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전작주의자에 가깝다. 보통 한 작가의 책을 사기 시작하면 그 작가의 작품은 전부 콜렉터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라(또는 특정 번역가-이윤기-의 작품이나 특정 장르-그리스 로마 신화-의 글도) 각각의 책을 보면 그 책을 왜 샀는지에 대한 이유를 대체로는 명확히 알고 있다. 그러나 가끔, 엉뚱하게도, 아주 가끔, ‘어라, 내가 이 책을 언제, 왜 샀지?’ 싶은 제목도 작가도 낯선 책이 한두 권 있는데 이 책이 바로 그랬다.

금요일 오후에 낮잠을 자면서 과외 가기 위해 오후 다섯 시로 알람을 맞춰놓는다는 게, 아마 새벽 다섯 시로 알람이 맞춰졌던 모양이다. 토요일 새벽 다섯 시에 눈을 떠 버렸을 때의 황당함이란. 게다가 아무리 잠을 자려고 몸을 뒤척여도 더 이상은 잠이 오지 않을 때의 그 난감함. 결국 불을 켜고 책장을 훑었다. 황당한 기분일 땐 황당한 책을 읽어야 한다. 내가 산 것인지 조차 불명확한-내 책장에 꽂혀 있는 걸 보면 내가 산 것이 맞겠지만- 책을 들고 침대에 누웠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란다. 지루할 것 같다. 더 잘됐다. 몇 장 보다 졸리면 얼른 자고 일어나서 반지 보러 가야지. 내 생각의 흐름은 그러하였는데, 웬걸. 이 책은 3시간 반짜리 영화를 보기 위해 잠을 보충해 두려던 나의 의도를 여지없이 깨놓고 말았다.

사실 나에게, 환상문학은 여전히 낯선 분야다. 톨킨과 젤라즈니를 제외하고. 톨킨과 젤라즈니는 개인적인 취향에 맞기는 했으나 나에게 환상문학에로의 길을 열어주지는 못했다. 톨킨은 그냥 톨킨이고 젤라즈니는 그냥 젤라즈니였다. 그 이후로 몇몇 환상문학을 읽어 보았지만 (마거릿 애트우드『시녀이야기』등)개별적 작가나 작품에 대한 호감이 장르에 대한 호감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하여, 아마 이 소설이 환상문학의 일종인 것을 알았다면 어떠한 이유로도 사지는 않았을 듯.

처음 “눈먼 자들” 이란 무언가에 대한 은유일거라고 막연히 짐작했다. 욕심에 눈먼 자들. 권력에 눈먼 자들, 그래서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자들에 대한 일종의 경각심을 일으키는 소설. 그러나 놀랍게도, 이 소설의 “눈먼 자들”은 수사적 은유가 아닌 실제 그대로 “눈먼 자들” 말 그대로의 맹인이었다.

작가는 어느 날 갑자기 실명(失明)이 전염병처럼 퍼져가고, 그 전염을 막기 위해 200명이 넘는 사람들을 격리시키고, 그래도 끝내 전염을 막지 못해 전 도시가, 전 국가가 공황상태에 빠져버리는 과정을 서술하면서도 전혀 끝내 태연자약하다. 그 태연자약에서 오는 신뢰감 획득은 놀라울 정도다. 작가의 그 태도 때문에 독자는 소설 속에 푹 빠져들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의 절반이상을 읽고 나서야 이게 환상소설의 일종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둔한 탓일까?) 또한 절반 이상을 읽고 나서야, 아라, 이 작가 문장부호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구나, 하였다. 그럼에도 전혀 의미전달에 무리가 없었다. 이 책에서는 따옴표가 전혀 사용되지 않는다. 대화와 서술에 줄바꿈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어려워하지 않고 소설의 내용을 이해한다. 오히려 그러한 새로운 형식의 문체가 집중력을 강화시키는 효과를 가지고 오기도 한다. 절반을 읽고 나서야 그러한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만으로도 그 문체의 효과를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소설에 드러난 마술적 리얼리즘(realismo mágico)이 비록 남미문학의 전통을 주제 사라마구가 이어받은 것일 뿐이라해도 여전히 작가의 능력은 경이롭다. 그 마술적 리얼리즘을 통하여 이 소설은 인류에 대한 알레고리가 된다. 인간의 문명과 문화, 진보와 발전은 그렇게 표피적인 것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알레고리적 소설은 촌스럽고 재미없다고 생각해왔는데, 그 생각을 수정하고 있는 중.

ps. 언젠가, 내가 가진 다섯 개의 감각 중 가장 소중한 감각이 무엇일까에 관해 자문해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나는 시각이라고 자답했었다. 토비콤 에스를 먹어야겠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