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여행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4
자우메 카브레 지음, 권가람 옮김 / 민음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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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운명이란 그런 것이다. 서사의 전체가 아닌 일부분만을 제멋대로 보여준 채, 아닌 척 모호한 웃음을 지으며 우리를 속이려 든다.   - 49쪽


 자신의 책에 대해 책 속에 이렇게 딱 소개하는 글을 넣을 수가 있나? 책 속 저 문장이 말하듯 자우메 카브레가 만들어 낸 14개의 이야기들도 그들이 처한 운명의 일부분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삶의 다른 공간, 다른 사람, 다른 시간에서 이야기는 되풀이되고 변주된다. 내가 음악을 잘 알았다면 음악의 변주와 함께 이 이야기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음악을 모른다고 해서 이야기의 감동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하나 하나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완결되어 이야기의 탁월함과 감동을 가져다주면서 동시에 뒷 이야기의 장면에서는 다른 식으로 변주되어 무릎을 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내 삶의 운명 역시 이렇게 어딘가 다른 곳에서 변주되는 것일까?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든다. 


 어떤 이야기가 가장 좋았나라고 질문하면 대답하기 어렵다. 첫 번째 이야기 사후작품에서 이건 뭐야라며 예감이 안좋은데 하다가 두 번째 이야기 유언장에서 빵 터져 주변 사람한테 막 이야기하면서 진짜 인생 너무하지 않냐라고 한탄하게 하다가 세 번째 이야기 손안의 희망에서는 주인공의 마지막 결단이 너무 가슴에 맺혀 찌릿한 감동을 느끼게 만든다. 그런 감정의 변주를 널 뛰듯 경험하다가 마지막 겨울 여행은 첫 번째 작품 사후 작품과 겹치며 사후 작품을 완전히 새롭게 읽게 만들어버린다. 


 이 책의 14가지 이야기 어느 하나도 스포일러를 하고 싶지 않다. 그 말은 이런 재밌는 책을 널리 알리고 싶은데 내 글솜씨로는 그걸 알려 줄 능력이 안된다는거다. 그냥 재밌어요 읽으세요 한다고 누가 읽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어렵고도 어렵구나. 어쨌든 피해가 보자! 스포일러!


  사후 작품은 마지막 작품 겨울 여행과 만날 때 완성된다. 슈베르트를 연주하는 피아노연주자 앞에 진짜 슈베르트가 앉아 있다니.... 누가 감히 슈베르트를 연주할 것인가? 친구이자 이루어질 수 없는 짝사랑이 보내준 알려지지 않은 악보로 훌륭한 연주를 해내지만 그는 절망에 빠진다. 나는 다시 피아노를 칠 수 있을것인가 아니 피아노가 지긋지긋해지는 그 절망적인 순간에 나를 붙들어줘야할 친구이자 내 사랑은 다른 데 정신이 팔려있어 나의 절박한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 친구 역시 지금 절박하다. 25년을 기다린 사랑이 다시 사라졌다. 제대로 인사조차 못했는데.... 


  삶은 언제나 나의 뒷통수를 칠 준비가 되어 있다. 유언장에서 예고없이 다가온 아내의 죽음은 나를 절망하게 하지만 그것이 진짜 절망이 아니라며 강렬한 뒷통수를 준비하고 있다. 이 남자 앞으로 살아나갈 수 있을까? 작가는 왜 이렇게 비관적이지 하는 순간 다음 손안의 희망은 다시 우리에게 삶이 그렇게 암울하지 않음을 이야기해준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인생의 빛이 내게 다가오는 것이다. 남에게는 네가 여태까지 쌓아온 계획을 한 순간에 포기해버리는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이지만 나는 알것 같다. 내 인생을 지탱해주던 단 하나의 소망이 이루어진 그 순간은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음을....다음 단편 이분(진짜 시간 2분, 바로 그 2분이다.)에서는 짧은 시간 2분 단위로 물고 물리는 상황들을 보여주면서 우리가 그 시간들의 어느 순간에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또 누군가의 삶에 끼칠 결정적 영향의 순간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나의 2분이 어쩌면 앞 단편들의 사람들의 삶에 폭풍을 일으킬 작은 날개짓이 될지 어찌 알겠는가?


  돌고 도는 삶의 순간들은 사람만이 겪는 것은 아니다. 바흐의 자폐 아들의 멜로디를 음악으로 만든 바흐의 작품은 실수를 은혜하려던 제자 고트프리트에 의해 불길 속에 사라지지만 삶의 마지막 순간 그 작품을 다시 살려낸 고트프리트에 의해 세상을 돌고 돈다. 그리고 사후 작품의 피아니스트에게 돌아간다. 렘브란트의 작품 <철학자> 역시 그렇게 세상을 떠돈다.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수많은 사람을 끌어들이고 그들을 파멸 시킨다. 하지만 작품과 사람들의 삶은 여전히 돌고 돌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출구가 없는 끝도 존재한다. 나는 기억한다 속 이자크의 마지막은 삶의 첫 재채기의 순간으로부터 시작된 죄책감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원죄를 보여준다. 그것이 이자크의 의도가 아니었더라도 평생을 따라붙는 죄책감은 결국 그를  파괴시킨다. 나를 그 자리에 대입시킨다고 해도 별다른 방법이 있을 듯하지 않다. 결국 파멸을 향해 갈 수밖에 없는 그 인생에 연민을 보낼 밖에는..... 단편 발라드 속에서 아이를 빼앗긴 어머니는 인생의 아이러니를 여실히 느끼게 한다. 나의 파멸과 나의 사랑이 만나는 그 지점 인생은 아이러니이고 비극이다. 


 작가의 마지막 문장이 이 단편집 전체를 관통하여 그가 하고싶은 말이었을 것이다. 작가의 말대로 우리 인생은 그저 여행의 중간 지점일 뿐.....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인생은 하나의 경로도 목적지도 아닌 여행이며, 우리가 사라질 때는 그 위치가 어디든 우리는 언젠 여행의 중간 지점에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의 불운은 하필이면 가혹하기 짝이 없는 겨울 여행에 당첨되어, 영혼이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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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05-10 17: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 진짜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ㅋㅋㅋ 여태 내공을 숨기셨구먼요!!

바람돌이 2025-05-10 18:53   좋아요 1 | URL
Falstaff님 내공이라니요? 저 그런거 없어요. 없는 내공을 어찌 숨길까요? ㅎㅎ
그래도 재미나게 읽어주셨다니 감사합니다. 책이 너무 좋았어요. 자우메 카브레를 알게된건 순전히 Falstaff님 덕분이니 모든 영광을 Falstaff님께 돌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