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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영혼
필립 클로델 지음, 이세진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5년 2월
평점 :
품절
전쟁이란 무엇일까.
상처가 회한을 곱씹는 수많은 밤을 거치며 천천히 곪아가는 것.(43)
커다란 바늘로 부상자와 시체들을 한데 뒤섞는 죽음의 시계가 울리는 것.(63)
그렇다면, 전쟁이 이런 것이라면, 데스티나 검사의 마음 속에도 전쟁이 있었고, 아름다운 리지아 선생님도 항상 전쟁 중이었으며, 우리의 소심한 주인공 다데도 온 삶이 전쟁이었다. 모든 것이 전쟁이었다.
사랑을 잃고 부유하는 회색 영혼들의 삶은 모두 전쟁이었다. 얼굴의 반쪽이 날아가 버린 채 진료소로 실려온 이름없는 병사처럼, 그들의 영혼은 모두 반쪽이 날라가 버렸다. 그래서 그들은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죽은 이들을 끊임없이 보았고, 귀를 닫고도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다. 사랑을 잃은 순간부터 그들은 모두 회한을 살았다. 주인공이 마지막으로 고백했듯이, 그는 더이상 살아있지 않았다.
"지난 세월이 더디게 느껴진 것은 사실이되, 나는 그 세월을 겪지 않았다."(250)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에 허리띠를 걸고 머리를 디밀 수 밖에 없었던 사람의 마음을, 또 다른 사랑의 목을 제 손으로 조를 수 밖에 없었던 사람의 마음을, 몇번이고 총구를 목구멍으로 들이밀고 쓴 눈물을 삼켜야 했던 사람의 마음을.
그들은 모두 상처받은 영혼들, 흰색도 검은 색도 아닌, 뿌옇게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는 회색의 영혼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 것도 모르는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기형도, <빈집>