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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별
정미경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6월
평점 :
언젠가 어느 글에선가 평론가 김윤식은 작가들을 두고 "들린 영혼"이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다. 여기서의 '들린'이란 '신들린'이라는 말을 할 때의 그 들린이다. 무언가에 들린 영혼이 작가가 된다고.
책을 읽는 내내 그 말이 떠올랐다. 무언가에 들린 사람들이 자신을 들리게 만든 것을 따라 떠돌고 있는. 그건 마치 모래 같았다.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가벼운 바람에도 이리저리 휩쓸려 날아다니며 주변의 누구와도 융화하지 못했다. 모래는 천만의 모래가 함께 모여있어도 하나하나가 여전히 고독하다.
고독.
고독이라고 써 놓고보니 정미경의 소설을 이 단어보다 더 잘 요약할 수 있는 단어가 있을까 싶다. 그리고 고독한 사람들에게 사막보다 더 어울리는 곳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모래는 사람과 사람의 포옹을 막아선다. 내 살갗에 묻은 모래는 그 위로 누군가와의 접촉이 생겨날 때 도저히 못견딜 무언가가 된다. 사막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손조차 잡아주지 못한다. 나를 위해서, 너를 위해서.
그 사막에, 증오와 복수에 들린 승, 아름다움에 들린 로랑, 사막에 들린 탕헤르 여자 등등이 모여든다. 그들은 모두 이방인이다. 무엇이 그들을 '아무것도 없는(사하라)'로 불러들였을까. 처음엔 각각의 이유로 사막에 왔던 그들은 결국 사막 그 자체에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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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 온 곳으로의 구심력보다 원심력이 큰 사람들은 혀뿌리에 감기는 모래를 묵묵히 삼킬 수 있다. 극한의 황량함에 조응하는 폐허를 가슴에 감추고 있는 사람만이 그 지독한 사막 자체를 견뎌낼 수 있다. 눈을 뜨고 있되 아득히 먼 곳에 시선이 못 박혀버린 자들만이 눈알을 파고드는 모래를 견딜 수 있다. 어떤 불로도 태워지지 않는 응어리를 병든 췌장처럼 달고 와서는 그걸 태워야 살 수 있다고 그걸 태워버릴 수 있다면 지옥불이라도 견뎌보겠다는 이들만이 진짜 사막까지 들어간다.
(p. 1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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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와 응어리를 가진 사람. 세상의 끝에 혼자 서 보았던 사람, 그 사람들이 흔히 정미경의 주인공이 된다. 그러한 인물은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에서의 중호를 시작으로 이상문학상 수상작이었던 단편 <밤이여 나뉘어라>의 P와 단편 <무화과 나무 아래>의 주인공 남자 킴을 거쳐 이 소설의 인물들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철저하게 정미경류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또한 단점이 될 수도 있겠다. 지나치게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으므로. 그런 단점을 넘어서는 것이 정미경의 문장이다.
정미경의 문장은 잘 벼른 칼날위에 어룽어룽 피어나는 쇠무지개 같은 느낌이다. 지독하게 아름답고, 철저하게 단련되어 군더더기라고는 털끝만큼도 보이지 않는, 그 자체로 완결된 문장이다. 정미경 또한 문장에 들렸다 싶다. 한권 한권의 소설이 발표될 때마다 문장은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매번 최고다!라고 외쳤는데 다음 소설은 더 나아진다는 게 정말 최고다. 인물이 반복되고 주제가 반복되어도 정미경의 소설이 늘 새로운 것은 그 형식과 문장이 날이 갈수록 나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발단 전개 위기를 거쳐 절정에서 끝이 나 버린다. 뻥, 하고 터지는 빅뱅을 마지막으로. 소설의 중심 사건은 해결은 커녕 종결조차 되지 않고, 인물들의 미래는 모래 폭풍 속에 들어간 듯 위험천만한 오리무중 상태로. 나는 이렇게 불친절한 소설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소설은 절정이 그대로 결말인 것에 동의한다. 고독에는 언제나 허무라는 감정이 따라오게 마련이므로.
정미경은 언제나 최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