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끌 같은 나
빅토리아 토카레바 지음, 승주연 옮김 / 잔(도서출판)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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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복잡한듯 하면서도 단순하다.

인간의 온갖 욕망이 다 복잡해보이지만 따지고 들어가면 결국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부자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어디에 방점을 더 두는가? 어느정도의 사랑? 어느정도의 인정? 어느정도의 부자에 만족하느냐에 따라 그 스펙트럼은 또 천만가지로 나뉘겠지만 말이다.

 

소련 또는 러시아라는 나라의 여성작가 책은 처음이다.

이쪽은 워낙에 쟁쟁한 작가들이 많아 사실 그들의 책만 읽어도 차고 넘치겠지만,

가만 생각하면 그 세계적인 대가 러시아 작가들에게서 여성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본적은 없는 것 같다.

<안나 카레리나>나 <닥터 지바고>가 있겠지만 이런 소설의 여주인공들은 남성작가가 바라본 여성이라는 혐의에서 자유롭지는 못할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빅토리아 토카레바라는 이름도 생소한 러시아 여성작가가 펼치는 여성의 세계는 흥미로웠다.

 

이 소설은 스탈린 시절부터 페레스트로카 이후까지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면서 다양한 여성들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저 시절의 소련 또는 러시아는 어쩌면 지금의 중국처럼 뭘 가져와도 이야기가 되는 시절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격변의 시절이란 상상하기 힘든 일도 너무 쉽게 현실이 되고, 일반적인 삶의 경로에서 벗어나는 것이 오히려 일상이 되기도 하는 시절이기 때문일테다.

결국 이 소설은 그런 시절 사랑과 부와 명예를 갖고 싶었던 여성들의 이야기다.

읽다 보면 이게 과연 소설인가 르포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연대기적인 느낌도 물씬 나는 중편 3개의 이야기와 단편 2개로 이루어져 있다.

 

빅토리아 토카레바의 이야기 속 여성들은 하나같이 자존감이 강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명확히 알고 쟁취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렇게 얘기하면 굉장히 긍정적인 인물상이 그려질법도 한데,

우리의 개발시대 시골에서 꿈을 품고 상경했던 수많은 영자 순희들의 삶을 생각하면 이들이라고 해서 딱히 다르지는 않을테고, 그런 속에서 무엇인가를 가지고자 했다면 긍정적이거나 도덕적인 것만으로는 부족할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 소설속 여성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욕망하는 주체로서의 자신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 이런 점이 빅토리아 토카레바가 페미니즘 작가로 분류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표제작인 <티끌같은 나>에서 노래라는 재능 하나를 믿고 모스크바로 상경한 소녀 안젤라는 아직 어린 소녀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명확하게 알고 있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명민하게 살핀다.

 

레나는 실제로 편두통을 앓았고오후 1시까지 늦잠을 잤다두통의 원인은 안나 카레니나처럼   없음이었다레나는  일이 없었다화단에 물이라도 주면 좋으련만……하긴 집안일을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녀가 일한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집에는 운전기사와 경비원도 있었다안젤라는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 주인보다 행복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들에게는 저마다 목표와 높은 이상이 있었다뇌물을 줘서 아들의 군복무를 면제받으려는 이도 있고딸이 전문의 자격증을 따도록 뒷바라지하는 사람도 있으며러시아제 가젤을 사기 위해 돈을 모으거나 작은 사업을 시작하는  돈이 필요한 사람도 있었다저마다 추구하는  다를 뿐이었다. - P61

 

러시아에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새로운 부르조아의 삶의 허위를 냉철하게 간파하고, 자신의 삶의 방향을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는 안제라의 선택이 딱히 도덕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녀는 중요한 것,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선택한다는 것이다.

안젤라의 삶이 그저 그런 뻔한 신파가 되지 않는 것은 항상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중심에 두고 주변을 끊임없이 이용하고, 쟁취하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두번째 중편 <이유>에서 주인공 마리나는 그야말로 사랑받고, 사랑하고싶은 욕구를 극단으로까지 표현하는 여성이다.

삶의 중점이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서 개인의 선택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너무나도 잘 보여주고 있다.

어떻게 보면 그녀는 살아남는 방법에서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주고 생활력 강한 억센 여성이지만 자신의 모든 삶의 순간 순간에서 항상 사랑을 선택하는 여성이다.

그것이 비록 자신을 절망의 구렁으로 이끌지라도말이다.

삶은 끊임없이 곤두박질 치지만 그럼에도 마리나는 스스로 사랑을 선택하는 여성이다.

그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른지, 도덕적인지 아닌지는 마리나에게 중요하지 않다.

 

사람은 자기 경험을 토대로 세상을 이해한다마리나의 지인 중에는 수용소에 끌려간 사람이 없었고다른 사람들 사정은 그녀가   아니었다.- P287

 

 

세번째 이야기인 <첫번째 시도>에 가면 주인공 여성의 욕망추구는 극단적으로 진행된다.

마라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고 쟁취하는데 어떤 거리낌도 없다.

사랑도 권력도 부도 모두 가지고 싶은 여성이고, 실제로 한때는 그것 모두를 가지기도 하는 여성이다.

자본주의적 욕망의 화신이라고나 할까?

그녀의 삶은 어쩌면 러시아가 자본주의 사회로 재편되면서 무수히 많은 러시아인들이 밟아갔던 바로 그 과정일 것이다.

다만 이 평범한 이야기가 특별해지는 것은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것 때문일테다.

 

빅토리아 토카레바의 소설 속 주인공 어느 누구도 딱히 긍정적이지 않으며, 쉽게 공감이 가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특별한 것은 이 여성들을 보라고 당당하게 내놓는 지점에 있다.

남자에 의해 대상화되고 타자화되는 여성이 아니라, 비열하든 부도덕하든 상관없이 자신이 주체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여성들에게 말할 자리를 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욕망을 잘 들여다보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당연한 욕망이다.

왜 남자의 욕망은 성공스토리로 포장되면서 여성의 욕망은 은폐되어야 할 부도덕한 무엇으로 간주되는지에 대해 당당한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굳이 이론적으로 따지고 들지 않아도 그저 여성의 삶을 보여주면 된다.

거기에 남성 여성이 아니라 그저 인간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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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1-02-26 06:4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으셨군요!!! 저는 바람돌이님처럼 읽지 않고 그냥 정신없이 읽었어요. 이 책 덕분에 소설 읽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는데... ^^;;

바람돌이 2021-02-27 02:04   좋아요 0 | URL
러시아 여성을 소재로 하는 현대 소설이 많이 신선했어요. 소설을 읽는 건 항상 즐거워요. ^^

mini74 2021-02-26 12: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유. 읽으면서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이란 일본영화가 생각났어요. 묘하게 닮은 느낌. *^^*

scott 2021-02-26 14:28   좋아요 1 | URL
오 미니님 저도!
마츠코 불쌍한 마츠코 ㅜ.ㅜ

바람돌이 2021-02-27 02:07   좋아요 1 | URL
아 맞네요. 둘이 닮은거 맞네요. ㅎㅎ

cyrus 2021-02-26 12: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여성의 욕망’이라고 하면 대부분 사람(남자)은 ‘섹슈얼한 욕망’으로 생각해요. 욕망을 욕정의 동의어로 보는 거죠. 남자들은 여성의 욕정에 호기심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부정적으로 바라봅니다.

바람돌이 2021-02-27 02:08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남자들은 왜 아직도 그 지독한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못벗어나는 이들이 그토록 많은걸까요? 그렇게 자기 생각에만 갇혀있으니까 독해도 못하죠. ^^

희선 2021-03-02 0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자 남자를 떠나서 사람은 욕망을 가지고 있겠지요 예전에 본 드라마 같은 거 생각해도 다 남자이야기밖에 없었던 것 같네요 러시아 작가도 남성 작가만 더 알려졌고... 아주 없지 않았을 텐데, 이제야 이런 생각을 하는군요


희선

바람돌이 2021-03-03 11:44   좋아요 1 | URL
저도 마찬가지예요. 진짜 러시아는 워낙에 대단한 남자 작가들이 많아서인지 여성작가들이 너무 가려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하나씩 이렇게 번역이 되어 나오니 다행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