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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하하는 저녁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15개월을 두고 실연하는 이야기, 라는 표제에 끌려 책을 집어 들었다. 아니다, 거짓말이다. 사실은 에쿠니 가오리의 책은 죄다 사 들여서 읽는다. 전작주의자스러운 중증이다. 집어 들고보니 15개월에 걸친 실연이야기더라.
미친 듯이 연애를 했던 첫사랑의 시절에, 나는 사랑이 영원한 것일 줄로 믿었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의 그 유명한 대사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라는 말, 그 말을 나는 내 첫사랑이 끝나고도 3년이나 뒤에 중얼거리게 되더라.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그 말은 이미 변한 사랑을 확인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라는 것도 그때 알게 되었다.
남자주인공 다케오는 8년에 걸친 사랑을 단 사흘로 인해 버린다. 동거까지 하였던 8년차 연인을 버리는 그를, 그 순수함 때문에 용서해 주었다. 변해버린 마음을 부여잡고 상대방을 할퀴고 상처 입혀 끝내는 상대방에게서 끝내자는 소리가 나오게 만드는 그 비겁한 연인들에 비해 그의 태도는 얼마나 순수하게 쿨한가. 하여 그를 용서하였다.
존재가 재앙이 되는 여자 하나코. 참으로 나쁜 것은 그 재앙을 하나코가 의도한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그녀를 아는 모든 사람이 그녀를 사랑하게 되지만 그녀를 사랑하는 누구도 사랑하지 못하는 여자. 그렇지, 때로는 원하지 않는 사랑을 받는 것도 일종의 폭력에 해당하니까.
리카. 8년의 세월로도 사흘을 이기지 못한 여자. 그녀는 울지 않았고, 푸념하지 않았고, 분노하지 않았다. 조용히, 그야말로 낙하하는 저녁처럼 느릿하고 담담하게 실연을 받아들였다. 일본인의 감성에 동조를 느끼게 되다니, 맙소사-!다. 10권이 넘는 일본 여류문인의 소설을 읽어왔지만 처음으로 그 감성에 동조를 느끼게 된 여주인공이다. 리카.
자신의 불같은 연애가 꽃이 시들 듯 시들어 가고, 사그라지고 사그라져 그렇게 애틋하였던 그를 만나도 이제는 더 떨리지도 슬프지도, 원망스럽지도 않은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 것. 그래서 그와 다시 연애를 시작할 수도,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을 수도 있게 되는 상태. 그렇지. 실연이란 그런 것이다. 그를 봐도 아무렇지도 않은 때가 되어 실연인 것이다. 15개월에 걸친 실연이란 다케오에 대한 리카의 마음이 뜨겁게 불타올랐다가 싸늘하게 식었다가 평온한 온도에 도달하는 그 시간을 말하는 것이었다. 헤어짐을 말한 직후의 ‘곱지 못한 마음’이 다시 곱게 다듬어 지는데 걸리는 시간.
확실히, 바나나의 인물들보다는 가오리의 인물들이 더 쉽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