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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달리아 1 ㅣ 밀리언셀러 클럽 53
제임스 엘로이 지음, 이종인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12월
평점 :
1940~50년대의 미국 거리는 대범한 악당과 섹시하지만 비정한 미녀, 썩은내가 진동하는 부패 경찰의 거리이다. 그 사이를 헤메고 다니는 한 경찰이 사건을 해결해보려 하지만, 그 역시 이내 미치거나 황폐해질 것이다. 그래서 그는 깨끗한 방법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더이상 아무도 깨끗하지 않으니까.
로망 느와르의 세계는 언제나 축축한 흑백 필름이다. 간혹 팜프 파탈의 선홍빛 입술이 선명하게 떠오르곤 하겠지만, 둘러봐도 온통 잿빛 세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씬 시티>가 영화로 만들어졌을 때 그 비주얼이 주었던 느낌은, 오싹하리만치 현실감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각적 자극으로 받아들이는 느와르 영화와는 달리, 활자로만 받아들이는 느와르 소설의 세계는, 그 한계만큼이나 무한한 자극을 준다. 실제로 <블랙 달리아>를 읽는 내내 입에선 쇳가루의 맛이 나는 피냄새가 계속 맴돌았다. 입술을 깨물고 있었던 건가 하고 확인해 볼 정도로 생생한 피의 맛. 음침한 거리 사이로 낡은 홈통에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스윽스윽 하고 아스팔트가 갈리는 듯한 신경질적인 소리가 이명처럼 들려왔다. 과히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었지만, 그만큼 제임스 엘로이의 묘사가 생생했던 거라고 생각하니 놀라울 뿐이다.
미쳐가는 버키의 모습을 보는 것도 괴로운 일이었다. 블랙 달리아는 그의 동료를 집어 삼키고, 그의 일을 집어 삼키고, 그의 사랑을 집어 삼키고, 마지막으로는 그를 집어 삼키기 위해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 파멸의 길이란 걸 알면서도 안간힘을 다해 달려가는 버키의 모습을 보면서 영화<살인의 추억>을 떠올린 건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사건의 피해자나 범인의 잔혹성 때문이 아니다. 이제는 '잡고 말리라'라는 집념만이 남아서 살을 태우고 뼈를 녹이고 있는 것이다.
작가가 기술적으로 이 소설을 썼다면 나 또한 기술적으로만 읽겠다. 장르적 골격만을 훑으며 책을 덮는 순간 다 잊어 주겠다. 그러나, 보지 못하고 넘어갔던 헌사를 책을 다 읽고 나서야 보게된 얄궂음이라니. "어머니, 스물 아홉 해가 지난 지금에야 이 피묻은 고별사를 바칩니다." 아, 그에게는 이 책은 소설이 아닐 수도 있겠다. 그 역시 블랙 달리아의 환영에 쫒겨 잠을 설치는 밤이 계속 되었을지도. 아무때나 감정이입이 너무 잘 되는 나는 또 이걸, 잘 넘길 수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