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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에서 꾸준히 변주되어 등장하는 이미지는 바로 살해당하는 신(또는 왕)이다. 모든 신은 궁극적으로 살해당함으로써 그 신성과 강함을 유지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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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신은 그 능력이 쇠약해지는 징후가 보이는 즉시 살해되어야 하며, 그의 영혼은 사체의 부패로 심각한 손상을 입기 전에 원기 왕성한 후계자에게 이전되어야 한다.
(.......중략.........)
인간신을 살해함으로써 숭배자들은 인간신의 영혼이 빠져나갈 때 확실하게 붙잡아서 적당한 후계자에게 옮겨줄 수 있고, 인간신의 자연적인 힘이 줄어들기 전에 그를 죽임으로써 인간신의 쇠퇴와 더불어 세상이 쇠퇴하는 것을 확실히 막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처럼 인간신을 살해하면 그의 영혼이 아직 절정기에 있을 때 원기왕성한 후계자에게 이전할 수 있으므로 모든 목적이 충족되고 모든 위험이 비껴가는 것이다.
프레이저, 《황금가지》, 한겨레신문사, 2003, 2권 2장 신성한 왕의 살해, p. 296-2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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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를 읽는 내내 생각했던 것은 바로 그 부분이다. 시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갈망이 없는 사람이 시를 쓸 수 있는가, 사랑은 평범한 사람조차 시인으로 바꾸어놓는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데, 그렇다면 늙어 사랑의 힘을 잃어버린(것으로 짐작되는) 사람이 과연 시를 쓸 수 있을 것인가. 시의 왕이었던 이적요, 늙어버린 그는 여전히 시의 왕일 수 있는가. 그를 죽여 젊고 강대한 새로운 왕을 세워야 하는 것인가.
이 책은 결국, 노인의 갈망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로 집약된다. 노인의 갈망을 인정할 것인가, 추한 것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
70을 한해 앞둔 이적요는 젊은 서지우가 은교를 차지했다는 사실보다, 서지우가 자신의 갈망을 사랑을 사랑과 갈망 그 자체로 보지 않고, 치매 수준의 노추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에 더욱 분노한다. 그에게는 아직 갈망을 느끼고 사랑을 느낄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외부로부터 철저하게 부정당하고, 그것이 그를 살인으로 이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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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만 감으면 송장인데, 무슨 짓요? 미쳤어요? 자기 얼굴을 좀 보라구, 씨팔.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거울도 안봐?"
p. 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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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를 향한 그의 순정은 이렇게 철저하게 유린당한다. 늙었다는 이유만으로 갈망 그 자체가 죄가 된다는 사실을 그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 결국 그가 분노한 것은 서지우에 대해서였을까 그의 늙음 그 자체에 대해서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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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를 만나면서 나는 보다 젊어지고 싶었다. 그게 죄인가. 그 애를 통해 아직도 생피처럼 더운 나의 욕망을 확인했을 뿐, 나는 아무런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다. 나의 은닉된 욕망에게 형벌을 선고할 수 있는 자는 그러므로 나뿐이다. 나는 육십대 마지막을 보내고 있다. 다른 누가 나의 뺨을 후려칠 권리는 없다. 서지우는 더욱 그렇다.
p. 2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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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중심 등장인물은 셋이다. 이적요와 서지우와 한은교. 제목도 은교다. 그렇다 은교가 없다. 이 소설의 은교는 은교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은교여도 은주여도 혜교여도 상관이 없었다는 말이다. 은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저 사건과 감정의 객체일 뿐. 서지우 역시 일종의 피드백으로서만 존재한다. 이 소설은 온전히 이적요 혼자의 내면을 위해서 흘러가고, 그의 사랑을 온당화 시키는데 온 힘을 다한다. 누가 그랬던가,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그 자체가 자신이 정당하지 않음을 알고 있는 것이라고. 은교를 물상화 시켜버리는, 은교의 감정에 대해서는 깡그리 무시해 버리고, 자신이 보고 싶은대로만 보려하는 이적요의 시선에서 나는 그의 한계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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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이 나를 살리는 길이었다. 그애가 싫다면서 한사코 밀어내는데도 불구하고, 그애의 사타구니를 벌리고, 뱀과 같이 혀를 낼름거리면서, 그 안에 머리를 밀어넣는 서지우까지도 보아야 했을 때, 내가 어떻게 "그애가 싫다면서 한사코 밀어내는 데도 불구하고"라고 쓰지 않고 그 장면을 견뎌낼 수 있었겠는가. 그애가 '비명을 내지르며' 진저리를 쳤다. 그애는 '당연히' 끔찍하게 고통받고 있었다. 그때의 나는 '비명을 내지르며' 그애가 '끔찍하게 고통받고'있다고 분명히 보고 느꼈다.
p. 3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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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그의 갈망은 정당화 되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강간범이 그 여자도 좋아하는 줄 알았어요, 이건 화간이예요, 라고 주장하는 것과 진배없지 않은가? 상대에 대한 배려가 없을 때, 사랑은 폭력이 된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실패다. 노인의 갈망을 갈망으로서 설명하는데 실패했다. 결국은 다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로 돌아서고 마는 것이다. 노인 그 스스로에 의해. 그러므로 노인은 살해당해 마땅한 것이다, 로까지.
박범신은 풍만한 언어를 가졌다. 박완서와 같은 풍요로운 언어가 아니다. 내게있어 박범신은 공지영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둘 다 풍만한 언어를 가졌고, 둘다 언어에 독특하고 빼어난 감각을 가지고 있으며, 둘다 일정수준의 성취를 이루었다. 박범신과 공지영의 문학은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의 경계에 언제나 아슬하게 발을 걸치고 있다는 느낌이다. 난 박범신의 소설과 공지영의 소설을 다 좋아하는데도 항상 읽고나면 뭔가 이건 아니야, 싶을 때가 있는데, 바로 이런 순간이다. 자신이 만들어 낸 인물을 인물로서 살아있게 하지 못하고, 속이 텅 빈 객체로 만들어 버린다.
소설 전체에 등장하고, 심지어 제목까지 획득한 은교가 도무지 내면을 가진 한 인물로 느껴지지가 않는다. 물론 그것을 노리고서 굳이 17세 아이를 등장시킨거라면 할 말은 없지만.
도대체, 은교 열풍은 왜 불었을까. 알쏭달쏭.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