화보에 넣은건 나처럼 이 사진이 너무 인상적이었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