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박완서 소설전집 9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02년 5월
평점 :
품절


인간은, 어디까지 이기적일 수 있을까. 대학시절 교수님 중 한분은, 우애가 타고나는 것이 아님을 강변하셨다. 한 사람의 인생 최초의 그리고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 바로 형제라고. 잠깐의 놀이친구 하나를 얻는 대가로 얼마나 많은 생존의 필요조건을 빼앗기게 되는데 우애라는 게 자연스럽게 생길수 있는 것이냐고 물으셨다.  

굳이 그런 말을 듣지 않아도, 첫째를 위한 최고의 선물이 둘째 운운 하는 말은 웃겼다.  

먹을 것이 흔전만전인 요즘 세상에도, 형제는 어린 존재의 식탐에 최대의 적이다. 하물며 보릿고개가 존재하던 과거엔 오죽했을까.  

이 책도 그렇게 시작한다. 어른은 배곯아 죽고, 아이는 배터져 죽는다는 전쟁통에 일곱살 수지는 삶은 고구마 하나를 더 먹기 위해 다섯살 동생을 저자거리까지 끌고가 버리고 온다. 일곱살과 다섯살.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이 되면 살아남기 위한 인간의 본능은 나이의 한계를 넘어선다. 단순히 복잡한 저자에서 손을 놔 버리는 것이 아니라 버리기 위해 그 저자까지 끌고 가는 일곱살 아이의 모습은 현재의 일곱살들에게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다.  

둘째가 생기기 전 나는 한없이 너그러운 엄마여서 감히 말하건대 큰소리 한번을 안지르고 애를 키웠다. 그때 나는, "아이가 어떻게 하면 엄마를 화나게 할 수 있지요?" 라는 말을 용감하게 하는 엄마였다. 식용유를 쏟아 그 위에서 헤엄질 치기가 두번이었고, 식초병을 들고 온 집안에 식초를 뿌리고 다닌 적도 있고, 결혼 후 첫 생일 선물로 받은 명품 가방에 멸치 액젓을 부어버린 일도있다. 그래도 화가 나지 않았다. 식용유 위에서 헤엄치는 아이와 같이 미끄럼을 타며 놀았고, 식초며 멸치 액젓을 제대로 간수못한 내탓이지 아이를 나무라진 않았다. 아이니까, 당연한 거라고.  

그렇게 한없이 너그러운 엄마에게서 자란 큰놈이, 둘째가 태어나자 야단을 맞기 시작했다. 다른 건 다 그렇다 쳐도, 작은놈에 대한 해꼬지만은 묵과하기가 어려웠다. 작은놈은 기를 쓰고 큰놈의 장난감을 탐냈고, 엄마의 부엌살림을 포함하여 이 집에 있는 모든 것을 독점하던 큰놈은 제것을 건드리는 작은놈을 밀어내고 때렸다. 이해를 하면서도 순간순간 소리를 지르게 되고, 아이는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뭐든지 다 내거였고, 뭐든지 다 하게 해 주던 엄마가, 무슨 짓을 해도 오냐오냐 니가 궁금했구나, 했던 엄마가 어느날 갑자기 돌변한거다.  만약 둘째가 아니었다면 난 여전이 큰놈을 야단치지 않고 키우고 있을 거다. 우리 큰놈이 좀 얌전하고 순한 편이라서.

이래도, 나의 큰놈에게 작은놈은 선물이 될수 있을까. 난 사실 아직도 잘 이해를 못한다. 큰애를 위해서, 외로워 보여서, 나중에 부모죽으면 서로 의지되라고 둘째를 낳기로 했다고 말을 하는 사람들을. 어린시절엔 그렇다쳐도, 남보다 못한 형제, 많이 봤다.  

예전에 우리 교수님이 경영하시던 회사의 비서로 오래 재직하신 분이, 결혼을 해서 아이를 하나만 낳고 그만 낳더란다. 애가 셋이던 교수님이 그분에게 애를 더 낳으라 권하자,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부모 아래에서 장녀로 태어나 동생들의 치닥거리를 위해 대학까지 포기하고 결혼도 한참이나 늦게할 수 밖에 없었던 그 비서분은 "내 아이에게 형제라는 의무를 지워주기 싫습니다." 라고 대답하더라나.  

이 책의 주인공 수지와 수인(오목이)의 오빠인 수철에게도 동생은 의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난리통에 잃어버린 동생을 찾고서도, 갓 결혼해 이룩해 놓은 자신의 가정에 누가 될까봐 동생을 모른척 해 버린다.  

그때 수철이는 이미 결혼해서 아름다운 아내와 귀여운 자식을 두고 있었고, 하나 남은 누이동생 수지를 부럽지 않게 호강시켜가며 곱게 기르고 있었다. 그는 좋은 집안에서 고생 모르고 자라서 그에게 시집와 그의 자식을 낳아준 아내를 누구보다도 사랑했다. 너무 사랑해서 누이동생이 하나 달린 것도 속으로 미안한데 하나를 더 끌어들이다니, 그것도 고아원으로부터, 그건 차마 못할 일이었다. 가정이라는 지상의 낙원을 그렇게 모독할 순 없었다.
..........
그는 동생을 모르는 척 하는데 양심의 가책은커녕 난만한 꽃밭을병충해로부터 지켜야 하는 원정으로서의 사명감마저 느꼈다.
p. 111 

수철에게는 잃어버린 동생 오목이 뿐만아니라 고이 기르고 있는 수지마저도 자신의 낙원을 위해서는 걸림돌이 되는 존재다.  

난 가끔 박완서 선생님의 글이 불편할 때가 있는데 그게 바로 이런 순간이다. 위선으로 포장해서 자기 자신마저도 외면하고 싶어 저 깊은 구석에 잘 파묻어둔 인간의 구린 내면을 작가는 지나치게 환한 조명을 들이대며 만천하에 공개해 버린다. 정곡을 찔린 독자는 휘청, 할 수밖에 없다. 아이코 선생님, 아파요, 좀 살살... 이라고 엄살이라도 부리지 않으면 그 순간을 넘기기가 힘들다.  

형제간의 우애, 가족간의 정.. 글쎄. 나는 언젠가 "도저히 극복못할 가족의 문제를 넌 경험해 본 적이 없지 않느냐" 라는 공격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때도 나로서는 얌전히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다. 형제의 우애, 가족의 정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가족을 나의 치부로 느껴보지는 않은 사람이다. 어떻게 가족을, 형제를 치부라고 말을 할 수 있느냐는 항변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도저히 극복못할 가족의 문제"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다.  

내가 자주가는 인터넷의 익명 게시판에는 종종 그런 류의 글이 올라온다. 술주정뱅이 아버지, 신용불량자 오빠, 병든 엄마 단칸방에 사는 식구들 그런데 나는 죽도록 공부해서 화려한 학벌과 좋은 직장을 가지고 있고 외모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평범한 남자는 나의 환경을 받아들여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차라리 고아이고 싶다, 그들은 평생 내가 책임져야 하는 내 가족이니까 나는 결혼을 못할 것이다, 난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싶은데 나에게는 너무 과분한 희망같다. 하는 고백.  

이 소설의 수철을 지극히 희귀한 이기적인 인물이라고만 폄하할 수 없다는 것이 나는 아프다. 난리통에 아버지는 행방불명되고 어머니는 자신이 보는 앞에서 기총 난사로 참혹한 시신이 되어버린 걸 목격해야 했던 14살 소년은, 당연히 가정이라는 것에 남들보다 훨씬 집착할 수 밖에 없다. 그것도, 그냥 가정이 아니라 "행복이라는 게 진열장의 보석처럼 더욱 빛나고 돋보"여 "도대체가 흠잡을 데라고는 없었고 작은 불행이 숨어 있을만한 그늘도 없(p.61)"는 그런 가정을 그는 지켜야 한다. 그의 이기는 거기서부터 시작이다. 그는 특별히 이기적인 인간이라기 보다는 아픔을 가지고 도사린 짐승이다. 그는 작은 불행이 숨어있을만한 그늘이 생길 계기를 만드는 것조차 두려워 한다. 그런 그에게 형제간의 우애는 생기고 자라날 틈이 없다.  

수지에게 오목이는 자신의 추한 과거에 대한 증인이다. 과거에 자신이 얼마나 추악한 짓을 했는지. 오목이를 볼 때마다 그녀는 자신이 저지른 일의 참담한 결과를 확인해야만 한다. 자신이 한 인간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그것도 피와 살을 나눈 형제에게 한 짓이니 내가 얼마나 나쁜 인간인지를 속속들이 깨달아야만 했다. 처음에는 과거를 숨기고자 한 방어본능에서 동생을 외면했고, 나중에는 외면했던 일이 또다른 죄가되어 그녀를 짓누른다. 동생에 대한 우애보다 나 자신에 대한 보호가 먼저다.  

첫째를 위해 둘째를 낳는다고, 형제가 가장 큰 선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우애를 인간 본능의 영역으로 보는 것 같다. 나는 우애란 극기의 결과물이라고 본다.  

박완서 선생님의 수많은 소설 중, 가장 단순하고 신파적인 스토리 라인을 따라가고 있으면서도 인간의 구린 속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소설이다. 그 속에서도 그 시대 풍속사에 대한 묘사는 빛을 발한다. 이런 부분에서 나는, 소설가의 시대에 대한 책무를 읽는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교수님은 우애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말씀해 주셨다. 우애란, 교육의 결과인 거라고. 형제 둘이 우애를 가지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끊임없는 극기와 부모의 자상한 배려와 교육이 있어야만 한다고.  

이 책은, 사람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형제간의 우애에 대한 환상을 여지없이 깨준다.  

하긴 그러고보면, 인류의 역사는 형제살인의 역사로 시작되지 않던가. 카인과 아벨 말이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lanca 2010-01-06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정말 너무 잼있게 읽고 있어요. 책이 진짜 팍팍 넘어가고. 박완서 샘이 이런 통속적인 라인을 이다지도 재미있게 적나라하게 쓰셨다는 게 놀라와요. 무엇보다도 위선의 해부. 넘 찔려서 ㅋㅋㅋ 우애라는 것. 우정. 다 요즘에는 사기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거라도 믿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는 세상 때문에 사람들이 있지도 않은 가치를 붙잡고 견디는 것이 아닌지.
그리고 둘째. 안그래도 둘째를 고민해보게 되는데 어느 정도 커서 자기 절제와 예의라는 것을 알게 되지 않는한 서로 최초로 경험하게 되는 부정적인 관계인 것도 사실인 것 같아요. 아, 이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삶이 넘 음울해 집니다. 그나저나 이 책 추천해 주신 거 넘 고마워요, 아시마님! 그리고 몇 월 달에 가시는지. 아래 댓글에 '그 때쯤이면'이라는 말이 서운하게 들려요--;;

아시마 2010-01-06 20:54   좋아요 0 | URL
박완서 선생님의 소설을 공통적으로 관통하고 있는 소재가 바로 그 도시의 속물적 통속성과 여성성이예요. 이걸 주제로 한 논문집도 나와있죠. 이 책 말고도 <휘청거리는 오후>나 <도시의 흉년>도 1970-80년대를 배경으로 그 시대상을 세밀히 살려내면서 인간의 속물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죠. 위악적일 정도로요. 이렇게 통속적인 소재를 다루면서도 작품성이나 문학성을 잃지 않는다는 면에서 참 희귀한 작가예요. 단점이라면, 박완서 본인의 배경(서울대 출신)이나 다섯자식들(최소 2명이 서울대 출신으로 알고 있어요. 첫째 호원숙씨와 죽은 막내아들)의 특징때문에 그런지, 주인공들이 다들 대학 출신의 엘리트 상류층이라는 거. 예전엔 별로 느끼지 못했는데 요즘 새삼 느껴지네요. 비슷한 시대의 비슷한 이야기를 다룬 조세희의 난쟁이 연작과 비교하면 그 괴리감이 참 크죠.
그 외에 여성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살아있는 날의 시작> 이나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도 좋아요. <서있는 여자>는 상대적으로 평론가들에게는 호평을 받았는데 저한테는 다른 작품에 비해서는 좀 처진다는 느낌이었구요.
전쟁과 박적골 이야기도좋지만 이런 이야기도 참 좋죠.
아참, 전 빠르면 6월 늦어도 8월이요. 근데 가서도 서재질 계속할거라, ^^

blanca 2010-01-06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아시마님 저 지금 마지막 부분 읽고 있는데 눈물나요......박완서샘을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는데...이 책 권해주셔서 정말 또 한 번 감사를....박완서샘 관련하여 아시마님은 거의 논문 한 편 쓰셔도 될 듯한데요^^ 살아있는 날의 시작은 처음 들어요. 아! 읽을 거 투성이군요. 리뷰도 안쓰고 다 빌려 읽던 시절이 있어서 너무 아쉬워요. 박완서 샘 책을 대체 무얼 읽었고 안 읽었는 지를 알 수가 없답니다.-..-
그리고...죽은 막내 아들. 너무 가슴아파요. 남편이 췌장암으로 죽고 6개월 만에 그렇게 된 거더라구요. 그 때 출간한 책 읽고 너무 가슴이 아프더라구요. 그리고 큰 따님 남편분은 EBS명의에 나오더라구요^^ 아내가 박완서 따님이라고 성우가 ㅋㅋㅋ

6월이면. 아이구. 서재질 계속, 당연하지요. 저랑 독서와 감동을 같이 ㅋㅋㅋ 계속 나누셔야죠. 저는 주변에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아무도 없어서 외롭답니다. 다들 책을 사서 본다면 이상한 눈으로 보고. 책 얘기 하면 하품 시작하시고. 이렇게 얘기를 하고 가니 좀 숨통이 풀리네요. 전 그럼 따뜻한 겨울을 읽으러 이만 휘리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