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파괴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남주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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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서 살았던 작가의 유년기가 잘 녹아있는 작품. 작가 스스로 이 작품은 실화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작가의 뛰어난 이야기 솜씨가 덕에 논픽션임에도 불구하고 어지간한 픽션보다 훨씬 탄탄한 구조를 가지고 흥미롭게 쓰여졌다. (그렇다면, 독일인 아이를 오물통에 빠뜨리는 이야기 역시 실화였단 말인가?)

이 작품의 아이들은 천진난만 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지나치게 천진난만하여 지나치게 잔인하다. 배설물들을 모아 고문용 통을 만들어 독일인 아이를 거기에 절이기도 하고, 토하는 것으로 공격을 하기도 하고, 배달되어 온 요구르트를 죄다 마셔버리고 거기에 오줌을 채워두기도 한다. 결과에 연연해하지 않음으로 해서 훨씬 잔인해 질 수 있는 것인가?

그러나 아이들의 잔인성이란 외적인 것에서보다 내적인 것에서 훨씬 강하게 드러난다.
아이들은 그 본성에 가식의 덧옷을 씌울 줄 모르기 때문에 인간의 본질적인 특성은 더욱 강하게 살아나는 것 같다. 사랑도, 미움도, 동경도, 증오도. 이성과 절제라는 필터가 사라진 그 감정들은 성인의 그것보다 훨씬 선명하게 훨씬 강렬하게, 훨씬 잔인하게 드러난다.

하여 동경이 사랑으로 변해가는 과정도, 그 사랑이 미움과 증오로 파괴되어 가는 과정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확실히, 아멜리 노통은 어린 소녀의 심리를 묘사하는데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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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 인명사전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남주 옮김 / 문학세계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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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엇보다 분명한 것은 작가의 민족성이나 생장환경은 작품에 영향을 끼친다라는 것이다.
벨기에인인 젊은 작가 아멜리 노통은 외교관(특히 아시아권 전문의?)이었던 아버지 덕에 1967년 일본 고베에서 태어나 중국과 방글라데시, 보르네오, 라오스 등지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다. 지금은 벨기에의 브뤼셀과 프랑스 파리를 오고가며 글을 쓴다. 물론 그녀가 집필에 사용하는 언어는 프랑스어다.

유럽 민족인 작가가 동양에서 태어나 아시아 문화권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 결과는 어찌 되었을까.

그녀 소설의 대부분은 천연덕스러운 코메디를 생각나게 한다. 도대체 납득이 되지 않는 이상한 상황을 설정해 놓고, 적절하게 치고 빠지는 대화의 구사를 통해 독자에게 웃음을 선사해 주는. 여기에 그녀의 생장환경이 더해져 그녀의 코메디는 약간의 엽기적 성향을 띠게 된다. 아무래도 일본에서 생장한 영향이 큰 듯. 그녀의 코메디는 의외로 일본적이다.

이 소설에는 “나를 죽인 자의 일생에 관한 책” 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물론 여기서 “나”란 이 소설의 작가 “아멜리 노통”을 말하고, 이 소설의 내용과 제목을 그대로 믿어보자면 아멜리 노통은 이 소설의 여주인공 플렉트뤼드에 의해 살해당한다. 특이한 생장과정을 거친 플렉트뤼드는 “그토록 갈망했던 친구, 혹은 자매의 모습을 발견”한 아멜리 노통이 “신통찮은 작품을 쓰는 걸 막을 수 있는 길”로 그녀를 살해해 버린다. 정당하고 우정 넘치는 살해에 따른 시체 처리를 고민하는 플렉트뤼드와 그녀의 남편 마티에의 모습은 그야말로 슬랩스틱 코메디의 한 장면이다. 단순히 엽기적이다, 라고 말하기엔 그들의 모습이 지나치게 진지하면서도 유쾌하다.

발레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어린아이(특히 소녀)들의 내면에 대한 통찰이 눈부셨던 책.

아멜리 노통에게 매니아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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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돌아왔다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이우일 그림 / 창비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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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으며 처음으로 중얼거린 말은 ‘어른이 되어서 돌아 왔구나’ 였다. 표제작에서 열 여섯에 아버지를 줄넘기 줄로 꽁꽁 묶어놓고 집을 나간 ‘오빠’가 여자를 데리고 들어와 한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하듯. 바람 잡아 멕시코로 떠났던(『검은 꽃』,2003) 치기와 냉소로 가득했던 청년 하나가 세월만큼 나이를 먹고, 세상의 흐름에 순응하는 어른이 되어 돌아왔다. 오빠가 돌아오듯.

이제 그는 자살을 돕는 일 따위는 하지 않고(『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1996), 미용실 스텝 아가씨와 섹스를 하는 대신(『아랑은 왜』, 2001) 아내와 결혼한 지 5년 만에 아파트를 늘려 이사를 하고(〈이사〉), 애널리스트가 되어 아내와 하와이로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보물선〉), 학창시절 가장 친했던 친구 둘과 공유했던 여자를 만나고 그녀의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크리스마스 캐럴〉).

냉소적인 시선으로 한걸음 떨어져 관망하듯, 영화를 보듯, 전혀 딴나라의 이야기를 서술하듯 가볍고 쉽게 이야기 하던 바로 그 위치에서 이젠 현실로 들어와 그 차가운 냉소를 열정으로 데워가며 복닥복닥 부대끼며 살아간다. 싫은 것은 안 보면 그만이고, 세상일은 나는 모르겠고, 고통 받는 내면보다 외적인 이미지에 집중하던 그가 이제 어른이 되어 싫지만 해야 하는 일도 하고, 세상일에 끼어들기도 하고, 냉소적인 시선으로 외면해 오던 타인의 속을 가만가만 짚어줄 줄도 안다. 뭐, 본래의 성품이야 어디로 가겠느냐만.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그의 산문집 『포스트 잇』의 리뷰를 쓰면서 썼던 그 “똘똘한 아이” 김영하가 이제는 어른이 되었다. 유들유들하고, 조금쯤 때도 묻고, 그때처럼 반짝이지는 않아도 그때보다는 훨씬 풍성해진 어른. 기특해서 엉덩이라도 툭툭 두들겨 주고 싶다. (아아, 그는 나보다 열 살 위다. ㅡㅡ;;;)

68년생인 김영하는 아직도 아내와 고양이를 키우며 산단다. 경의선 철로변에서. 아이를 하나 낳고 그야말로 빼도 박도 못하는 이 땅의 소시민적 아버지가 되면, 그의 글은 또 어떻게 변할까.

아아,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은 눈부신 소설적 재능.
신은 불공평하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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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리티 리포트 필립 K. 딕의 SF걸작선 1
필립 K. 딕 외 지음, 이지선 옮김 / 집사재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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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밝힌 사항이지만, 나는 SF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흠. 장르 소설 자체를 별로 즐기지 않는다고 해야 맞다. 홈즈를 좋아하지만 그것은 추리물을 좋아하는 곳으로 발전하지 못했고, 톨킨과 젤라즈니에 열광하지만 그것은 개인에 대한 열광일 뿐 장르에 대한 열광으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내가 열광하는 장르소설이 유일하게 있다면 그것은 역사 소설 정도가 아닐까 싶다.(역사 소설은 정통 문학으로 그다지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필립 K. 딕의 이 소설은 그러한 나의 취향에 비추어 볼 때 전에 언급한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나 내가 사놓고도 샀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는(그래서 당연히 아직 읽지도 않은) 듀나의 『태평양 횡단특급』, 코니 아줌마의 『개는 말할 것도 없고』류에 속한 다고 볼 수 있다. 전혀 취향이 아니지만 읽다보면 오호~ 하게 될 확률이 높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르 소설로 길잡이를 해 주는 소설은 아닐. (뭔가 복잡하다.)

하지만 이 소설은 앞에 언급한 그 소설과는 분명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앞에 언급한 그 소설들은 아마도, 알라딘의 리스트의 달인 프로그램 덕에 얼떨결에 주문하였을 것이 분명한 책들이지만 이 책은 내 스스로 사기 위해 검색까지 했던 책이다. 왜냐구? 스티븐 스필버그, 라는 이름이 붙었거든.

그렇다. 난 아직 스필버그나 탐 크루즈의 영화 치고 재미없었던 영화는 한편도 없었다. 게다가, 스필버그가 각색해서 찍은 영화의 원작 소설치고 재미없어 실패했던 적도 단 한번도 없었다. (마이클 크라이튼을 보라- 난 한때 그의 광팬이었다. 존 그리샴도.) 그래서 샀던 책이다.

이 책은 모두 8편의 짤막짤막한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의 두 편(<스위블>, <물거미>)은 타임 트래블에 관련된 이야기이고, 두 편(<고소공포증에 시달리는 사나이>, <마이너리티 리포트>)은 예지능력에 관련된 이야기, 그리고 두 편(<우리라구요!> <그래, 블로벨이 되는 거야!>)은 인간과는 다른 외계 생물체에 관련된 이야기이고 나머지 두 편(<퍼키 팻의 전성시대><완벽한 대통령>)은 대폭발, 또는 대 전쟁 이후의 암울한 인간세상에 대한 이야기이다.

필립 K 딕의 미래 인식은 그의 소설 제목 그대로, 그야말로 마이너 하다. 그의 이러한 암울한 미래 인식에 의한 소설들은 의미는 약간 다르지만 “마이너리티 리포트”라고 이름 붙여도 손색이 없을 듯 하다. 암울한 보고서. 그의 이러한 암울한 보고서를 유쾌하게 바꾸어 놓는 것은 그의 소설 곳곳에서 보이는 유머 덕분이다. 특히 <물거미>의 유머는 압권이다. 18세기 프랑스의 랭보가 말했던 것-시인은 예언자다-과는 조금 다른 의미이겠지만, 어쨌든 현대의 SF 작가들을 미래의 예지자로 설정하고, SF 잡지를 예언서로 해석하는 장면의 유머는 놀랍지는 않아도 몹시 유쾌했다.

사실 사놓고도 오랫동안 읽지 않고 있던 이 책을 꺼내 읽은 것은 최근 노통의 탄핵정국 덕이었다. 노통의 탄핵 사유로 거론 된 몇몇가지가 그야말로 마이너리티 리포트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그런데 어떤 만평가가 이미 그것으로 만평을 그렸더라. 사람들의 상상력이란 비슷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마이너리티 리포트란 “소수의 예언서” 또는 “틀린 예언서”라는 의미를 가진다. 세명의 예언자 중 두 명의 예언이 일치하고 한명의 예언이 다를 때 그 소수자의 예언은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되어 폐기된다. 이 소설은 거기에 관해 꼬집고 있다.

마이너리티 리포트란 반드시 틀린 것인가. 2:1이란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한 단계 더 나아가,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안다는 것의 의미와 자유의지에 관한 것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 보게 한다. 선과 악의 대립은 반드시 명확하지 않고, 인간은 자신의 미래를 알게 되는 순간 그 ‘안다’는 것이 이미 예언된 미래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란, 자신의 미래를 피해갈 수 있는 것인가, 예언된 미래를. 운명을 안다면 운명을 바꿀 수 있을까? 하는 생각 역시 하게 만든다.

취향과 다른 소설을 간간히 읽는 다는 것은, 딱히 나쁘지는 않은 일 같다. 꽤 재미있게 읽었던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SF는 취향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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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하하는 저녁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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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개월을 두고 실연하는 이야기, 라는 표제에 끌려 책을 집어 들었다. 아니다, 거짓말이다. 사실은 에쿠니 가오리의 책은 죄다 사 들여서 읽는다. 전작주의자스러운 중증이다. 집어 들고보니 15개월에 걸친 실연이야기더라.

미친 듯이 연애를 했던 첫사랑의 시절에, 나는 사랑이 영원한 것일 줄로 믿었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의 그 유명한 대사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라는 말, 그 말을 나는 내 첫사랑이 끝나고도 3년이나 뒤에 중얼거리게 되더라.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그 말은 이미 변한 사랑을 확인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라는 것도 그때 알게 되었다.

남자주인공 다케오는 8년에 걸친 사랑을 단 사흘로 인해 버린다. 동거까지 하였던 8년차 연인을 버리는 그를, 그 순수함 때문에 용서해 주었다. 변해버린 마음을 부여잡고 상대방을 할퀴고 상처 입혀 끝내는 상대방에게서 끝내자는 소리가 나오게 만드는 그 비겁한 연인들에 비해 그의 태도는 얼마나 순수하게 쿨한가. 하여 그를 용서하였다.

존재가 재앙이 되는 여자 하나코. 참으로 나쁜 것은 그 재앙을 하나코가 의도한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그녀를 아는 모든 사람이 그녀를 사랑하게 되지만 그녀를 사랑하는 누구도 사랑하지 못하는 여자. 그렇지, 때로는 원하지 않는 사랑을 받는 것도 일종의 폭력에 해당하니까.

리카. 8년의 세월로도 사흘을 이기지 못한 여자. 그녀는 울지 않았고, 푸념하지 않았고, 분노하지 않았다. 조용히, 그야말로 낙하하는 저녁처럼 느릿하고 담담하게 실연을 받아들였다. 일본인의 감성에 동조를 느끼게 되다니, 맙소사-!다. 10권이 넘는 일본 여류문인의 소설을 읽어왔지만 처음으로 그 감성에 동조를 느끼게 된 여주인공이다. 리카.

자신의 불같은 연애가 꽃이 시들 듯 시들어 가고, 사그라지고 사그라져 그렇게 애틋하였던 그를 만나도 이제는 더 떨리지도 슬프지도, 원망스럽지도 않은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 것. 그래서 그와 다시 연애를 시작할 수도,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을 수도 있게 되는 상태. 그렇지. 실연이란 그런 것이다. 그를 봐도 아무렇지도 않은 때가 되어 실연인 것이다. 15개월에 걸친 실연이란 다케오에 대한 리카의 마음이 뜨겁게 불타올랐다가 싸늘하게 식었다가 평온한 온도에 도달하는 그 시간을 말하는 것이었다. 헤어짐을 말한 직후의 ‘곱지 못한 마음’이 다시 곱게 다듬어 지는데 걸리는 시간.

확실히, 바나나의 인물들보다는 가오리의 인물들이 더 쉽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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