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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대개의 경우 읽자마자 쓰는 리뷰가 가장 정확한 편이다. 그럼에도 곧잘 미뤄두었다가 쓰는 이유는 게으른 탓이다. 사실 나에게 북 리뷰는 내가 무슨 책을 읽었는지, 그 책을 읽고서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에 대한 나 혼자만을 위한 짤막한 기록이다. 크나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일기를 쓰는 것과 비슷하다. 몇년 몇월 며칠에 무슨 일이 있었고, 그 일에 대해 내가 어찌 느꼈었느냐에 대한 기록처럼 언제 내가 무슨 책을 읽었고, 그 책에서 무슨 느낌을 받았는가에 대한 기록. 오직 나만을 위한 개인적이고 순수하게 이기적인 기록이다. 그러므로 리뷰를 쓰는 것에 큰 부담도 없다. 사실, 모든 리뷰가 그러하지 아니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뷰 쓰는 것을 망설이게 하는 책이 있다. 도대체 무슨 말을 써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 쓰자고 생각하니 너무 많은 말을 쓰게 되어 난감하게 만드는 책. 그럼에도 꼭 리뷰를 쓰고 싶어지는 책. 이런 책의 경우 리뷰가 미루어지게 된다. 리뷰 쓰고 싶은 책을 앞에 두고 내가 취하는 태도는 두 가지다. 책을 처음부터 다시 정독을 하거나, 다시 읽지는 않지만 두고두고 되씹어 생각해 보고, 타인에게 열심히 말을 하는 책.
이 책은 후자의 경우였다.
산도르 마라이라는 낯선 헝가리 작가의 책 한권을 손에 쥐고, 나는 한참동안 멍하게 앉아 있었다.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일을 자의든 타의든 겪는다. 비중의 차이는 있으나 숱한 사건들로 점철된 것이 우리네 인생이고 보면, 아무리 큰 사건이라해도 뒤 따라오는 나머지의 사건들에 그 충격이 희석되게 마련이다. 그렇기에 사람은 살아갈 수 있는 것이고.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는 모양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헨릭에게 처럼. 헨릭은 20대 후반에 아내와 친구의 배신을 겪고 자신의 인생을 그곳에 멈추어 버린다. 그는 다른 “삶의 사건”들을 겪는 것을 거부하고 그 후의 41년간을 그 배신에 매달려 산다. 그 배신에서 오는 깨달음과 성찰. 이 소설은 한 남자가 41년간 단 하나의 사건에 매달려 성찰해 온 결과를 세심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렇기에 거의 그의 독백으로 이루어 진 소설 후반부에서 느껴지는 충격은 쉽게 감당하기 힘들다. 아니, ‘충격’ 이라기보다는 헨릭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삶과 인생, 사랑과 자존감 등등에 대한 성찰에 대한 ‘무게’를 감당하기 힘든 것이다. 당연할 밖에. 41년간을 그것만 되씹으며 살아온 사람이 아닌가.
그 성찰에 동의 하든 하지 않든 간에 그것만으로도 이 소설은 가치를 가진다. 주인공 헨릭은 하나의 깨달음을 내 놓고, 다시, 그 깨달음을 뒤집어 놓는 새로운 깨달음을 내 놓고, 그것을 또 다시 깨 놓는 그야말로 “변증법적 사고”를 통해 진실에 접근해 나간다. 그리고 자신의 그 과정을 고스란히 친구 콘라드 앞에 펼쳐놓는데 그야말로 “압권” 이라는 말 밖에.
타인에게 책을 권유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독서는 때로 가장 개인적인 행위이고, 책을 권유하는 것은 일견 나의 “감동”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결과를 낳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사실 “느낌표” 류의 프로그램을 싫어한다. 물론, 숨겨진 좋은 책을 권해준다는 점만은 부정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누구에게든 권하고 싶다.
삶이 무엇인지 궁금한가? 우정이 무엇인지 궁금한가? 당신, 이 책을 읽어라.
아주 작은 실마리라도 찾게 될 것이다.
정답은 아닐지라도.
삶은 인간이 그러하듯 개별적인 것이고 따라서 삶의 제반문제에 대한 대답역시 개별적인 것이다. 타인의 답은 자신이 답을 찾아가는 데 보조 역할을 해 줄 뿐. 이윤기 식으로 말한다면 "책은 곧 지도" 인 것이다. 지도가 있는 여행은 편안하면서도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