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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의 일기 - 황경신 장편소설
황경신 지음 / 북하우스 / 2009년 11월
평점 :
황경신을 아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가 않더군요. 그럼 이렇게 물어보아야 겠습니다. 페이퍼(paper)라는 잡지를 아십니까? 그 잡지의 편집장이 황경신입니다. 황경신은 이미 10권이 넘는 책을 출간한 중견급 작가이고,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대신 매니아층이 약간 있지요.
굉장히 화려하고 수식적인 문장을 쓰는 작가입니다. 은유와 직유에 능하고, 참신한 표현을 해 낼줄도 알구요, 사랑이 갓 시작될 때의 그 간질간질한 감정을 표현해 내는 데 아주 능숙한 작가이기도 하지요. 연애소설에 정말 정석 그대로 어울리는 작가입니다. 그녀의 소설 <모두에게 해피엔딩>은 정말 제대로 된 연애소설로는 몇손가락 안에 꼽아도 괜찮을 겁니다. 소설 그 자체로는 모르겠지만, 연애할 때의 그 간질간질하고 동글동글한 심리와 예리하고 팽팽한 감정선을 잘 잡아내는 재주가 있지요.
일본에 요시모토 바나나가 있다면 한국에는 황경신이 있지요.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뜬구름잡는 이야기 그대로 천연덕 스럽게 잘 하는 게 특징입니다.
이 책, 유령의 일기는 그 연장선에서 생각하면 됩니다. 이 책에도, 바나나가 자주 써먹는 유령이 나옵니다. 이 책의 "유령"은 보통 뇌사 상태의 사람들의 영혼입니다. 아직 죽음으로 넘어가지는 않았고, 그렇지만 육체에 깃들이지는 못한 혼을 유령이라고 지칭하는 군요. 큰 틀은 주인공 유령 소이의 사고와 그 이후의 이야기들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자잘자잘한 옴니버스 형식으로 개별 유령들의 사연을 하나하나 짚어줍니다. 이야기를 서사의 틀로 이끌어가지 못하고 에피소드의 나열로 겨우겨우 이어나갑니다. 우연의 남발이라는, 바나나와 황경신 공통의 문제점도 역시나 가지고 있구요. 서사가 강한 소설을 쓰는데는 여엉, 재주가 없어요. 하지만 장면 장면을 묘사하는 데는 탁월한 능력을 지녔죠.
저는 뭐, 나름 황경신의 매니아층에 들어간다고 해도 좋을만한 터라 황경신의 다른 책을 샀듯 이 책을 사서 읽었습니다만, 사실 이 책에서는 황경신 특유의 매력이 좀 떨어지는 편입니다. 이 사람은 정말 복문의 복문의 복문을 만드는 화려하기 그지없는 수사적 문장이 가장 큰 매력인데요, 이 책에서는 그런 면이 좀 떨어집니다. 문장이 전체적으로 많이 평범해 졌어요. 98년 <나는 하나의 레몬에서 시작되었다>라는 책에서 보이는 그 놀랍도록 화려하고도 참신하면서 독창적이던 동화적 상상력이 많이 죽었어요.
이쯤되면, 문학도 나이를 먹는가, 라고 한탄하던 1920년대 염상섭의 신문칼럼이 떠오르죠. 65년생이니 올해 벌써 마흔다섯인가요? 동화적이고 몽환적인 상상력의 글을 쓸 힘이 떨어진 건가 느껴지는 순간이예요. 작년 재작년, 황경신은 숨가프게 몇권의 책을 출간했는데요, 힘이 좀 딸린다 싶네요. 역시나.
뭐, 여전히 황경신을 좋아하고, 새로운 책이 나오면 또 살테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