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선인장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사사키 아츠코 그림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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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요즘은 읽다보니 온통 일본 여류작가의 소설만 읽게 된다. 머리가 복잡해서 그런가. 책장을 훑는 눈과 손이 매번 일본문학 섹션에서 멈춘다. 가오리의 『낙하하는 저녁』과 바나나의 『N.P』『도마뱀』등. 덕분에 일본 문학에 대한 반감이랄지 거부감은 많이 희석된 셈이다. 음. 희석이 아니라 무감각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자극의 역치상태랄까.

가오리는 확실히, 바나나에 비해 말을 아끼는 경향이 있다. 아니 말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 감각을 아끼는 것이라고 해야 하나. 바나나의 푸른빛이 끝 간 데 모르는 쪽빛, 칸나처럼 강렬한 붉은 빛이라면 가오리는 그렇게 극단으로 가지 않는다. 절제라기보다는 성품의 차이인 것 같다. 그럴 수 있지만 절제한다, 라는 느낌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렇게 극단으로는 치닫지 못한다, 라는 느낌이랄까.

이 소설(동화라고 할까?)은 가오리의 그런 성품이 좀 더 잘 드러난다. 다른 소설이 감각만을 아끼는 쪽이라면 이 소설은 감각에 언어까지도 아끼는 분위기다. 말도 아끼고 시간도 아꼈다. 그래서 아주 짧다.

단정하고 담백한 문체와 안정된(하기야 흐트러질 여지가 처음부터 없긴 했지만) 구조의 이야기는 “호텔 선인장”이라는 제목과도 정확하게 매치된다. 일상에서 유리된 공간인 호텔, 세 청년(?)이 사는 아파트의 이름이 호텔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들의 현실과는 유리된 일상을 이보다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있을까.

선인장은 군락을 이루지 않는다. 메마른 사막의 한가운데 느닷없다 싶을 만큼 우뚝 서 있는 선인장. 주변의 무엇과도 어울리지 않지만 또한 주변의 무엇도 배척하지 않으며 스스로 자족한 삶을 산다. 비교 대상이 없는 삶이란 얼마나 축복된 삶인가. 주변과의 비교가 아닌 나 혼자만의 만족으로 자족할 수 있는 삶이란.

하여 이 소설을 읽다보면 친구에 관한 생각을 하게 된다. 도대체 오이와, 숫자 2와, 모자가 그 무엇을 공통분모로 하여 만날 수 있단 말인가. 하다못해 음료에 관한 취향마저도 틀린 셋이. 인간 역시 그렇다. 같은 ‘인간’이라는 공동분모로 인해 만나지만 결국 각각의 인간이란 결국 ‘혼자’라는 유일한 공통분모만을 공유하게 되는 것은 아닐지.

현실에서 유리되어 외따로이 자족한 삶.
네가, 문득, 보고 싶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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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타민 F
시게마쯔 키요시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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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국 문학은 유난히 어머니를 다룬 작품이 많다. 언젠가 그 현상에 대해 “아버지 부재 현상”을 겪고 자란 세대들이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과연 그러한 것 같기도 하다. 일제시대와 6.25 전쟁, 베트남 파병, 중동 파견근무 등등을 거치며 우리의 아버지들은 자의든 타의든 부재자가 되고 아버지가 없는 자리를 메꾸는 어머니들은 두 명 분을 혼자 해 내며 자녀들에게 평생 애틋한 존재로 자리하게 된다. 김원일의 『마당깊은 집』이나 박완서의 『엄마의 말뚝』을 비롯한 일련의 소설들이 그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가족사 소설”이란 어머니를 다룬 소설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1996년 나온 『아버지』(by 김정현)라는 소설이 엄청난 히트를 친 것 역시 그 동안 아버지를 다룬 소설이 지나치게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시게마츠 키요시의 이 소설은 그런 점에서 신선하다. 총 일곱편의 단편이 실린 이 소설집에서는 주로 아버지의 고뇌와 아버지의 애정을 다룬다. 이 소설들에서 어머니의 위치는 희미하다. 사랑을 찾아 집을 나가고(〈어머니 돌아오다〉), 왕따를 당하고 있는 딸의 모습에 발만 동동 구르며(〈셋짱〉), 존재는 있되 생각은 없는(〈주먹〉) 모습을 보인다. 어쩌면 어머니(또는 아내)의 모습이 이렇게 부정적이고 희미하게 묘사되는 것은 소설의 화자가 남편 또는 아들이 선택되고 있기 때문인 듯도 싶다.(1인칭 시점이 아닐 때 역시, 작가는 남편의 시선으로 상황을 묘사해 내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생각할 때, 이 소설은 남편 또는 아들의 아내 또는 어머니에 대한 부정적 시선을 보여주는 것이 되어 일본 가정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 될 것 같기도 해서 여성의 입장에서 불공평하다 싶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점에서 우리 소설들을 미루어 보면, 지나치게 아내 또는 어머니의 입장만을 옹호해 온 단점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하여 이 소설은 내게, 내 아버지의 모습이나 내 아버지의 고뇌를 돌아보게 하였다. 여자이고 딸이라는 한계로 인하여 아버지를 제대로 보고 있지 못했던 것은 아닌가. 나이를 먹어갈 수록 딸들과 친구가 되고, 딸들에게 이해받고, 아들에게 동정받는 어머니들의 모습 뒤로 쓸쓸히 늙어가는 우리들의 아버지. 그들의 젊은 시절 고뇌는 “남자답다”라는 말에 강제로 함몰되어 버린 약한 감정과 두려움, 외로움 등등이 아니었을까.

그래. 남자든 여자든, 아버지든 어머니든, 남편이든 아내든. 결국은 사람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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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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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작주의자에 가깝다. 보통 한 작가의 책을 사기 시작하면 그 작가의 작품은 전부 콜렉터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라(또는 특정 번역가-이윤기-의 작품이나 특정 장르-그리스 로마 신화-의 글도) 각각의 책을 보면 그 책을 왜 샀는지에 대한 이유를 대체로는 명확히 알고 있다. 그러나 가끔, 엉뚱하게도, 아주 가끔, ‘어라, 내가 이 책을 언제, 왜 샀지?’ 싶은 제목도 작가도 낯선 책이 한두 권 있는데 이 책이 바로 그랬다.

금요일 오후에 낮잠을 자면서 과외 가기 위해 오후 다섯 시로 알람을 맞춰놓는다는 게, 아마 새벽 다섯 시로 알람이 맞춰졌던 모양이다. 토요일 새벽 다섯 시에 눈을 떠 버렸을 때의 황당함이란. 게다가 아무리 잠을 자려고 몸을 뒤척여도 더 이상은 잠이 오지 않을 때의 그 난감함. 결국 불을 켜고 책장을 훑었다. 황당한 기분일 땐 황당한 책을 읽어야 한다. 내가 산 것인지 조차 불명확한-내 책장에 꽂혀 있는 걸 보면 내가 산 것이 맞겠지만- 책을 들고 침대에 누웠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란다. 지루할 것 같다. 더 잘됐다. 몇 장 보다 졸리면 얼른 자고 일어나서 반지 보러 가야지. 내 생각의 흐름은 그러하였는데, 웬걸. 이 책은 3시간 반짜리 영화를 보기 위해 잠을 보충해 두려던 나의 의도를 여지없이 깨놓고 말았다.

사실 나에게, 환상문학은 여전히 낯선 분야다. 톨킨과 젤라즈니를 제외하고. 톨킨과 젤라즈니는 개인적인 취향에 맞기는 했으나 나에게 환상문학에로의 길을 열어주지는 못했다. 톨킨은 그냥 톨킨이고 젤라즈니는 그냥 젤라즈니였다. 그 이후로 몇몇 환상문학을 읽어 보았지만 (마거릿 애트우드『시녀이야기』등)개별적 작가나 작품에 대한 호감이 장르에 대한 호감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하여, 아마 이 소설이 환상문학의 일종인 것을 알았다면 어떠한 이유로도 사지는 않았을 듯.

처음 “눈먼 자들” 이란 무언가에 대한 은유일거라고 막연히 짐작했다. 욕심에 눈먼 자들. 권력에 눈먼 자들, 그래서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자들에 대한 일종의 경각심을 일으키는 소설. 그러나 놀랍게도, 이 소설의 “눈먼 자들”은 수사적 은유가 아닌 실제 그대로 “눈먼 자들” 말 그대로의 맹인이었다.

작가는 어느 날 갑자기 실명(失明)이 전염병처럼 퍼져가고, 그 전염을 막기 위해 200명이 넘는 사람들을 격리시키고, 그래도 끝내 전염을 막지 못해 전 도시가, 전 국가가 공황상태에 빠져버리는 과정을 서술하면서도 전혀 끝내 태연자약하다. 그 태연자약에서 오는 신뢰감 획득은 놀라울 정도다. 작가의 그 태도 때문에 독자는 소설 속에 푹 빠져들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의 절반이상을 읽고 나서야 이게 환상소설의 일종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둔한 탓일까?) 또한 절반 이상을 읽고 나서야, 아라, 이 작가 문장부호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구나, 하였다. 그럼에도 전혀 의미전달에 무리가 없었다. 이 책에서는 따옴표가 전혀 사용되지 않는다. 대화와 서술에 줄바꿈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어려워하지 않고 소설의 내용을 이해한다. 오히려 그러한 새로운 형식의 문체가 집중력을 강화시키는 효과를 가지고 오기도 한다. 절반을 읽고 나서야 그러한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만으로도 그 문체의 효과를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소설에 드러난 마술적 리얼리즘(realismo mágico)이 비록 남미문학의 전통을 주제 사라마구가 이어받은 것일 뿐이라해도 여전히 작가의 능력은 경이롭다. 그 마술적 리얼리즘을 통하여 이 소설은 인류에 대한 알레고리가 된다. 인간의 문명과 문화, 진보와 발전은 그렇게 표피적인 것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알레고리적 소설은 촌스럽고 재미없다고 생각해왔는데, 그 생각을 수정하고 있는 중.

ps. 언젠가, 내가 가진 다섯 개의 감각 중 가장 소중한 감각이 무엇일까에 관해 자문해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나는 시각이라고 자답했었다. 토비콤 에스를 먹어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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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와 프리즘 - 이윤기 산문집, 내일을 여는 글들 1
이윤기 지음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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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윤기를 좋아하는 것은 그가 천재이기 때문이다. 타고난 천재이기도 하지만 몹시도 노력하는 천재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사실 나는, 천재란 타고난 것이라고 믿는다. 천재가 99%의 노력이라구? 에디슨 아저씨! 어디서 사기를 치는 거요! 버럭!) 그가 쓴 산문을 100% 믿는다면, 읽고 쓸 것이 너무 많아서 잡기(雜技)를 전혀 즐기지 못하고 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릴만큼 치열하게 노력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바둑과 장기 등의 취미에 투자할 시간까지 모두 글을 읽고 쓰는데 투자한 한 노력가의 “知的 카니발”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이 책은 그의 그러한 지적 카니발이라 할 수 있다.

사마천의 사기와 한비자, 노자와 장자 등의 동양의 고전에서 그리스로마 신화와 플라톤으로 이어지는 서양고전을 두루 섭렵한 그의 “문자향서권기”는 글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이쯤되면 그가 제안하는 “르네상스”를 나도 슬슬 시작해야만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그만 기가 질려 주저앉게 되고 만다. 이렇게 기가 질려 주저앉은 사람의 등을 그는 가벼운 산문으로 툭툭 두들겨 준다.

오늘이 여생의 첫날(Today is the first day of the rest of your life)이란다. 멤피스 공항의 환승터미널 게시판에 쓰여 있는 글이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알고 보는 세상이 얼마나 재미있는 것인가에 대한 깨달음을 새록새록 얻게 된다. 세상이란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것들은, 해석할 수 있을 만큼만 재미있다. 가장 최근의 예로 톨킨의 『반지의 제왕』을 읽은 자와 읽지 않은 자가 피터 잭슨 감독의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느끼는 재미의 차이를 들 수 있겠다.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그 것을 해석할 수 있는 ‘지식’을 손에 쥐게 되는 것은 세상을 재미있게 살아갈 수 있는 지도를 쥐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지도를 쥐기까지 거쳐 가야 할 길이 너무도 멀어 막막해 지는 사람에게 그는 등을 툭툭 쳐 주며 말한다.

오늘이 여생의 첫날이란다.
하나씩 하나씩 시작하면, 조각난 지도가 언젠가는 세계 전도가 될 수 있으리라고.

프로이드와 융을 읽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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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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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의 경우 읽자마자 쓰는 리뷰가 가장 정확한 편이다. 그럼에도 곧잘 미뤄두었다가 쓰는 이유는 게으른 탓이다. 사실 나에게 북 리뷰는 내가 무슨 책을 읽었는지, 그 책을 읽고서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에 대한 나 혼자만을 위한 짤막한 기록이다. 크나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일기를 쓰는 것과 비슷하다. 몇년 몇월 며칠에 무슨 일이 있었고, 그 일에 대해 내가 어찌 느꼈었느냐에 대한 기록처럼 언제 내가 무슨 책을 읽었고, 그 책에서 무슨 느낌을 받았는가에 대한 기록. 오직 나만을 위한 개인적이고 순수하게 이기적인 기록이다. 그러므로 리뷰를 쓰는 것에 큰 부담도 없다. 사실, 모든 리뷰가 그러하지 아니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뷰 쓰는 것을 망설이게 하는 책이 있다. 도대체 무슨 말을 써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 쓰자고 생각하니 너무 많은 말을 쓰게 되어 난감하게 만드는 책. 그럼에도 꼭 리뷰를 쓰고 싶어지는 책. 이런 책의 경우 리뷰가 미루어지게 된다. 리뷰 쓰고 싶은 책을 앞에 두고 내가 취하는 태도는 두 가지다. 책을 처음부터 다시 정독을 하거나, 다시 읽지는 않지만 두고두고 되씹어 생각해 보고, 타인에게 열심히 말을 하는 책.

이 책은 후자의 경우였다.
산도르 마라이라는 낯선 헝가리 작가의 책 한권을 손에 쥐고, 나는 한참동안 멍하게 앉아 있었다.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일을 자의든 타의든 겪는다. 비중의 차이는 있으나 숱한 사건들로 점철된 것이 우리네 인생이고 보면, 아무리 큰 사건이라해도 뒤 따라오는 나머지의 사건들에 그 충격이 희석되게 마련이다. 그렇기에 사람은 살아갈 수 있는 것이고.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는 모양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헨릭에게 처럼. 헨릭은 20대 후반에 아내와 친구의 배신을 겪고 자신의 인생을 그곳에 멈추어 버린다. 그는 다른 “삶의 사건”들을 겪는 것을 거부하고 그 후의 41년간을 그 배신에 매달려 산다. 그 배신에서 오는 깨달음과 성찰. 이 소설은 한 남자가 41년간 단 하나의 사건에 매달려 성찰해 온 결과를 세심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렇기에 거의 그의 독백으로 이루어 진 소설 후반부에서 느껴지는 충격은 쉽게 감당하기 힘들다. 아니, ‘충격’ 이라기보다는 헨릭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삶과 인생, 사랑과 자존감 등등에 대한 성찰에 대한 ‘무게’를 감당하기 힘든 것이다. 당연할 밖에. 41년간을 그것만 되씹으며 살아온 사람이 아닌가.

그 성찰에 동의 하든 하지 않든 간에 그것만으로도 이 소설은 가치를 가진다. 주인공 헨릭은 하나의 깨달음을 내 놓고, 다시, 그 깨달음을 뒤집어 놓는 새로운 깨달음을 내 놓고, 그것을 또 다시 깨 놓는 그야말로 “변증법적 사고”를 통해 진실에 접근해 나간다. 그리고 자신의 그 과정을 고스란히 친구 콘라드 앞에 펼쳐놓는데 그야말로 “압권” 이라는 말 밖에.

타인에게 책을 권유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독서는 때로 가장 개인적인 행위이고, 책을 권유하는 것은 일견 나의 “감동”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결과를 낳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사실 “느낌표” 류의 프로그램을 싫어한다. 물론, 숨겨진 좋은 책을 권해준다는 점만은 부정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누구에게든 권하고 싶다.
삶이 무엇인지 궁금한가? 우정이 무엇인지 궁금한가? 당신, 이 책을 읽어라.
아주 작은 실마리라도 찾게 될 것이다.
정답은 아닐지라도.
삶은 인간이 그러하듯 개별적인 것이고 따라서 삶의 제반문제에 대한 대답역시 개별적인 것이다. 타인의 답은 자신이 답을 찾아가는 데 보조 역할을 해 줄 뿐. 이윤기 식으로 말한다면 "책은 곧 지도" 인 것이다. 지도가 있는 여행은 편안하면서도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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