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번의 삶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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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의 삶by 김영하

 

읽은 날 : 2025.4.6.

 

의도하지 않게 영원히 지속되는 삶에 대한 이야기(영원한 천국정유정, 은행나무, 2024)를 읽고 연달아 단 한 번의 삶에 대한 글을 읽게 됐다. 정유정의 글은 읽을 책을 차례대로 줄을 세워놓았던 라인에 놓여있었고, 김영하는 김영하였기에 배송받자마자 읽은 건데 일이 참 공교롭게 그리 되었다. 삶의 이런 우연성이 나는 좋다. 일부러 그런거라면 그건 좀, 너무, 도식적이잖아.

 

김영하는 내가 대학 신입생이던 1995년에 등단했다. 첫 번째 산문집은 2000굴비낚시, 영화를 주제로 한 에세이다. 두 번째 산문집이 2002포스트 잇이다. 그 즈음부터 나는 책을 모으기 시작했기에 김영하의 에세이집이 나오는 족족 실시간으로 따라 읽었다. 나보다 9살이나 많은 작가를 나와 동시대 작가로(9살 정도면 동시대 맞나.), 나와 함께 나이 먹어가는 작가로 인식하게 된 계기가 거기에 있다.

 

주제를 정하지 않은 진짜 산문집으론 첫 번째 권이 될 포스트 잇에서 김영하는 소설과 산문의 차이를 이렇게 말한다.

 

나는 평범한 인간들의 내면에 괴물이 한두 마리쯤은 숨어 있다고 늘 생각한다. 수효가 문제일 뿐, 없는 사람은 없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다. ……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가면 괴물이 내게 손을 내밀고 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방을 나선다. 우리는 뚜벅뚜벅 지상으로 향한다. 마침내 땅 위로 올라오면 그는 새로운 존재가 된다. 사람들은 이제 그를 소설이라 부른다. ……

그런데 한 번 지상으로 올라온 그 괴물들은 다시 내려가지 않는다. …… 양복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며 시정의 잡사에 참견하는 것을 즐긴다. 사람들은 그들을, 잡문 혹은 산문이라 부른다. …… 개중에는 괴물로서의 특성을 완전히 망각한 말랑말랑한 글도 있지만 아직 털갈이가 채 끝나지 않은 괴물의 축축한 글도 있다.

김영하, 포스트 잇, 현대문학, 2002, p.4-5

 

25년여 전의 영하씨의 산문은 털갈이가 채 끝나지 않은 괴물의 축축한 글이 꽤 된다. “평생 지나간 것이나 그리워하도록 되어먹은 것이 인간이라는 흉물”(김영하, 포스트 잇, 현대문학, 2002, p.71) 이라거나 아무 일도 없다는 게 사랑의 비극이다. 사랑은 낭비이며 사치이며 한가한 감정놀음이다. 자기를 사랑하는, 그러나 자기는 전혀 사랑할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잔인한 자들은 무슨 일이냐라고 묻는다. ‘그냥……으로 시작하는 대답을 기어이 그의 입으로 말하게 함으로써 말하는 자를 한심하게 만드는 놀음을, 그들은 즐긴다.”(김영하, 포스트 잇, 현대문학, 2002, p.123) 이라거나 왜 문학인가? 좋다. 말해주마. 무슨 말을 하는지 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어쩌자고 문학이냐, 아니면 왜 하필 문학이냐, 혹은 미쳤다고 문학이냐는 뜻이지 않은가.”(김영하, 포스트 잇, 현대문학, 2002, p.229) 이런식이다. 시니컬하고 사납다. 소설속 정제된 언어들과 달랐다. 물론 영하씨의 초기 작품들도 이렇게 폭력적이긴 하지만. 나는 이 에세이를 읽고 똘똘한 아이의 세상 인상기라는 제목을 달아 준 적이 있다. 갓 서른이 된 남자라기 보다는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아이라는 느낌이 더 강했다.

 

그랬던 영하씨의 산문은 나이를 먹어가며 달라진다. 입고 있는 양복에 익숙해지고, 사회적 언어를 사용하는데 더 노련해지며 날것의 감정을 토해내는 대신 순화하고 돌려서 말하는 법도 익혔다. 갓 서른이 되었던 사람이 마흔이 되고, 쉰이 되고, 환갑이 멀지 않게 되는 나이까지 성장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느낌이다. 여전히 스마트하고, 여전히 예민하지만 이제는 사용하는 언어의 질이 달라져 간다.

 

이십대의 나는 길에서 마주쳐도 지금의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지금의 나 역시 십대의 나를 그냥 지나칠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그 사람이 과거의 그 사람과 같은 존재라고 애써 믿으며 살아간다. 변하지 않은 어떤 것들을 애써 찾아내, 사람 변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김영하, 단 한 번의 삶, 복복서가, 2025, p.77

 

김영하는 지금까지 산문을 통해 자신에 대한 어떤 정보를 주는 것에 인색하지 않았다. 직업군인 아버지가 있고, 전업주부 어머니가 있고, 남동생이 하나 있고, 연세대를 나왔고, 부산 출신 아내와 결혼을 했고, 이걸 좋아하고 저걸 취미로 가지고 있고 블라블라블라. 아버지의 직업 덕에 매년 전학을 해야했던 초등학교 시절에 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고등학교 첫사랑 이야기며, 대학 시절의 이야기며. 김영하에 대한 정보는 어느 글에서나 넘쳐나서 이쯤 되면 이 사람을 친근하게 느끼는 것도 인지상정일 것 같은데, 묘하게 거리를 두는 느낌이 있었다. 하긴 공인이니까, 자신의 정보를 각색하는 것도 당연하지 싶으면서도 아니, 전혀 각색되지 않은 날것의 정보를 그대로 전달하는데도 묘하게, 모든 이야기를 다 들었는데 사실은 하나도 듣지 않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박완서나 박경리의 글이나 인터뷰는 자신의 모친에 대한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판단으로 넘쳐난다. 그것이 어떻게 작품에 반영되는지 선명하게 선이 그어질 정도로. 그런 인터뷰와 산문에 익숙했던 나로서는, 김영하의 우리 아버지는 직업군인이었어요. .” 이라는 정보는, 정보를 받았으나 받지 않은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건데. 하긴, 자기 아버지 이야기를 주저리 주저리 해야할 의무는 없잖아? 그 기묘한 거리감을 나는 김영하의 세련된 처세라고 받아들였다.

 

그러다 이 책을 읽고 드디어 생각했다. , 그랬군. 그동안 정보는 주었는데 감정은 주지 않았던 거야. 그러니 김영하의 작품과 연관 지을 선이 그어지지 않았던 거지. 이번 산문집에서 김영하는 자신의 아버지에 관하여, 그리고 어머니에 관하여 꽤나 자세한 이야기들을 털어놓는다. 그분들이 어떤 분들이었는지, 자신이 그분들에 대하여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아마도 두 분 모두 돌아가신 뒤이기에 가능했던 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아내에 대한 이야기는 평생 쓸 일이 없겠구나. 하하하.) 어쩌면 그렇게까지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나이를 먹어가며 모서리가 좀 둥글어지는 모습일 수도 있겠고.

 

김영하는,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어쨌든 내가 느끼는 김영하는 초기작을 쓸 때부터 이미 완성형의 작가였다는 생각을 한다. 한편한편 글을 쓸 때마다 나아지는 작가란, 발전하는 모습이니까 좋은 거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실은 음, 그건 그거대로 또 좀 별로이지 않나. 어쨌든 소설이 나아진다는 느낌보다는 소재와 주제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수는 있는 정도지 처음부터 글 진짜 잘 쓰는 작가이긴 했다. 타고난. 그래서 소설의 발전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는데, 에세이를 따라가면서는 할 말이 좀 생긴다. 작가도 나이를 먹고, 나도 나이를 먹고. 좋아하는 작가와 동시대에 함께 나이먹고 있다는 축복을 맘껏 누리는 중이다.

 

2025.4.6. by a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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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5-04-07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시마님, 반가워요. 그리고 김영하 작가의 사적인 고백에 대한 감상 아시마님이 정리해주시니 제가 느낀 뭔가 말로 설명하기 힘들었던 감정이 정리되는 느낌이에요. 솔직한데, 뭔가 감정이 넘치지 않는 느낌이었는데 이런 거였군요. 자신의 사적인 정보를 노출할 때 태도라는 게 뭔가 의도를 가지면 거부감이 드는 부분이 있잖아요. 김영하 작가에겐 그런 의도가 느껴지지 않았어요. 담백한데 그게 오히려 뭔가 더 울림을 주는... 김영하 작가의 나이듦에 대해 저도 비슷한 느낌을 가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