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을 생각한다
김용철 지음 / 사회평론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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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이 기사를 읽으면서, 나는 눈을 의심했다. 기사가 아니라 소설처럼 읽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히 사실을 다룬 기사였다. 
p. 417
 
   

 

아니, 김용철씨, 지금 누가 할 소리를 누가 하고 계신거요... 헐.  

이 책은 너무 황당해서 도무지 사실 같지가 않다. 만약 이 책이 소설로 분류되어 나왔다면 완전 쓰레기 3류라고 종이 재활용통에 던져버림이 마땅하다. 인물은 하나같이 비현실적이며, 사건은 어디 도색 잡지에나 나올법한 1%의 진실에 99%의 부풀림이 더해진 과장기사 같고, 그 진행 추이는 돈 꼴리오네 스럽다. 피가 튀지 않는다는 사실만 다르고. 물론, 실행의지가 없기는 했으나 살해에 관한 논의가 나오기는 한다.(마리오 푸조 님하, 미안.) 

더욱 뒷골 땡기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싸구려 3류 도색잡지 기획기사 같은 이 이야기가 100%의 진실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김훈 선생이 여러번 말씀하셨던 바, 팩트만을 전달하는 기사는 있을 수 없듯, 이 책 역시 팩트에 대한 김용철의 판단과 취사선택이 이루어지긴 했으나.   

이 책에서 가장 '깨는'부분은 2부 10장의 '이건희 일가, 그들만의 세상'과 11장 '황제 경영의 그림자' 였다. 이 장에서 그려지는 이건희와 홍라희의 모습은, 코메디에 등장하는 인물과 거의 흡사하다. 이건 뭐, 과대망상증을 가진 정신병 환자(특히 그 증세를 과장되게 표현해 등장시킨)를 주인공으로 한 코메디적 부조리극의 일종같다. 아니, 정말 미친건 아닐텐데 그런 행태를 보이는 건 미쳤다는 소린지 안미쳤다는 소린지 헷갈린다. 재벌그룹 총수라는 양반이 7년간 단 두번 회사에 출근했다는 기록은 이건 뭐, 어쩌자는 거지? 싶고, 100만원짜리 옷을 만들어서 누가 사입어요? 라고 말했다는 이건희의 차녀 이서현의 발언은 얜 무뇌아일까, 무뇌아인 척 해서 사람들을 웃기려는 걸까, 싶고, 결정적으로, 3명의 통신 담당관을 두고 전 세계의 TV프로그램을 하루종일 시청하신다는 이건희의 이야기는. 음. 육아전문가들에게 데려가서 교육을 시켜야 한다. TV 시청을 너무 오래하면 비디오 증후군에 걸릴수 있습니다. 라고. 가르쳐 줘야 하는데. 아하... 그의 정신병적 행태는 TV 시청을 너무 많이 해서 생긴걸까? 그럼 진짜 치료가 필요한 정신병 환자라는 이야긴데?  

인도네시아에 와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 teman(친구)라는 말이다. 이 나라 사람들은 한번만 만나도, 무조건 그 사람이랑 나랑 친구다, 라고 말한다. 이 나라 사람들 발은 또 얼마나 넓은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온갖 관공서에 친구를 두고 있다. 그리고 도움(bantu)이 필요하면 요청하면 된단다. 그럼 다 해 준다고 한다. 그러하다 보니, 진짜 친구는 또다시 teman yang terdekat (가까운 친구)라고 표현한다. 이 나라 사람들의 인맥에 대한 집착과 과시는 정말 상상이상이다. 참 신기한 나라일세, 했는데, 이 책의 저자가 그 이유를 풀어줬다. 

   
  평범한 이들까지 '마당발'을 동경하게 된 한 원인은 허술한 사회인전망이다. 개인의 삶에 위기가 닥쳤을 때, 친분이 있는 이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 밖에 없는 구조 때문이라는 이야기다. 갑작스럽게 직장을 잃었거나, 병이 생겼을 때 누구나 차별 없이 공공기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이런 문화가 생겨날 가능성은 적다. 실제로 사회복지가 잘 돼 있는 나라일수록 인맥관리에 지나친 힘을 쏟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고 한다. 반면, 사회복지가 취약한 나라일수록, 마당발을 동경하는 문화가 두드러진다고 한다.
p. 412-413
 
   

 

그런데, 이런 친구는 그냥 반뚜해 주지 않는다. 한국에서 친구라면, 당연히 해줄만한 일도, 이들은 태연하게 돈을 받는다. 이들의 "도와줄게" 라는 말은 내 도움을 돈 주고 사라, 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러한, 마당발의 인맥은 우정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러니 어느쪽에서든 아는 사람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다. 권력이 없는 서민의 경우에 안면을 터 놓은 경찰이 있다면 당연히 도움을 받게 될테니 그들과의 인맥에 집착을 하는 것이고, 경찰의 경우에는 인맥이 많으면 많을수록 잠재적 고객층이 넓어진다는 이야기니까 새로운 사람과 뜨만 뜨만 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처음에 그 돈은 그저 '급행료'라는 이름이었다. 일 처리를 좀 더 빨리 해 준다거나 약간의 서류 미비를 눈감아주는 대가였다. 그러다 그 급행료는 이제 변질되어 그 돈을 주지 않으면 일을 해주지 않는 수준으로 이르렀다. 세관은 웃돈을 얹어주지 않으면 이삿짐을 통관시켜주지 않고, 주거 확인 도장을 찍어주는 동네 통반장은 돈을 받지 않으면 도장을 찍어주지 않는다. 심지어 우체부는 우편물을 주지 않기도 한다. 이 나라에서 기업을 하려면 자세한 상납목록을 만든 장부를 누구나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다. 그 상납 장부에 들어가는 사람은 위로는 관련 관청의 장부터 말단 직원까지, 담당 경찰서의 경찰관들과 그 상부, 동네에 하나씩은 있게 마련인 어깨들, 심지어 종교 지도자들까지도 상납의 대상이 된다. 상납은 한달에 한번씩 돈을 줘야하는 대상부터 6개월, 1년에 한번씩 쥐어줘야 하는 대상들로 분류되고, 한번에 주는 돈도 지위마다 다 다르다. 뇌물공여에 죄책감이 없기 때문에 서로간 자기가 받은 뇌물을 공개하는 것도 예사여서 세심하게 조절해줘야 한다. 이것은 인도네시아의 관행이어서, 주지 않으면 사업 자체가 되지 않는다.  

그러하다보니 나라 전체가 썩어들어간다. 수돗물의 수질은 최악이고, 도로는 10년째 전혀 확충되지 않았다. 평소라면 10분 거리가 차가 막히면 2시간이 보통이다. 도무지 대책이 없는 것이다. 대부분의 도로는 비만 내리면 잠긴다. 주거환경은 끔찍하고 빈부격차는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 교육은 말할 것도 없으며 사회 복지는 없다. 그냥, 간단하게, 없다. 모든 재원은 그 뇌물로 다 들어가는 것이다. 회사는 설립되지 않으며, 대부분의 생필품은 해외에서 수입된다.   

   
 

생필품의 블랙홀이라는 거지. 생각해봐. 그곳에선 하루 다섯 번 시간 맞춰 기도를 하러 가야 하는데, 제조업이란 가능하지가 않아. 
유선전화 시대를 건너뛰고 사막 한가운데서도 휴대폰이 터져. 

정미경, <아프리카의 별>, 문학동네, 2010, p.187

 
   

  

이 상황은 인도네시아에서도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러한 생필품의 블랙홀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준 나라는 얼마전 지진이 일어났던 칠레였다. 남미의 칠레에 지진이 일어나고, 곧이어 사회는 통제불능에 빠졌다. 세계 각국과의 FTA를 통해 거의 대부분의 생필품을 수입에 의존했던 칠레는 지진으로 항만과 공항이 마비되고 도로 운송이 중지되자 그대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슈퍼마켓이 약탈당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각 나라의 내수를 책임지는 중소기업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그걸 보며 생각했다. 대기업의 횡포에도 꿋꿋히 살아남아 제품을 만들어내는 쿠쿠가 참 고맙고, 해피콜도 고맙고, 온갖 잡다구리한 것들을 만들어 내는 각종 중소기업들이 다아 고마웠다.

돈을 기반으로 한 인맥 정치는 나라를 이렇게 완벽하게 망쳐놓는다. 정부가 개판이 되면 국민의 생활이 얼마나 고달파지는지는 살아봐야 실감이 난다. 삼성이 하고 있는 짓이 이것이다. 그리고 김용철이 걱정하는 것도 그것이다. 유전무죄를 실감한 사람들, 그놈의 우정이 아닌 돈을 뿌린 것으로 만들어 진 인맥의 힘을 우리는 두눈으로 확인했다. 그러고 나면 너도 나도 돈을 뿌려대기 시작하는 것이다. 뿌리고 싶어도 못뿌리는 사람들은 둘째치고, 뿌릴 수 있는 사람들은 너도나도 여기저기 줄을 대서 돈을 뿌리게 될 것이고, 마침내는, 우편물 하나도 웃돈 없이는 받지 못하는 나라가 될지도 모른다. 군사정권의 그 각종 리베이트를 어떻게 뚫고 여기까지 온 우린데.  

읽는 내내 가슴이 답답해지다 못해, 깔깔깔깔 웃었다. 이건 뭐, 거짓말이 아니라는 건 아는데, 하도 말이 안되니까, 도무지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참, 우습기만 해서, 읽는 내내 깔깔 웃었다.  

도대체 내가 할 수 있는 건 뭘까. 

우스운 건, 이 나라, 인도네시아에서도 삼성 제품군은 그게 무엇이 되었건 모두 최고급으로 취급된다는 거. 특히 TV를 비롯한 가전 부문과 핸드폰은 삼성이 석권해 버렸다. 그 뒤를 바짝 추격하는 게 LG고. 에혀. 에혀. 에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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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마 2010-07-31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s. 이 책은 충무공과 내가 둘 다 읽은 몇 안되는 책 중의 한권이다. 중무공의 반응은 대략 나와 비슷했다. 야~ 코메디다!!!

마녀고양이 2010-07-31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보다 더 믿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지요... ㅠㅠ
예전에 소설은 소설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현실로 일어날 법한 일이다 라고 생각을 바꿨답니다..... 참 슬픈 일입니다. 그져.

아시마 2010-08-07 14:06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예요. 근데 이건 너무 유치해서, 상상을 할수도 없는 일들이었다는 게 그저 기가막힐 뿐이죠. 그럴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인간이란 존재가 너무 고차원적인 존재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는.

삼성 전자 들어갔다고 모가지(여기서는 꼭 목이 아닌 모가지, 라고 해 줘야 함.)에 힘주고 돌아다니던 친구놈이 생각났어요. 에혀.

blanca 2010-07-31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저도 이 책이 제 남편이랑 같이 읽은 거의 유일한 책이었어요. 이건희가 거울을 그렇게나 좋아한다는 대목. 자기들은 냉장 푸아그라 먹고 손님들은 냉동 준다는 대목 등. 진짜 소설도 이런 웃긴 소설이 없더라구요. 그게 현실이니 그리고 그런 기업이 우리 경제의 생명줄을 쥐락펴락하고 있다고 다들 맹신하고 있으니 너무 슬프죠. 사실 저도 은연중 삼성은 대단하다,는 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했으니까요. 아시마님, 그래서 저는 삼성 제품 불매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혼자서요 ㅋㅋㅋ 되도록이면 사지 않으려고 해요. 비겁한 타협 정도겠지만요.

생필품. 안그래도 남미에 있는 친구가 공산품 구하는 것의 어려움에 대해서 토로하더라구요. 치약, 생리대 이런 것들 가격이 엄청나다면서요. 부패가 용인되는 사회는 성장도 결국 정체하게 된다는 걸 다들 좀 깨달았으면 좋겠어요.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아시마 2010-08-07 14:16   좋아요 0 | URL
생필품이요. 여기 식모들이 가장 많이 훔쳐(?)가는 품목중에 하나가, 뇨냐(마님 정도의 의미예요. 기혼 여성에 대한 존칭이라는데, 보통 일본이나 한국인 유부녀들에게 통칭으로 사용되는 단어.)들이 한국에서 공수해 온 생리대라죠. 현지인들이 쓰는 것과 비교가 안되는 품질이라고 그러더라구요.
더 웃긴건, 이 나라는 펄프 생산국가라는 거. -_-
기저귀도 비슷해요. 우리 작은 놈 아직 기저귀를 안떼서 여기서 사서 쓰는데 하기스가 하기스가 아니예요. 현지 생산 하기스는 오줌 한번 싸면 완전 뭉쳐서, 이건... 뭐. -_-;;; 한국선 하기스 쓰다가 여기와서는 군 쓰는데요, 제가 쓰는 군 기저귀는 일본 생산품을 수입해다 파는 거라... ㅎㅎㅎ 한국서 쓰는 가격과 거의 맞먹거나 더 비싸요. 근데 도무지, 현지생산품을 쓸수가 없어요.

그러니 악순환인거죠. 현지 생산 공장이 있기는 한데, 품질이 떨어지니 판매가 되지 않고, 이익이 떨어지니 품질 향상에 돈을 쓸 수도 없고... 뭐 그런 일들의 악순환.

저 대학 1학년때, 삼성이 대대적으로 이미지 재고 작업을 했던 기억이 나요. 막 대학가를 돌면서 설문을 하는 사람도 있었죠. 몇몇 대기업 이름이 나열되고, 이미지가 가장 좋은 기업은 어디입니까, 운운운. 그때 저도 온통 삼성을 나열했었더랬죠. 같이 했던 동기들도 대부분. 흠. 그러고 보니 그시기는 삼성 이미지 재창조의 거의 마지막 시점이기도 했던 모양이네요. 그 결과를 확인하고 싶어했던 걸 보면. 대국민 사기극이 따로 없죠. 에혀.

2010-08-26 0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프리카의 별
정미경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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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어느 글에선가 평론가 김윤식은 작가들을 두고 "들린 영혼"이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다. 여기서의 '들린'이란 '신들린'이라는 말을 할 때의 그 들린이다. 무언가에 들린 영혼이 작가가 된다고. 

책을 읽는 내내 그 말이 떠올랐다. 무언가에 들린 사람들이 자신을 들리게 만든 것을 따라 떠돌고 있는. 그건 마치 모래 같았다.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가벼운 바람에도 이리저리 휩쓸려 날아다니며 주변의 누구와도 융화하지 못했다. 모래는 천만의 모래가 함께 모여있어도 하나하나가 여전히 고독하다.  

고독. 

고독이라고 써 놓고보니 정미경의 소설을 이 단어보다 더 잘 요약할 수 있는 단어가 있을까 싶다. 그리고 고독한 사람들에게 사막보다 더 어울리는 곳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모래는 사람과 사람의 포옹을 막아선다. 내 살갗에 묻은 모래는 그 위로 누군가와의 접촉이 생겨날 때 도저히 못견딜 무언가가 된다. 사막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손조차 잡아주지 못한다. 나를 위해서, 너를 위해서.  

그 사막에, 증오와 복수에 들린 승, 아름다움에 들린 로랑, 사막에 들린 탕헤르 여자 등등이 모여든다. 그들은 모두 이방인이다. 무엇이 그들을 '아무것도 없는(사하라)'로 불러들였을까. 처음엔 각각의 이유로 사막에 왔던 그들은 결국 사막 그 자체에 들린다.  

   
  두고 온 곳으로의 구심력보다 원심력이 큰 사람들은 혀뿌리에 감기는 모래를 묵묵히 삼킬 수 있다. 극한의 황량함에 조응하는 폐허를 가슴에 감추고 있는 사람만이 그 지독한 사막 자체를 견뎌낼 수 있다. 눈을 뜨고 있되 아득히 먼 곳에 시선이 못 박혀버린 자들만이 눈알을 파고드는 모래를 견딜 수 있다. 어떤 불로도 태워지지 않는 응어리를 병든 췌장처럼 달고 와서는 그걸 태워야 살 수 있다고 그걸 태워버릴 수 있다면 지옥불이라도 견뎌보겠다는 이들만이 진짜 사막까지 들어간다.
(p. 104)
 
   

 

폐허와 응어리를 가진 사람. 세상의 끝에 혼자 서 보았던 사람, 그 사람들이 흔히 정미경의 주인공이 된다. 그러한 인물은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에서의 중호를 시작으로 이상문학상 수상작이었던 단편 <밤이여 나뉘어라>의 P와 단편 <무화과 나무 아래>의 주인공 남자 킴을 거쳐 이 소설의 인물들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철저하게 정미경류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또한 단점이 될 수도 있겠다. 지나치게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으므로. 그런 단점을 넘어서는 것이 정미경의 문장이다.  

정미경의 문장은 잘 벼른 칼날위에 어룽어룽 피어나는 쇠무지개 같은 느낌이다. 지독하게 아름답고, 철저하게 단련되어 군더더기라고는 털끝만큼도 보이지 않는, 그 자체로 완결된 문장이다. 정미경 또한 문장에 들렸다 싶다. 한권 한권의 소설이 발표될 때마다 문장은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매번 최고다!라고 외쳤는데 다음 소설은 더 나아진다는 게 정말 최고다. 인물이 반복되고 주제가 반복되어도 정미경의 소설이 늘 새로운 것은 그 형식과 문장이 날이 갈수록 나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발단 전개 위기를 거쳐 절정에서 끝이 나 버린다. 뻥, 하고 터지는 빅뱅을 마지막으로. 소설의 중심 사건은 해결은 커녕 종결조차 되지 않고, 인물들의 미래는 모래 폭풍 속에 들어간 듯 위험천만한 오리무중 상태로. 나는 이렇게 불친절한 소설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소설은 절정이 그대로 결말인 것에 동의한다. 고독에는 언제나 허무라는 감정이 따라오게 마련이므로. 

정미경은 언제나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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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절로 2010-07-30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미경은 언제나 최고다.

저는 아시마님이 좋아라하는 작가들을 따라가보고 있어요. 물론 그 시작은 접신 박완서였구요. 지금은'조선희'작가를 젤 앞줄에, 다음은 정 떨어지게 완벽한 문장을 구사한다는 '정미경'이 되겠군요.
아~나는 언제 이렇게 나이들어 버렸지. 이 즐거운 사람들을 언제다 맛 보나.

아시마 2010-07-31 16:08   좋아요 0 | URL
정미경하고 조선희는 비슷한 문장을 구사해요. 정미경이 약간 더 감각적이라는 점이 차이겠지만. 조선희는 그야말로 언론계에서 훈련받은 언어구나, 하는 게 느껴져요. 읽어보면 어떤 느낌인지 실감이 나실듯.

제가 에파타님에게 어떤 작가를 데려다 줄 수 있었다면, 그 또한 영광이어요. ^^

stillyours 2010-08-09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오자마자 찾아 읽었는데, 여직 아무 것도 기록하지 못하고 있어요.
아시마 님 리뷰를 보며 답답함을 해소합니다.
추천도 꾹- 누르고 가요. 감사한 마음을 담아.

아시마 2010-08-11 12:07   좋아요 0 | URL
달님의 리뷰도 보고 싶어요. 여러방향으로 해석의 여지가 많은 소설이라고 생각되요. 그런 소설이 좋은 소설이겠지요.

정미경 작품이 그런 것 같아요. 참 많은 말들이 생각나는데 정말, 리뷰어조차 압도해버리는 문장이라는. 이런 문장을 읽고나면 내 문장이 너무 허접쓰레기 같아 쓸수가 없어요.
 
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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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저의 <황금가지>에서 꾸준히 변주되어 등장하는 이미지는 바로 살해당하는 신(또는 왕)이다. 모든 신은 궁극적으로 살해당함으로써 그 신성과 강함을 유지해나간다.  

   
  인간신은 그 능력이 쇠약해지는 징후가 보이는 즉시 살해되어야 하며, 그의 영혼은 사체의 부패로 심각한 손상을 입기 전에 원기 왕성한 후계자에게 이전되어야 한다.
(.......중략.........)
인간신을 살해함으로써 숭배자들은 인간신의 영혼이 빠져나갈 때 확실하게 붙잡아서 적당한 후계자에게 옮겨줄 수 있고, 인간신의 자연적인 힘이 줄어들기 전에 그를 죽임으로써 인간신의 쇠퇴와 더불어 세상이 쇠퇴하는 것을 확실히 막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처럼 인간신을 살해하면 그의 영혼이 아직 절정기에 있을 때 원기왕성한 후계자에게 이전할 수 있으므로 모든 목적이 충족되고 모든 위험이 비껴가는 것이다. 
프레이저, 《황금가지》, 한겨레신문사, 2003, 2권 2장 신성한 왕의 살해, p. 296-297 
 
   

은교를 읽는 내내 생각했던 것은 바로 그 부분이다. 시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갈망이 없는 사람이 시를 쓸 수 있는가, 사랑은 평범한 사람조차 시인으로 바꾸어놓는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데, 그렇다면 늙어 사랑의 힘을 잃어버린(것으로 짐작되는) 사람이 과연 시를 쓸 수 있을 것인가.  시의 왕이었던 이적요, 늙어버린 그는 여전히 시의 왕일 수 있는가. 그를 죽여 젊고 강대한 새로운 왕을 세워야 하는 것인가. 

이 책은 결국, 노인의 갈망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로 집약된다. 노인의 갈망을 인정할 것인가, 추한 것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  

70을 한해 앞둔 이적요는 젊은 서지우가 은교를 차지했다는 사실보다, 서지우가 자신의 갈망을 사랑을 사랑과 갈망 그 자체로 보지 않고, 치매 수준의 노추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에 더욱 분노한다. 그에게는 아직 갈망을 느끼고 사랑을 느낄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외부로부터 철저하게 부정당하고, 그것이 그를 살인으로 이끄는 것이다.  

   
 

"눈만 감으면 송장인데, 무슨 짓요? 미쳤어요? 자기 얼굴을 좀 보라구, 씨팔.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거울도 안봐?"
p. 207 

 
   

은교를 향한 그의 순정은 이렇게 철저하게 유린당한다. 늙었다는 이유만으로 갈망 그 자체가 죄가 된다는 사실을 그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 결국 그가 분노한 것은 서지우에 대해서였을까 그의 늙음 그 자체에 대해서였을까. 

   
  은교를 만나면서 나는 보다 젊어지고 싶었다. 그게 죄인가. 그 애를 통해 아직도 생피처럼 더운 나의 욕망을 확인했을 뿐, 나는 아무런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다. 나의 은닉된 욕망에게 형벌을 선고할 수 있는 자는 그러므로 나뿐이다. 나는 육십대 마지막을 보내고 있다. 다른 누가 나의 뺨을 후려칠 권리는 없다. 서지우는 더욱 그렇다.
p. 281 
 
   

이 소설의 중심 등장인물은 셋이다. 이적요와 서지우와 한은교. 제목도 은교다. 그렇다 은교가 없다. 이 소설의 은교는 은교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은교여도 은주여도 혜교여도 상관이 없었다는 말이다. 은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저 사건과 감정의 객체일 뿐. 서지우 역시 일종의 피드백으로서만 존재한다. 이 소설은 온전히 이적요 혼자의 내면을 위해서 흘러가고, 그의 사랑을 온당화 시키는데 온 힘을 다한다. 누가 그랬던가,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그 자체가 자신이 정당하지 않음을 알고 있는 것이라고. 은교를 물상화 시켜버리는, 은교의 감정에 대해서는 깡그리 무시해 버리고, 자신이 보고 싶은대로만 보려하는 이적요의 시선에서 나는 그의 한계를 본다.  

   
  그러나, 나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이 나를 살리는 길이었다. 그애가 싫다면서 한사코 밀어내는데도 불구하고, 그애의 사타구니를 벌리고, 뱀과 같이 혀를 낼름거리면서, 그 안에 머리를 밀어넣는 서지우까지도 보아야 했을 때, 내가 어떻게 "그애가 싫다면서 한사코 밀어내는 데도 불구하고"라고 쓰지 않고 그 장면을 견뎌낼 수 있었겠는가. 그애가 '비명을 내지르며' 진저리를 쳤다. 그애는 '당연히' 끔찍하게 고통받고 있었다. 그때의 나는 '비명을 내지르며' 그애가 '끔찍하게 고통받고'있다고 분명히 보고 느꼈다.
p. 360 
 
   

그러므로 그의 갈망은 정당화 되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강간범이 그 여자도 좋아하는 줄 알았어요, 이건 화간이예요, 라고 주장하는 것과 진배없지 않은가? 상대에 대한 배려가 없을 때, 사랑은 폭력이 된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실패다. 노인의 갈망을 갈망으로서 설명하는데 실패했다. 결국은 다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로 돌아서고 마는 것이다. 노인 그 스스로에 의해. 그러므로 노인은 살해당해 마땅한 것이다, 로까지.  

박범신은 풍만한 언어를 가졌다. 박완서와 같은 풍요로운 언어가 아니다. 내게있어 박범신은 공지영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둘 다 풍만한 언어를 가졌고, 둘다 언어에 독특하고 빼어난 감각을 가지고 있으며, 둘다 일정수준의 성취를 이루었다. 박범신과 공지영의 문학은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의 경계에 언제나 아슬하게 발을 걸치고 있다는 느낌이다. 난 박범신의 소설과 공지영의 소설을 다 좋아하는데도 항상 읽고나면 뭔가 이건 아니야, 싶을 때가 있는데, 바로 이런 순간이다. 자신이 만들어 낸 인물을 인물로서 살아있게 하지 못하고, 속이 텅 빈 객체로 만들어 버린다.  

소설 전체에 등장하고, 심지어 제목까지 획득한 은교가 도무지 내면을 가진 한 인물로 느껴지지가 않는다. 물론 그것을 노리고서 굳이 17세 아이를 등장시킨거라면 할 말은 없지만.  

도대체, 은교 열풍은 왜 불었을까. 알쏭달쏭.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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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체오페르 2010-07-28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기는 들어본적 있고 아직 못본 책인데, 아시마님의 리뷰를 보니 주인공도 소설도 뭔가 묘~한 기분이 드네요.^^;
그런데 은교가 17세였단 말입니까; 나이차 많다는 건 알았는데 70세와 17세,여주가 너무 어린거 아닌가...

아시마 2010-07-28 18:09   좋아요 0 | URL
글쎄요. 남자들이 보면 어떤 생각이 들지 모르겠어요. 대부분의 젊은 여성들은 성의 대상으로 생각할 수 조차 없는 어떤 상대의 눈 속 번득임을 굉장히 불쾌하게 여기거든요. 제가 만약에 은교라면요, 69세 할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다면, 성별이 거세된 그저 한 사람으로 봤을 것 같거든요. 당연히 상대도 나를 성별이 거세된 한 사람으로 볼 거라고 믿었을 거구요. 이건 늙음이라는 걸 노추로 인식한다는 것과는 달라요. 그냥 성에 있어서 편안해 지는 거죠.

그래서, 굉장히, 불쾌했어요. 정말로요. 사실 따지고보면 대놓고 원조교제를 하는 건 30대 후반의 서지우인데도, 오히려 성관계를 하는 서지우가 더 낫다 그럴 정도로요.

루체오페르 2010-07-28 19:59   좋아요 0 | URL
헛...서지우도 30대 후반, 그는 은교와 성관계까지 했군요.
사랑하는 사이인가 했더니 대놓고 원조교제라니 그것도 아닌것 같고...
음...은교라는 여주가 가장 궁금한 (문제)캐릭터네요. 대체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길래 이런 모습일까.

아시마 2010-07-28 19:32   좋아요 0 | URL
이 소설의 문제점을 바로 짚으셨어요. 문제는 은교예요. 아무런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 않아요. -_-;;;

다락방 2010-07-28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은교 열풍이 왜 불었는지 모르겠어요. 문장은 아름답고 책장도 빨리 넘어가지만 뭔가 찜찜함을 떨쳐낼 수가 없더라구요. 그것이 어쩌면 17세 은교에게, 아시마님이 지적하셨든 '도무지 내면을 가진 한 인물로 느껴지지 않아'서일지도 모르겠어요. 읽고나서 그렇게 기분 좋은 소설은 아니었어요.

아시마 2010-07-28 18:01   좋아요 0 | URL
아직은 젊은 여자 사람으로서, 수긍할 수 없는 소설이예요. 말하자면 늙은 남자 사람의 로망을 완성시키고 있는 소설이랄까요. 은교는 늙은 남자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손녀 같고 어린 여자친구 같았으며 아주 가끔은 누나나 엄마 같은' 그런 여자로 묘사 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이적요가 혼자 그렇게 생각을 하는 건데, 상대가 되는 여자 사람의 감정은 깡그리 무시가 되는거죠. 관계라는게 상호간에 맺히는 건데요. 흠, 뭐랄까, 막판에 은교가 할아버지는 불쌍하고 서지우보다 더 젊고 운운 하는 것조차, 이적요의 바람일 뿐이라는 이야기죠.

황석영 <심청>에서 나오는, 매매춘여성에 대한 환상 같은 것도 여전히 등장해서 사람혀를 차게 만들죠. 매매춘여성에 대한 환상 말예요, 그러니까, "불쌍해, 남자들" 이라며 젖을 물려주는 그런 여자에 대한 환상, 실제로 그러는 여자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매매춘을 하는 남자들이 그렇게 믿고 싶은 것 같아요. 사랑으로 몸을 주는 건 아닐테니 남자에 대한 범 인류적 동정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성을 주는 여성상을 만드는 거죠. 그렇게 믿어야 매매춘을하는 자신이 좀 덜 비참해질 것 같아 그러나. 그런 것들이 되게 불편해요, 저는.

blanca 2010-07-28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시마님...저도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은교라는 인물이 지나치게 실제적이지 못하다는 느낌. 어떤 갈망의 대상으로 인위적으로 설정된 느낌. 그래서 아쉬움이 남더라구요...

그러니까 계속 소설을 읽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그 느낌이 어디서 왓는데 아시마님의 리뷰를 읽으며 깨닫고 갑니다.

그런데 아시마님! 오늘 지금 확인해 보니 박완서샘의 신간이 나왔어요, 소설은 아니지만 너무 기쁘네요!!

아시마 2010-07-29 22:28   좋아요 0 | URL
오늘 정미경 아프리카의 별 읽으면서 느꼈어요. 남성 작가와 여성작가의 차이인지도 모르겠지만, 정미경은 2차 성징이 막 시작된 사춘기 여자애를 정말 살아있는 인물로 잘 그려내고 있거든요. 보라를 보면서 은교가 얼마나 텅비어있는 허상인가를 뼈저리게 느꼈다는.

박완서 샘 신간! 저도 봤어요. 너무너무너무너무 좋아요. 박완서 샘은 산문도 소설만큼이나 좋아요. 블랑카님 나중에요, 나중에 나중에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문학동네에서 나온 박완서 샘의 단편전집을 순서대로 차근차근 한번 읽어보세요. 그리고 산문집들도 순서대로 차근차근 읽어보시구요. 그러면, 박완서도 자라고 있구나 라고 느껴지실 거예요. 사람이 제대로 나이 먹는다는 게 이런거구나 싶기도 하고, 생각이 폭과 깊이가 달라지는 게 확확 보여요. 물론 소설적 성취도도 점점 높아지구요. 박완서 샘도 처음부터 달인 박완서는 아니었더라구요... ^^ 물론 아무리 그래도 기본은 하지만요.

이제... 장편을 기대하긴 힘들겠죠? 예전에 김연수 <밤은 노래한다> 추천사에서 그런 말씀 하셨더라구요. 쓰고 싶었는데 힘이 딸리는 것 같아 포기했던 소재인데 써 줘서 고맙다고요.

짧은 꽁트도 참 좋은데 말이죠, 동화도 좋고. 아. 정말... 요절했건 천수를 누렸건 간에, 예술가들의 그 많은 재주는 다 어디로 가는 걸까요?

2010-07-29 15: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29 2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30 1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30 17: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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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작가와의 만남을 주선해주는 작품이 있다. 대부분은 그 작가의 데뷔작이나 문학상 수상작이 한 독자에게 새로운 작가를 만나게 해 주는 작품이 된다.  

나와 한강을 만나게 해 준 건 <그대의 차가운 손>이라는 장편이었고, 김영하와 나는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과격한 작품으로 처음 만났다. 김연수와 나는 <여행할 권리>가 첫 만남이었으며 신경숙과 나는 <기차는 7시에 떠나네> 였다. 그 작품 이전에도 신경숙의 작품은 몇개 읽고 있었지만, 기차는 7시에 떠나네를 기점으로 나는 신경숙을 콜렉션하기 시작했다. 

<기차는 7시에 떠나네>를 읽을 때, 나는 종로구 평창동에 살고 있었고, 그 작품을 쓸 무렵 작가 신경숙은 종로구 구기동에 살고 있었다. 이 소설을 읽은 직후 나는 미란이 스케이트 보드를 타고 달렸던 세검정 삼거리를 출발하여, 자하문을 지나 광화문을 지나 세종문화회관을 마주 보게 되는 그 길까지 걸어가 세종문화회관 벽면의 비천상을 사진으로 찍어온 일이 있었다. 그리고, 작가 신경숙이 아마, 나와 같은 경로로 그 길을 여러번 걸었으리라 짐작했다. (신경숙은 구기동에서 10여년을 살다 평창동으로 이사했다.) 

   
 

"밤에 잠이 안 올 때면 소설책을 읽곤 하지. 그러다가 파트릭 모디아노며 무라카미 하루키 등을 알게 되었는데 그들의 소설을 읽으면 말이지, 파리나 도쿄가 가고 싶어져. 그들은 진짜로 파리나 도쿄를 사랑하는 것 같아.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 걸어다니는 거리를 나도 걷고 싶어질 만큼 그렇게 애틋하게 쓰거든."
"우리나라 작가들은 어떤데요?"
"글쎄...... 우리나라 작가들은 서울을 그닥 좋아하는 것 같지 않더군...... 떠나야 할 곳, 사람이 정붙이고 살기에는 좀 살벌한 공간으로 묘사되는 것 같아."
"그럼 할 수 없네. 작가가 되어서 직접 써봐요.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 서울을 사랑하게 되도록." 

신경숙, 《기차는 7시에 떠나네》, 문학과 지성사, 1999, p. 65 

 
   

작가 신경숙은 아마도 본인이 직접 쓰기로 결정을 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그러한 결심은 아마도 그녀가 서울예전을 다닐때에 이미 했던 결심같다.  

   
  일 년 만에 이 도시로 다시 돌아오면서 나는 이 도시를 알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기 위해서 이 도시 구석구석을 내 발로 걸어다녀야겠다고.

신경숙,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문학동네, 2010, p.48 
 
   

신경숙의 그러한 시도는 기차는 7시에 떠나네에서 시작되어 바이올렛(문학동네, 2001)에서 절정을 이루다가 사실 2008년 《엄마를 부탁해》에서도 부암동과 쌍문동을 묘사해 내며 적절한 균형감각을 찾으며 안정기에 접어든다. 물론 엄마를 부탁해에서도 서울의 묘사는 다음 로드뷰 못지않게 정확했지만 《바이올렛》에서의 서울 도시 묘사가 실험소설이라해도 좋을만큼 하이퍼리얼리즘으로 바짝 다가가 있었다면(그래서 묘사와 서사가 따로 노는 경향이 약간은 있었다) 엄마를 부탁해에서부터는 좀더 소설적인 애틋함, 신경숙이 바랐던 그것을 성취했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분명한 사실은, 나는 신경숙을 통해 내가 늘 알던 그 길을 새로이 발견하게 되었고, 원래도 사랑하던 곳이었지만 더 많이 더 애틋하게 사랑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서울이라는 도시가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느낌이었다. 자, 어때 말해봐, 광화문과, 세종 문화회관과 시청과 프라자 호텔 앞에서의 너의 스무살은 어땠니. 라고.  

하루키의 소설에 등장하는 요리를 만들어 먹는 모임이 있고, 그 요리 레시피 북까지 나왔다는데, 신경숙의 소설에 등장하는 서울거리 걸어보기, 그런 모임을 해도 좋을 것 같다. 새로운 소설독법이 되지 않을까. 김훈과 남한산성 가보기 이런 것도 물론 의미가 있겠지만, 이제는 잊혀지는 그곳들을 윤이와 미루와 명서의 궤적을 따라 때로는 낙수장의 안내를 받아.  

박완서의 《도시의 흉년》이나 《엄마의 말뚝》에서 "처녑같이 구불구불하고 구질구질한 달동네"를 묘사해 내는 것은 그것 나름대로 가치가 있고 그 일반화 될 수 있는 묘사력에서 박완서가 일종의 일가를 이루었다면 신경숙은 박완서와는 다른 의미로, 개별화 된 묘사력에서 일정 수준의 성취를 이루었다. 나는 그 점을 높이 산다.  

파트릭 모디아노가 묘사하는 파리의 뒷골목과 하루키가 묘사하는 도쿄의 거리, 그리고 신경숙이 묘사하는 서울, 강북의 구 도심 오래된 거리들. 신경숙이 있어서, 서울에겐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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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0-07-25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시마님!! 평창동...부암동....아, 이런 동네 너무 좋아요. 저는 강북에 이사와서 침만 흘리고 있어요. 언젠가는...이라면서.

참, 책이 왔군요!!! 안그래도 여기 많이 등장하는 지명들, 걷기.. 저도 꼭 한 번 이런 길을 이렇게 걸어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길치라 길에 대한 기억이 명확하지 않아서 길에 대한 얘기를 읽으면 참 부러워요.

파트릭 모디아노 어때요? 궁금한 작가인데 아직 못 접해봐서요.

먼 곳에서 리뷰 읽으며 아시마님 근황을 아니 참 좋아요....

아시마 2010-07-26 00:59   좋아요 0 | URL
평창동 부암동 구기동 성북동 북악스카이웨이 꼭 가보셔야 해요! 얼마나 좋은데요. 강북 어디로 이사오셨어요?(아, 오셨어요, 라니. ㅠ.ㅠ)
특히 봄날 벚꽃필때, 여기는 산중이라 윤중로보다 며칠 늦게 피거든요, 그때 화창한 오후시간에 북악스카이웨이 드라이브하면, 이길 따라 무릉도원이 저만치 있겠구나 싶을때가 있죠. 봄이내 아롱아롱 피어오른 꼬불탕한 길 따라 오르면.

에혀. 나 결혼 왜 했을까나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파트릭 모디아노, 저는 흠. 아주 좋지는 않았어요. 어쩌면 블랑카님하고는 잘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요.

지금 정미경을 읽을까 박범신을 읽을까 겨누는 중이예요. ㅎㅎㅎ

2010-07-25 21: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25 2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26 1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저절로 2010-07-26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문 김연수씨와 신경숙씨는 제게는 뭐랄까, '우물'같아서(제가 곧잘 빠져 헤어나오질 못해요) 접근경보를 내려놓았지요.

그런데, 어,나,벨이 자꾸 춘향이 그네타듯 왔다리갔다리하네요.
아시마님까지 이러하니..빠지더라도 함 봐봐요?

마녀고양이 2010-07-26 15:50   좋아요 0 | URL
헉, 에파타 님이 첨이예요.
나랑 똑같은 접근 경계 경보를 내린 분은..... 아아, 절대공감.

난 이상하게 신경숙 님 힘들어요. 문체도 힘들구,,
김연수 님은 더 힘들어요. 질식할거 같아서.

아시마 2010-07-27 00:20   좋아요 0 | URL
흠... 엄마를 부탁해 만은 못해요. 그래도 신경숙이니 평균은 했는데요. 거의 다시쓰다시피 했다고 하는데도 연재소설 특유의 단점이 여전히 남아있어요. 이야기가 좀 산만하게 흐르는 거죠. 주인공 윤의 시점으로 전체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중간에 명서의 일기장 같은 노트를 끼워넣는 방식으로 다른 관점, 또는 윤이 알지 못했던 일들에 관한 설명을 시도하는데... 이게 약간. 좀. 막 산만하다 따로논다 이건 아닌데요, 한번쯤 더 개작을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기대가 남죠.

이런 형태가 매력적이기는 한데요, 아주 잘 쓰지 않으면 뭔가 좀. 싶어져요.

마녀고양이 2010-07-27 11:42   좋아요 0 | URL
잘 쓰는 것에 대한 문제보다는,,,
찐득함이랄까.... 읽고 나면 떨쳐지지 않는 어떤 것.
안 그래도 맘이 심란한데, 더 심란한 그런 것.
저는 신경숙 님이 그래여.

김연수님은........ ㅠㅠ 진짜 안개 속을 헤매는 느낌이예요.
 
유령의 일기 - 황경신 장편소설
황경신 지음 / 북하우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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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신을 아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가 않더군요. 그럼 이렇게 물어보아야 겠습니다. 페이퍼(paper)라는 잡지를 아십니까? 그 잡지의 편집장이 황경신입니다. 황경신은 이미 10권이 넘는 책을 출간한 중견급 작가이고,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대신 매니아층이 약간 있지요.  

굉장히 화려하고 수식적인 문장을 쓰는 작가입니다. 은유와 직유에 능하고, 참신한 표현을 해 낼줄도 알구요, 사랑이 갓 시작될 때의 그 간질간질한 감정을 표현해 내는 데 아주 능숙한 작가이기도 하지요. 연애소설에 정말 정석 그대로 어울리는 작가입니다. 그녀의 소설 <모두에게 해피엔딩>은 정말 제대로 된 연애소설로는 몇손가락 안에 꼽아도 괜찮을 겁니다. 소설 그 자체로는 모르겠지만, 연애할 때의 그 간질간질하고 동글동글한 심리와 예리하고 팽팽한 감정선을 잘 잡아내는 재주가 있지요.

일본에 요시모토 바나나가 있다면 한국에는 황경신이 있지요.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뜬구름잡는 이야기 그대로 천연덕 스럽게 잘 하는 게 특징입니다.  

이 책, 유령의 일기는 그 연장선에서 생각하면 됩니다. 이 책에도, 바나나가 자주 써먹는 유령이 나옵니다. 이 책의 "유령"은 보통 뇌사 상태의 사람들의 영혼입니다. 아직 죽음으로 넘어가지는 않았고, 그렇지만 육체에 깃들이지는 못한 혼을 유령이라고 지칭하는 군요. 큰 틀은 주인공 유령 소이의 사고와 그 이후의 이야기들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자잘자잘한 옴니버스 형식으로 개별 유령들의 사연을 하나하나 짚어줍니다. 이야기를 서사의 틀로 이끌어가지 못하고 에피소드의 나열로 겨우겨우 이어나갑니다. 우연의 남발이라는, 바나나와 황경신 공통의 문제점도 역시나 가지고 있구요. 서사가 강한 소설을 쓰는데는 여엉, 재주가 없어요. 하지만 장면 장면을 묘사하는 데는 탁월한 능력을 지녔죠.

저는 뭐, 나름 황경신의 매니아층에 들어간다고 해도 좋을만한 터라 황경신의 다른 책을 샀듯 이 책을 사서 읽었습니다만, 사실 이 책에서는 황경신 특유의 매력이 좀 떨어지는 편입니다. 이 사람은 정말 복문의 복문의 복문을 만드는 화려하기 그지없는 수사적 문장이 가장 큰 매력인데요, 이 책에서는 그런 면이 좀 떨어집니다. 문장이 전체적으로 많이 평범해 졌어요. 98년 <나는 하나의 레몬에서 시작되었다>라는 책에서 보이는 그 놀랍도록 화려하고도 참신하면서 독창적이던 동화적 상상력이 많이 죽었어요. 

이쯤되면, 문학도 나이를 먹는가, 라고 한탄하던 1920년대 염상섭의 신문칼럼이 떠오르죠. 65년생이니 올해 벌써 마흔다섯인가요? 동화적이고 몽환적인 상상력의 글을 쓸 힘이 떨어진 건가 느껴지는 순간이예요. 작년 재작년, 황경신은 숨가프게 몇권의 책을 출간했는데요, 힘이 좀 딸린다 싶네요. 역시나.  

뭐, 여전히 황경신을 좋아하고, 새로운 책이 나오면 또 살테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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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07-26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헙,,, 순전히 아시마 님의 리뷰에 홀랑 넘어가 황경신님 책에 도전 결심합니다. 진짜 읽고 싶어져버렸어요.. 아시마님, 책임지세여! 흐흐~

아시마 2010-07-27 17:23   좋아요 0 | URL
오, 혹시 몽환적이고 동화적인 분위기 좋아하시는 거예요? 한때 바나나(와 가오리)에 홀릭하셨다니 아마 황경신도 좋아하실수 있겠지만, 이 책은 별로예요, 진짜로. 이 책으로 황경신을 시작하신다면 실망 많이 하실텐데요.

몽환적, 동화적이라는 특성상 어릴때 썼던 글들이 훨씬 간질간질한데, <나는 하나의 레몬에서 시작되었다>랑 <모두에게 해피엔딩>은 절판이네요.

<초콜렛 우체국>이나 최근에 쓴 프로방스 여행기는 괜찮았어요. 최근 소설 중에 고르라면 <17세>요. 이게 이 책보단 훨 나아요. 17세가 훨 나은데 리뷰는 왜 이 책을 썼냐면, 음, 17세를 읽을때는 미친듯이 몰아서 읽을 때라(뭐 지금이라고 안그러냐... 마는) 리뷰 쓰는 게 귀찮았거든요.

황경신 읽어보고 괜찮으면 그 다음으로 연결되어 넘어가야 할 작가가 이충걸 이예요. 이 친구도 "PAPER 類" 라고 할 수 있는 글을 쓰거든요. 실제로 페이퍼 출신 작가이기도 하구요. 이충걸 작품으로 괜찮은건 <슬픔의 냄새>예요. 어느해였던가 무려 동인상 후보까지 올랐던.

근데 진짜 주의하셔야 해요. 좋아하면 환장하고 빠져들수 있는 게 이쪽 무리(-_-;;;)들인데 안맞으면 정말... 누군가의 표현에 의하면 느끼하고 유치해서 토할 것 같다더군요. 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