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파도로 지은 성 (城) - 김화영 예술기행 김화영 문학선 4
김화영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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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란,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것들은, 해석할 수 있을 만큼만 재미있다.
이윤기의 『무지개와 프리즘』리뷰에서 썼던 말이다. 김화영의 이 예술기행문집을 읽다가도 그 생각을 하였다.

이 책을 읽는 도중에 누군가의 홈페이지를 방문했다가 루브루의 사진을 보았다. 그리고 노트르담의 사진도. 그에게 파리는, 그저 파리였다. 그러나 김화영의 루브루는 앙리 2세로부터 시작하여 루이 14세까지의 역사이고, 프랑스 문화 예술의 상징지이고, 나폴레옹의 문화 약탈의 상징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거대할 뿐인 노트르담, 파리의 상징일 뿐인 그 성당이, 김화영에게는 콰지모도와 에스메랄다의 노트르담이었다. 나폴레옹의 개선문은 빅토르 위고의 장지였고, 아, 팡테옹에서의 추억.

비어있는 빈 땅에서, 프랑스 혁명 당시 민중의 분노를 볼 줄 알고, 조그마한 성에서 아름다운 예술작품이 속삭이는 말을 듣고.

아. 그에게 보이는 세상이란, 참으로,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세상은 아는 만큼만 보이고, 보이는 만큼만 나에게 말을 건다. 알고 보는 세상이란. 얼마나 많은 비밀로 가득한 선물상자 같은 것인지.

프랑스 기행문임에도, 프랑스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보다 더 많은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책. 천재를, 어찌 질투하지 않을 수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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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님
야마다 에이미 지음, 김옥희 옮김 / 민음사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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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편의 소설이 실린 단편집을 세 번째 소설 〈피에스타〉에서 give up해 버렸다. 맙소사. 자존심 상했지만 어쩔 수 없다. ‘연애소설의 대가’라는 수식어에 속아 읽어보지도 않고 줄줄이 구입해 버린 야마다 에이미의 다른 소설들이 책장에 꽂혀 나를 비웃었다. 달라는 사람이 있으면 줘 버려야겠다, 생각했다.

요시모토 바나나나 에쿠니 가오리 류의 소설을 기대했던 나에게 야마다 에이미는 좀 쎘다.

읽다가 버려둔 소설은 늘 찜찜하다. 뭔가, 숙제를 덜한 것 같고, 수학 문제를 풀다 젖혀둔 것 같고. 게다가 누군가가,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가, “그래도 끝까지 읽어봐요. 괜찮은데.” 라고 말을 해 버리면 어쩔 수가 없잖은가. 다시 펼쳐야지. 단편집이 좋은 이유가 뭐겠어. 도저히 못 읽어! 라 외쳤던 <피에스타>는 그냥 넘겨버리고 다음 단편 <공주님>부터 읽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오호, 이게 대박이다!

첫 소설 〈메뉴〉의 첫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다. 목을 메고 죽은 어머니의 아래에서 요구르트의 맛을 음미하는 유치원생이라니, 뭔가 대단히 쿨 하지 않은가. 스스로를 ‘히메(공주)’라 칭하는 〈공주님〉의 여주인공 진짜 이름이 ‘히메코’였다니. 역시나 대단히 쿨하다.

오, 멋져, 멋져, 라고 읽기는 하는데, 읽고 난 다음이 뭔가, 독특한 느낌이다. 유쾌하진 않지만 가볍고, 경박하진 않지만 즐거운 일련의 인물들은, 그러나 돌아서는 순간 매우 무겁고 불행한 인물로 읽힌다. 그야말로 공주님 또는 도련님답게 고개를 꼿꼿이 들고 살아가지만 뭐랄까, 자존심으로 인하여 자신의 상처를 죽어도 드러내지 못하겠는 유치한 치기가 ‘쿨’한 행동 양상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비친달까.

어쨌든, 오, 멋지다.

ps. 일문 번역에는 확실히 김난주가 발군. 김옥희는 요시모토 바나나의 단편집『도마뱀』에서도 그랬지만 역시나 중언부언 알아듣기 힘든 스타일로 번역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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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악사
한수산 / 삼진기획 / 198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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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산은 참 기묘한 작가다, 박범신과 더불어.
대중 소설과 순수소설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서서, 대중적 감성을 순수하고 현란한 문체로 그려낸다. 박범신이 『깨소금과 옥떨메』류의 청소년 소설을 써 내고 있을 때, 한수산은 『가을 나그네』『거리의 악사』『아프리카여 안녕』『바다로 간 목마』등을 내 놓고 “딸에게 읽히고 싶은 소설”을 썼다고 했다. 그런 류의 소설들이 유행하고 있을 때(80년대 초중반) 그는 그야말로 대중적인 감성의 작가인가 싶다가도 81년 필화사건을 생각해 보면 단순한 대중소설 작가라고 말하기도 힘이 들고……. (그 필화사건은 3여년의 절필로 이어진다.)

『부초』나 최근작『까마귀』등에서 보여주는 사회의식과, 88년의 돌연한 도일(그는 자신을 고문한 보안사의 우두머리-노태우-가 대통령이 되는 꼴은 볼 수 없어 한국을 떠난다.) 등의 행적을 보면 그 시대의 다른 작가들보다 훨씬 강렬한 시대정신과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나 싶다가도, 끝내, 그가 말한 ‘딸에게 읽히고 싶은 소설’로 들어오면 무너져 내린다.

그의 문체는 단아하게 섬세하고, 그의 사유는 투명하게 맑다. 그야말로 사춘기의 여고생들이 열광할 법한 문체. 그 아름다운 문체가 통속적인 이야기들을 통속적이지 않게 바꾸어 놓는다. 경희대 국문과 출신-황순원의 제자- 답다.

소설의 내용은 간단하다.
여고시절의 친구인 재희와 서하가 한 남자로 얽히는 이야기. 부자였던 재희와 가난했던 서하. 여고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을 하는 대신 서하가 일했던 조그만 회사 중앙건설의 사장 아드님 윤수. 윤수와 결혼하는 재희, 윤수의 아이를 낳는 서하. 젊은 나이에 암으로 죽어버리는 서하 그녀.

그야말로 70년대식 ‘미워도 다시 한 번’ 스토리 아닌가.

이것을 한수산은 섬세한 묘사와 재치 있는 말장난으로 특화(特化)시킨다. 문체와 디테일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 보게 하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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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교육
로맹 가리 지음, 한선예 옮김 / 책세상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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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나쁜 것은 그 전쟁을 치르고 살아남은 사람들에게조차 인간에 대한 불신을 심어준다는데 있다. 열 네 살박이 폴란드 소년 야네크는 “소중한 것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아.”라고 중얼거리지만 -또 결국은 그렇다는 것이 증명 되지만- 전쟁의 한 가운데에서 부모를 잃어버리고 독일군을 3년 넘게 따라다니며 성적 노리개가 되어야 했던 조시아와 함께 살아가는 동안에 그것을 믿기란 아무래도 힘겨워 보인다.

야네크로 상징되는 음악과 아담 도브란스키로 대표되는 문학.

최초로 독일군을 죽이고 돌아온 열다섯(레지스탕스로 합류한지 1년이 넘었다.) 소년 야네크는 “음악가가 되고 싶었다”는 말을 하며 운다. 전쟁이 빼앗아간 소중한 것들은 음악, 문학 그 자체가 아니라 음악과 문학을 할 수 있는 정신 그 자체여서 나쁘다.

그럼에도 끝내 “소중한 것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아”서, 폴란드 군 소위가 된 야네크는 아담이 끝내지 못한 《유럽의 교육》을 완결지어 책으로 묶어내고, 군을 제대해 음악을 배우러 떠난다.

인간은 결코 패하지 않는다.
그러나 승리하기 위한 과정이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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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초 편지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야생초 편지 2
황대권 지음 / 도솔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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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보면 전체적인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는 어느 한 구절에서 마음이 울컥 하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이 책에서는 매번의 편지마다 거의 빠지지 않고 반복되는 “이 담에 내가 살 집은” “이 담에 우리집 마당에는” 이라는 구절이 그랬다. 나이 서른에 억울하기 그지없는 간첩 누명을 쓰고 무기수가 되어 옥에 갇힌 한 남자의 출소 후 희망에 관한 이야기는 아무런 수식어 없이도 그저 마음을 울컥하게 만들었다. 한 평, 또는 한 평 반의 조그만 독방에 갇혀서 척박한 운동장-운동장 흙은 물이 잘 빠지게 하기 위해 마사로 만든다. 그 흙은 물을 품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식물이 자라기 어렵다- 한 귀퉁이를 갈아 화단으로 만들고 야생초를 키우는 무기수의 지나치게 소박해서 도저히 가뭇없어 보이는 희망 탓에. 마음이 울컥 울컥.

이 책을 구입해 책장에 꽂아둔 것은 한참이나 된 일이다.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옥중 서간문집을 선물 받아 읽어본 일이 있지만 사실 나는 신영복 스타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 책도, 옥중 서간문집이라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아마 사지 않았을 텐데. 조선일보 선정의 이달의 책이라는 말에 그냥 샀던 것 같다. 당시 조선일보의 문화부 문학담당 기자였던 어수웅 기자의 글 쓰는 스타일도 읽는 스타일도 마음에 들어 하던 중이었기 때문에. 그리고는 그냥 밀쳐두었었다. 뭐, 구입만 해 두면 언젠가는 읽게 되지 않겠나.

책을 만나고, 작가를 만나는데도 분명 어떤 계기나 인연이 작용할 때가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하는데, 다른 책들에 우선순위가 밀려 책장의 제일 바닥 일본문학계통의 책들이 두서없이 꽂힌 장소에 1년이 넘도록 나의 시선을 받지 못하고 꽂혀있던 이 책이 뽑혀 나온 것도 분명 그 어떠한 ‘인연’ 때문이었다. 하나의 인연에는 하나의 원인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올 봄, 새삼스레 목련나무의 아름다움과 목련 특유의 신비로움-이건 나중에-을 발견하면서 자연의 신비에 놀라고 있던 찰나에, KBS 제1TV의 심야 프로중 제3지대라는 프로에서 황대권이 나오는 환경 다큐멘터리의 끄트머리를 얼핏 보게 되었고(자운영 꽃을 비롯한 야생초의 꽃을 꺾어 야생초 모듬 샐러드를 먹고 있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박완서 식의 “맹렬한 적개심”을 느끼며 정원의 잡초(주로 민들레-토종이 아닌-)를 뽑아 주다 문득 종이 다를 뿐 잔디와 이 잡초들의 차이가 무엇이 있겠는가 하는 묘한 깨달음이랄까 안쓰러움도 느끼고. 어제 저녁에 보았던 KBS 환경 스페셜 “세계의 환경도시를 찾아서”(타이틀 정확하지 않음)의 쿠바의 아바나 市를 보고났더니(이 모든 것들이 요 근래 줄기차게 일어난 일들)

잊혀져 있던 이 책이 떠오른 것이다.

식물과, 환경의 이야기를 읽기 위해 꺼내든 이 책에서

“이 담에 우리집 마당엔…….” 이라는 이 구절 때문에 그저 울컥 한 마음이 들어 한 구석이 싸-아- 해 오는 경험을 하게 만들었던 멋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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