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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레 사진관 - 하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네오픽션 / 201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당신이야말로 이제 달려.
언제까지고 멈춰 있기만 해서는 안 돼. 역은 오래 머무는 장소가 아니야.
달려 나가, 하나비시 에이이치.(2권, 569)
그래, 철로는 이어져 있으니까 어디로든 달리자. 달리기를 다짐하는 에이이치의 모습 뒤로 어느 시절인가의 남편 모습이 겹친다. 그리고 또 내 모습도.
가족은 핏줄을 핑계로 서슴없이 서로에게 속박이 되기도 한다. 선의이기 때문에 더 감당할 수 없는 말들을 내뱉기도 하고, 부모 형제라는 이름으로 도망칠 곳조차 무자비하게 뺏어버리기도 한다. 얼마나 슬픈 일인가. 도대체 이런 게 어떻게 가족인가.
그래서인지, 여봐란 듯이 미야베 미유키는 정상적인 가족의 모습 (이를 테면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주고 서로의 이야기에 귀기울여 주는,) 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에이이치의 가족, 덴코의 가족, 탄빵의 가족은 하나같이 부모와 자식, 형제들이 한 자리에 모여 밥을 먹고, 함께 밤을 보낸다. 뭐야, 이 사람들. 부자가 나란히 누워 집 정원에서 야영을 한다니, 비현실적이야. 어이없는 웃음을 피식 흘리다가 2권이 끝날 무렵에야 이게 시위라는 것을 알았다. 미야베 미유키의 시위.
이봐, 아직도 이 하늘 아래에는 가족이 함께 둘러앉아 밥을 먹고 서로의 일과를 나누며, 함께 고민을 나누려는 가족들이 많다고. 그러니까 당신, 지지 마. 포기하지 마.
그래, 내가 만들고 싶었던 가족은 이런 거였지.
여기까지 오게 만든 것만으로도 충분히 미미 여사에게 감사했다. 눈에 선하게 그려질 정도로 정겨운 고구레 사진관의 쇼윈도를 본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반짝반짝 빛나는 피카짱의 스케치와 탄빵의 연주를 들은 것 만으로도, 그들 모두와 우에노 공원을 다녀온 것 만으로도 넘치도록 행복했다.
그런데, 미미 여사는 한 가지 주문을 더 보낸다. 그런 가족을 지키고 싶으면, 그런 가족을 꾸려가고 싶으면 너가 직접 매듭지으라고. 화해를 하든 사과를 하든 화를 내든 도망치든 너 손으로 직접 하라고.
철로는 이어져 있으니까 열차는 어디로든 달릴 수 있다.
다만, 자신의 두 발로, 스스로의 힘으로 해야 한다.
마음 속 죄책감은 드러내서 풀어야 한다. 언제까지고 냉동시킨 채 묻어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상처만을 안겨줬던 관계라면 스스로 끝을 외쳐야 한다. 누군가의 집 툇마루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면, 떠날 땐 어른스럽게 '그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확실히 인사를 하고 떠나야 (1권, 149)한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너 스스로.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도 꽤나 뼈아픈 충고였다. 누군가의 딸로 아내로 엄마로 며느리로 선다는 것은, 생각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지만 이렇게나 따뜻한 응원을 받았으니, 도망치지 않고 달려 가야지. 저 너머 흐드러지게 핀 봄꽃을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